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중국요리 대가인 이연복 셰프가 20대 때 축농증수술을 받은 뒤 부작용으로 후각을 상실했다고 밝혀 많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음식 맛을 느낄 때 후각이 차지하는 비율이 90%, 미각은 10%에 불과한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대가로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피땀을 흘렸을지 일반인은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다.
대부분 시력이 나빠지거나,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증상엔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면 후각이 감소하는 것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보통 나이가 들면 후각기능이 떨어져 약한 냄새는 맡기 힘들어진다. 만약 축농증 등으로 코가 막히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후각기능을 상실했다면 병원을 찾아 원인 질환을 파악해보는 게 중요하다.
냄새는 특정 물질의 분자가 코 윗부분 비강상부(鼻腔上部)에 있는 후각 신경세포를 자극해 생기는 화학적 감각이다. 뇌는 각 냄새들을 기억해뒀다가 차후 비슷한 냄새가 나면 기억을 되살려 구분한다. 인간의 후각수용체의 수는 약 1000여개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인지하고 기억할 수 있는 냄새는 약 2000~4000에 달한다. 적은 후각수용체의 수로 어떻게 많은 냄새를 식별하는지에 대한 생리적 기초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냄새는 뇌의 무의식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다. 2008년 독일에서 발표된 한 연구결과 잠들기 전 장미향을 맡은 사람들은 달콤하고 좋은 꿈을 꿨지만, 썩은 달걀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악몽을 꾸는 경향이 짙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여자의 후각이 더 정확하며,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을수록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축농증 등 부비동질환처럼 자극물질이 후각신경의 통로를 막는 전도성 후각이상은 치료받으면 증상이 금방 회복된다. 하지만 퇴행성질환 등으로 후각신경 자체가 손상된 감각신경성 후각이상은 후각이 영구적으로 손실되는 경우가 많다. 후각신경에 문제가 생겨 일어난 후각장애는 현재 정립된 치료법이 없는 상태다.
후각이상은 단순히 냄새를 못맡는 것에 국한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냄새를 맡는 ‘환취증’ △과거 맡았던 냄새를 다르게 인지하는 ‘착후각’ △냄새를 제대로 못 맡는 ‘후각감퇴’ △후각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후각소실’ 등으로 구분된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으로는 축농증(만성부비동염), 감기, 알레르기성비염, 머리외상, 당뇨병, 선천성, 호르몬이상,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뇌종양, 약물, 벤젠·페인트용매제 등 산업성 유해물질 등이 꼽힌다.
축농증이나 비염 등 호흡기 및 폐쇄성 부비동질환은 후각상실 원인의 약 30%를 차지한다. 증상을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어 비교적 진단이 빠르고 약물치료나 수술을 받으면 금방 후각이 돌아온다. 단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 부비동·호흡기질환은 급성기가 지난 뒤에도 바이러스가 계속 후각신경을 침범해 후각이 영구적으로 손상될 수 있다.
퇴행성질환은 증상이 서서히 나타나 빠른 진단이 어렵고 후각기능을 되돌리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60대 이상에서 갑자기 후각기능이 떨어지면 알츠하이머병 등 퇴행성뇌질환을 의심해볼 수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 정신신경과 전문의인 크리스틴 야페 박사팀이 70~79세 노인 2428명을 대상으로 후각기능을 검사하고 약 12년을 지켜본 결과 성적이 나쁜 노인은 9년 안에 치매가 발생할 위험이 성적이 양호한 노인보다 2~3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알츠하이머로 발생한 후각능력 쇠퇴 증상은 기억력을 상실하기 수십년 전부터 감지된다.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후각망울(olfactory bulb)과 후각로(olfactory tract) 신경이 손상돼 냄새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약 10년이 지난 뒤 기억상실 증상이 나타난다.
같은 퇴행성 뇌질환인 파킨슨병도 후각상실을 초래한다. 보통 파킨슨병 환자 10명 중 9명은 후각이상을 동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킨슨병은 뇌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생성되는 단백질이 후각을 관장하는 전두엽을 손상시킨다. 발병 시점보다 최소 4년 전부터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나므로 후각장애 여부로 파킨슨병 발병 가능성을 보조적으로 진단할 수 있다.
김희태 대한파킨슨병및이상운동질환학회 회장(한양대 의대 교수)은 “파킨슨병 증세가 나타난 뒤 병원을 찾기까지 평균 9.4개월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파킨슨병은 가계의 경제를 책임지는 40~50대의 발병률이 치매 대비 약 9배 높을 뿐 아니라 인지장애, 신체장애, 후각상실 등 복합적인 문제가 발생해 환자는 물론 가계의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도 후각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후각신경의 상당 부분은 전두골 바닥을 지나간다. 외상으로 두개골이 충격을 받아 전두골과 후각신경이 손상되면 후각장애가 나타나고 이런 경우 치료가 어렵다.
산업성 유해물질, 담배연기, 정신적 스트레스도 원인이 된다. 전체 후각장애의 약 20%는 아직 정확한 발생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후각은 고혈압과도 연관된다. 맛을 좌우하는 요인의 90%는 후각에 달려 있다. 즉 후각기능이 상실된 상태에선 맛을 제대로 못 느껴 짜고 자극적인 음식을 자주 섭취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혈압이 상승할 수 있다. 또 평소 짜게 먹는 습관이 지속되면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지면서 후각기능이 조금씩 손상되기도 한다.
만성 당뇨병 환자는 신경과 혈관이 손상되기 쉬운데 후각신경이 파괴될 경우 냄새를 잘 못 맡게 된다. 후각이 떨어지면 음식의 향과 맛을 충분히 느끼지 못해 많이 먹어도 만족하지 않게 된다.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음식 섭취량이 늘어 과체중 혹은 비만으로 이어지고 당뇨병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
후각능력 감퇴가 조기사망과 연관된다는 보고도 있다. ‘미국공공과학도서관저널(플로스원, PLOS One)’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냄새를 맡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노인은 향후 몇 년 이내에 사망할 위험률이 높아진다. 후각이 둔한 사람은 비사회적이며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후각장애 진단은 환자 병력, 진찰, 후각기관 내시경검사, 기능 측정,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후각점막 조직검사 등으로 이뤄진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후각기능 검사는 냄새를 맡는 능력을 검사하는 ‘후각역치검사’와 냄새 종류를 구별해내는 ‘후각인지검사’로 구분된다. 검사 후 코 안에 이상이 있는 전도성 후각이상으로 밝혀지면 항생제, 내시경수술, 레이저수술 등을 실시한다.
김 교수는 “자주 감기에 걸리거나 오염된 공기에 노출되면 코 상피조직과 후각신경이 파괴되고 손상 정도가 심해질 수 있다”며 “감기나 비염 등 부비동·호흡기질환 자주 걸리는 사람은 노년이 된 뒤 냄새를 잘못 맡을 확률이 높아 평소 관리에 신경써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