2013년 부산에서 제약회사 출신 A씨와 그의 장인 B씨가 약국에서 최대 1000정씩 감기약을 구입한 뒤 불법 마약을 제조하려다 미수에 그쳐 불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이들이 구입한 것은 슈도에페드린(PSE, Pseudoephedrine) 성분 감기약. 이 성분은 페네틸아민 계열(속칭 암페타민 계열)의 교감신경흥분제로 특수한 정제방법을 거치면 필로폰(Philopon)이라 불리는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할 수 있다.
슈도에페드린은 에페드린과 구조가 매우 유사해 ‘가짜’라는 뜻을 나타내는 접두사 슈도(pseudo-)가 붙었다. 효과도 비슷하다. 에페드린은 마황에 많이 들어 있고 중추신경을 자극하며 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다. 알칼로이드는 질소를 함유한 알칼리성의 유기물질로 동·식물 내에서 발견된다. 코카인, 헤로인 등 환각을 일으키는 대부분의 마약은 알칼로이드다.
이 성분의 주요 작용은 교감신경 흥분으로 혈관 수축, 기관지 확장, 비충혈 제거 등에 효과가 있어 코막힘 완화제나 천식 치료제, 각성제 등으로 사용된다. 과다하게 복용하면 빈맥, 부정맥, 저혈압 등을 동반하는 심혈관계 흥분작용을 유발하거나 환각, 경련 등을 일으킬 수 있으며 심하면 사망에 이른다.
2013년 당시 이 약은 일반의약품으로 누구나 용량과 관계없이 구입할 수 있었다. A씨는 기술이 부족해 제조에 실패했지만 압수된 감기약 7200정은 2만명 이상에게 투약할 수 있는 필로폰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같은 해 창원에선 해외 인터넷 사이트와 화학서적을 참고해 필로폰 34g 제조에 성공했다가 적발된 사례도 발생했다. 시가 1억1000만원에 달하는 양으로 관련 지식과 장비가 전무한 상황에서도 가정에서 마약 제조에 성공한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 우려를 낳았다.
모방·유사 범죄가 늘어나자 2013년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슈도에페드린 120㎎ 복합제를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약국에서는 슈도에페드린이 60㎎ 이하로 들어있는 제품만 구입할 수 있게 됐다. 식약처는 제약회사에 가급적 소포장 공급할 것을 요청했고 대한약사회는 각 약국에 1인당 4일분까지만 판매하도록 권고했다. 또 슈도에페드린 관련 사례가 발생하면 구매경로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식약처의 이런 조치는 단속 의지를 보여주는 차원에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6년이 지난 지금 해외 인터넷 사이트나 유튜브 등에서는 이같은 마약제조 방법을 알려주는 동영상이 버젓이 과학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업로드돼 있다. 감기약에서 특정 성분을 추출하고 다양한 성분을 합성해 신종마약을 만드는 영상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기본적인 화학지식만 익히면 쉽게 따라할 수 있을 정도다.
대검찰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개인이 필로폰을 제조하다 적발되는 사례는 2013년 이후 매년 1건 이상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고 등이 이뤄지지 않으면 적발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이같은 사례는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4월엔 조직화된 감기약 밀수 조직이 적발됐다. 3000억원 상당의 메스암페타민 100㎏을 제조할 수 있는 감기약을 호주 등에 밀수출한 일당이 세관 당국에 적발됐다. 관세청 서울본부세관에 따르면 회수한 감기약은 292만정으로 필로폰 약 100㎏을 제조할 수 있고 이는 333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다. 국내 수사기관이 1년간 적발하는 밀수입 필로폰 양의 2배에 달한다.
세관 관계자는 “2010년 태국으로 밀수출하려던 915만정의 감기약이 적발된 적이 있다”며 “감기약을 마약류 원료물질로 밀수출해 활용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어 원료물질에 대한 정보분석과 모니터링을 강화, 불법 거래를 사전에 차단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8월엔 감기약 대신 한약재 ‘마황’을 직접 대량 수입하고 중국 마약 기술자를 고용해 필로폰을 제조하려던 일당이 붙잡혔다. 에페드린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마황은 대량의 감기약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고 가격도 저렴해 더 집중적인 관리·감독이 필요하다.
부산지방경찰청 관계자는 “감기약 7200정으로 필로폰 660g을 제조하는데 150만원이 소요되는 반면에 마황 21㎏에 20만원 남짓이 들고 필로폰 10㎏이 제조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외국에서는 이미 슈도에페드린을 활용한 암페타민, 메스암페타민 제조 관련 문제를 겪었다. 미국, 유럽의 약국에서는 슈도에페드린 성분이 포함된 감기약은 눈에 잘 보이는 구석에 배치해 비정상적 구매를 하는 사람을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부적절한 구매자는 고발 조치된다. 단일제는 처방약으로 전환한 제품도 상당수에 달하며, 일반약은 모두 다른 성분과복합제로 만들어 성분 개조를 어렵게 하는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최근 미국 미시건주에서 미국 천식·알러지재단(AAFA)이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슈도에페드린을 함유한 일반의약품 감기약 및 항알러지제들의 처방용 의약품 전환에 대한 여론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7명이 불법적인 슈도에페드린 판매를 통해 불법적으로 전용되는 문제를 추적조사하고 차단하기 위한 현행 NPLEx(National Precursor Log Exchange) 시스템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NPLEx는 2014년 도입된 전산 구매이력 추적 시스템으로 일별, 월별 구매한도를 초과하면 자동으로 판매가 금지되고 이 구매기록에 따라 법적 제재를 가할 수 있다.
‘마약 청정국’이라 자부하던 한국은 음성적으로 퍼지는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갖지 못한 탓에 그 지위를 상실했다. 국제연합(UN)은 인구 10만명당 마약류 사범이 20명 미만인 국가를 마약 청정국으로 분류하는데 한국은 24명에 달한다. 검찰 자료에 따르면 국내서 마약사범으로 단속된 인원은 매년 증가해 2018년에 1만2613명을 넘어섰다. 마약에 취한 나라라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범정부적 단속과 관리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