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와 의료계의 반발로 투자개방형병원(영리병원) 추진에 제동이 걸린 가운데 정부가 대안으로 의료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 활성화를 통한 의료서비스 발전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져 의료계의 반발이 예상된다. 국회에 따르면 최근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생협법 주무부처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기재부로 변경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공정거래위는 다단계판매업, 상조회사(장례업), 대기업의 동네상권 침투 등 민감한 분야를 다루지만 이를 아는 이는 의외로 적다.
현재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에 계류 중인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기재부는 의료생협 활성화를 위해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규제 완화를 통해 대기업 등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의료생협의 영리활동을 보장하고 의료서비스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다. 현행법상 비(非) 의료인의 의료기관 투자는 경제자유구역법상 투자개방형 국제병원과 생협법상 의료생협, 공익재단·복지재단 등 비영리재단만 가능하다.
하지만 의료생협을 바라보는 의료계의 시선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동안 의료생협이 과잉진료, 진료비 뻥튀기 등 불법 의료행위의 온상이 돼왔기 때문이다.
원래 의료생협은 30분 대기·3분 진료, 의료양극화, 비급여 과잉진료 등 문제가 끊이질 않는 상황에서 의료소비자가 힘을 합쳐 건강권을 지키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1990년대 초 경기도 안성, 안산, 인천 등 지역에서 처음 시작됐다.
의료생협은 조합원, 지역주민, 취약계층에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협동조합이다. 의료인만 개설할 수 있는 일반병원과 달리 비(非) 의료인도 설립 출자금 1억원 이상, 조합원 수 500명 이상이면 지방자치단체 인가를 받아 의료인을 고용해 설립할 수 있다. 조합원 1인의 최소 출자금액은 5만원이며 총 출자금액의 20%를 넘을 수 없다.
협동조합 명의로 병원을 세우는 것도 가능한데 2010년 9월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생협법) 개정안에 ‘50% 범위 안에서 비조합원에 대해서도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면서 의료생협 병원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2009년 108개에 그쳤던 의료생협은 2015년 577곳으로 늘었다.
의료생협병원은 일반 병원과 달리 생협 조합원들이 병원을 공동 소유 및 운영한다. 의사와 간호사는 진료 및 치료에만 전념하며 생협으로부터 임금을 받기 때문에 환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의료서비스를 제공받게 된다. 보통 조합원이 되면 비급여 진료시 10∼30%의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다. 병원 운영비는 주민들이 모은 돈으로 충당한다. 정기 건강검진 실천단, 운동모임 같은 소모임도 만들어 주체적으로 운영한다.
의료생협은 또 조합원을 대상으로 주치의제도를 운영한다. 조합원은 오랜 기간 같은 동네에서 알고 지냈던 주치의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평생 건강을 관리할 수 있다. 주치의는 조합원의 가정으로 방문진료를 가거나, 주민들을 대상으로 건강교육을 실시한다.
최봉섭 한국의료생활협동조합연합회 상임이사는 “의료생협은 의료소비자 중심의 진료·상담·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직접 돈을 모아 병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자발적 모임”이라며 “생협 산하 병원의 장점은 환자와 의료진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과잉진료를 지양하고 정당한 의료행위가 이뤄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병원과 달리 과잉진료나 바가지를 씌울 일이 없으니 조합원과 의료진간 신뢰도도 높은 편이다. 국내 최초로 설립된 안성 의료생협은 현재는 조합원 4832세대, 출자금 8억7955만8511원으로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생협이 인기를 얻으면서 비의료인도 병원을 개설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한 불법 사무장병원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원래 비의료인은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없지만 협동조합을 만들면 개설이 가능하다. 서류를 조작해 유령 조합원을 만들거나, 주변 지인을 동원해 출자금을 대납하는 방식으로 조합원을 편법으로 모집한 뒤 협동조합 허가를 받고 조합 명의로 병원을 개설한다. 설립인가를 받을 때 첨부하는 창립총회 회의록도 허위로 작성한다. 그동안 의료생협 및 사무장병원 담당부처의 관리감독이 얼마나 소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설립된 ‘짝퉁’ 의료생협은 조합원의 공동재산으로 취급되는 일반 의료생협병원과 달리 설립자가 사무장을 맡아 직접 병원을 소유 및 운영한다.
예컨대 이달 초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의료생협 이사장 A 씨는 2012년 2월 가짜 조합원으로 의료생협을 만든 뒤 지난해 6월까지 치과를 운영하며 건강보험 급여 명목으로 총 5억9000만원을 받아 챙겼다.
함께 입건된 또다른 의료생협 이사장 B 씨도 같은 방식으로 의료생협을 설립하고 치과, 한의원, 가정의학과 의원 등 3개 병원을 불법으로 운영했다.
이들은 의료생협 설립인가를 받기 위해 조합원 개인이 내야 할 출자금을 사전에 나눠주고 돌려받는 식으로 대납했다. 또 의료생협을 설립하기 전 열어야 하는 총회도 개최하지 않고 서류만 만들어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했다. 병원 운영비를 빼돌려 개인적으로 사용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처럼 불법행위를 일삼다 보건당국에 의해 적발된 불법 사무장병원은 2009년 6곳에서 2016년 247곳으로 급증했다. 또 이들이 최근 7년간 부당하게 챙긴 진료비는 8119억7000여만원에 달한다. 결과적으로 불법 사무장병원은 건강보험 재정의 누수를 야기하고 환자의 건강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의료생협은 구조상 불법 사무장병원으로 둔갑하기 쉽다. 지난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오제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적발된 불법사무장 병원 599개 중 218개(35%)가 의료생협 산하 병원이었다.
짝퉁 의료생협병원, 사무장병원은 개설 목적이 이익 추구에 있기 때문에 성형외과·피부과·한의원 등 수익성이 높은 진료과 병원을 개소해 과잉진료, 편법진료, 불법 환자유인 행위를 일삼는다. 당연히 조합원의 건강 증진은 뒷전이거나 안중에도 없고, 조합원의 자발적인 활동이나 환자중심서비스는 이뤄지지 않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요양급여 비용을 최대한 많이 타내기 위해 간호사나 직원 숫자를 늘리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일반인을 의료인으로 둔갑시킨다. 심지어 무자격자 불법시술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한다. 의료생협임을 알리는 간판이나 표시는 찾아보기 힘들고, 조합원 가입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지도 않는다.
한 의료생협 관계자는 “의료생협의 탈을 쓴 불법 사무장병원들로 인해 묵묵히 ‘착한 진료’를 해오던 정상적인 의료생협까지 피해를 보고 있다”며 “의사단체들이 회원에게 의료생협에서 근무하지 말라는 권고까지 내리는 바람에 의료진을 구하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건당국이 의료생협을 가장한 사무장병원에 대한 전수조사와 관리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효과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오제세 의원은 “의료생협으로 가장한 사무장병원은 일단 개설되면 적발하기가 쉽지 않고, 적발하더라도 부당이득금 징수율이 낮은 편이라 정부가 나서 개설 단계에서부터 원천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