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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건강
스펙 안보는 ‘블라인드 채용’, 의료계 망설이는 이유
  • 박정환 기자
  • 등록 2017-09-21 14:59:20
  • 수정 2020-09-13 15:5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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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벌주의 타파, 채용 투명성 향상 기대 … 환자안전 우려, 역차별 논란도
블라인드 채용시 면접위원들이 스피치학원 등에서 충분히 트레이닝을 받고 온 면접 응시자를 아무 정보없이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나이·사진·출신지역·학교·전공·학점·가족관계·신체조건·토익점수 관련 정보없이 면접을 통해 구직자의 실무능력을 평가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확산되는 가운데 보수적인 의료계에서도 채용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고려대의료원을 필두로 동국대 일산병원, 원자력의학원 등이 올 상반기부터 간호사 모집에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했으며 추후 시행기관과 채용 직군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의료계에선 블라인드 채용이 내부적으로 만연한 학벌주의를 타파하고 간호사 인력난 등을 해소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직무 특성을 고려할 때 전면적인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블라인드 채용의 혜택을 가장 먼저 받는 분야는 간호사 직군이다. 올 상반기 국내 병원 최초로 블라인드 채용시스템을 도입한 고려대의료원은 간호사 직군 면접시 실질적인 업무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각 병원 인사담당자는 물론 간호부장 및 간호팀장을 면접위원으로 배치했다. 피면접자의 조별 인원을 축소하는 동시에 면접시간을 두 배로 늘려 실제 심도 깊은 면접을 진행했다. 향후 간호사 외 모든 직군에 블라인드 채용시스템을 적용할 계획이다.

제약업계에선 동아쏘시오홀딩스가 최초로 블라인드 채용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회사는 1959년 공채 1기때부터 50년 이상 지속해 오던 입사지원서 양식을 전면 수정했다. 기존 입사지원서에는 사진, 학력, 출신지역, 가족관계 등을 모두 기재했지만 바뀐 지원서엔 ‘이름, 연락처, 자격·경력사항, 직무관련 교육 이수사항, 지원 분야 역량, 가치관’ 등만 기재하면 된다.

블라인드 채용을 바라보는 의료계의 목소리는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원자력의학원 관계자는 “그동안 대학병원은 자기 학교 출신 보건·간호·의과대 출신 지원자를 채용에서 우대하는 경향이 강했다”며 “고도의 전문성과 직무능력이 필요한 의료계에서 학력이 가장 중요한 변수로 인식된 게 사실이지만 꼭 좋은 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실무능력이 우수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또다른 의료계 관계자는 “간호인력이 부족하다는 말이 많은데 지방만 그럴 뿐 서울 대형병원은 여전히 채용 경쟁이 치열하다”며 “블라인드 채용이 자리잡으면 그동안 불이익을 봤던 지방대 출신의 우수한 간호인력들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서울권 출신이든 지방 출신이든 간호사 국가고시를 통해 실력을 검증받았기 때문에 학력으로 실력을 운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서류전형에서 개인정보 노출을 최소화하면 간호사 채용의 투명성을 높일 것일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동안 1~2년에 한번 꼴로 대학병원들의 간호사 채용 과정에서 특혜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가장 최근엔 국립중앙의료원의 편법적인 간호사 채용 내막이 드러났다. 지난달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2017년 국립중앙의료원 종합감사 결과’에 따르면 이 병원은 지난해 7~11월 간호직 6급 144명(졸업예정자 84명, 면허소지자 60명)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출신학교별로 성적 기준을 달리 적용해 지방 출신 응시자에게 불이익을 줬다. 예컨대 서울 지역 4년제 교육기관은 성적순 70% 이내, 광역시 및 경기도를 제외한 지방도시는 성적순 10%를 합격 기준으로 삼았다. 여기에 나이가 어린 순으로 우선 채용하다보니 애초에 기준에 부합한 성적을 제출한 100명이 떨어지고, 나이가 어린 성적 미달자 73명이 서류전형을 통과해 18명이 최종 합격했다. 

서류전형 때부터 나이나 출신 학교 등을 기재하지 않으면 이같은 채용 비리·특혜 문제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는 게 블라인드 채용을 지지하는 측의 논리다.

하지만 일반 행정직이면 몰라도 환자 안전과 직결된 간호사나 의료기사 직군까지 블라인드 채용을 확대하는 것은 안전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K대학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블라인드 채용의 취지에 충분히 공감하고 필요성도 느낀다”며 “다만 작은 실수가 환자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병원 업무 특성상 간호사를 포함한 의료 직군은 채용시 대상자가 어디서 어떤 공부를 했고, 무슨 경험을 쌓았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대학병원 관계자는 “학벌이나 스펙이 실제 직무능력이나 인성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찬가지로 스피치학원 등에서 충분히 트레이닝을 받고 온 면접 응시자를 면접위원들이 아무 정보없이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라며 “사진, 가족관계, 출신 지역 등 항목은 없어도 되겠지만 기업이나 병원이 채용 대상자를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나 안전장치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의료 업무 특성상 출신 학교 등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나왔다. 과거 기업 인사팀에서 신입사원 채용을 담당했던 대학병원 관계자는 “의료, 제약, 바이오 분야는 다른 전공과보다 교수진의 실력이나 연구시설 등 인프라 측면에서 학교별 편차가 큰 게 사실”이라며 “출신 학교나 경력 등 개인정보를 면밀히 파악하지 않으면 직무에 적합한 인재를 선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보가 차단된 블라인드 채용이 오히려 부정한 청탁이나 압력에 의한 채용 비리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역차별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간호사 구직자들 사이에선 블라인드 채용이 역차별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권 대학교 간호학과에 재학 중인 윤모 씨는 “어릴 때부터 꿈꿨던 간호사가 되려고 악착같이 공부해 내로라하는 대학교의 간호학과에 입학했고, 재학 중에도 높은 학점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며 “그런데 이제와서 다른 경쟁자들과 원점에서부터 똑같이 경쟁하라니 허탈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구직자는 “블라인드 채용으로 기업이 다양한 인재상을 요구해 취업 준비가 더 까다로워진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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