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권모 씨(42·여)씨는 최근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제품 뒷면 성분 표시를 꼼꼼이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일부 치약에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함유됐다는 뉴스를 보고 생활화학 제품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천연원료를 사용한 제품만 사용하기엔 비용 부담이 커 얼마전부터는 인터넷으로 베이킹파우더와 구연산 등을 활용해 세척제나 치약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올해 ‘옥시사태’로 대한민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화장품, 마스크팩, 세면용품, 탈취제, 물티슈, 치약 등 생활용품에도 함유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유례없던 ‘케미포비아(Chemophobia)’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천연재료를 활용해 세제나 치약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노(no)케미’족의 수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케미포비아는 화학을 뜻하는 ‘chemical’과 공포증의 ‘phobia’를 합친 말이다. 화학성분에 대한 공포감은 화학 성분이 들어간 생활용품 전반의 매출 감소로 이어졌다. 최근 지난 3개월간 이마트의 제습제와 탈취제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43%와 38% 급감했다.
생활용품뿐 아니라 화장품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국내외 6만여개 화장품에 대한 유해도 등급을 매기는 스마트폰 앱인 버드뷰의 ‘화해(화장품을 해석하다)’는 최근 다운로드 수 220만건을 돌파했다.
케미포비아 확산의 주범은 화학원료 C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와 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다. 최근 논란이 된 아모레퍼시픽 치약 11종에도 이들 성분이 함유된 것으로 나타났다.
CMIT·MIT는 국내 공산품에 광범위한 용도로 함유된 물질이다. 가습기살균제에도 쓰였고 샴푸·린스 같은 씻어내는 화장품류, 가글액 등 의약외품에도 사용된다.
이 물질이 많이 쓰이는 이유는 보존 및 살균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화장품은 오래 두고 쓰면 곰팡이가 생길 수 있어 이를 억제하는 보존제가 필요하다. 가습기살균제에선 살균 용도로도 쓰인다. 일반적으로 보존제보다는 살균 용도로 쓰일 때 더 많은 용량이 함유된다.
CMIT·MIT가 유해물질이라는 점에선 이견이 없다. 옥시제품 피해자의 폐 손상은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계열의 영향이 컸지만 CMIT·MIT 계열 화학물질도 흡입 시 폐 섬유화 등을 일으킬 수 있다. 정부도 CMIT·MIT가 폐에 손상을 일으킬 수 있어 유독물질로 지정했다.
이 물질의 유해성은 어디로 흡입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스프레이 제품 등을 통해 공기 중에 분사된 CMIT·MIT기 코로 흡입되면 폐 손상, 피부에 닿으면 부기나 염증 등 과민성 알레르기 반응을 초래할 수 있다. 반대로 입으로 삼킬 경우 많은 약을 흡입하면 위험하지만 기준치 이하에선 부작용이 거의 없다.
생활용품 회사 관계자는 “치약처럼 CMIT·MIT를 입 안을 헹구는 용도로만 사용할 경우 유해성이 적다”며 “현재 미국·유럽 등 전세계에서 CMIT·MIT를 치약 보존제로 사용하지만 한국에선 벤조산나트륨·파라옥시벤조산메틸·파라옥시벤조산프로필 등 3종만 허용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회수된 치약에 포함된 CMIT·MIT 성분은 0.0044ppm정도로 유럽의 사용 기준(15ppm)의 3409분의 1 수준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아무리 치약 제품이더라도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임종한 교수는 “치약이 섭취를 하는 제품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를 닦는 과정에서 모르는 사이에 삼킬 수 있고 특히 어린 아이는 이런 위험이 높아 안전하다고 단언하기 어렵다”며 “CMIT와 MIT를 구강으로 섭취하면 이 물질들이 흡수되면서 폐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케미포비아가 확산되면서 밀가루·식초·베이킹소다 등을 이용해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어 쓰는 ‘노케미족’이 늘고 있다. 온라인쇼핑몰 11번가의 식초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두 배 이상 뛰었고, G마켓의 천연세제 판매도 약 두 배 늘었다. 지난 6월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가 개설한 천연비누와 세제 등 친환경 제품 만들기 강좌에는 전체 모집 정원의 세 배인 900명이 몰렸다.
밀가루는 과일을 헹굴 때, 식초와 베이킹소다는 때가 낀 욕실이나 주방 등을 청소할 때 쓰인다. 특히 베이킹소다는 화학 생활용품을 대체할 재료로 활용도가 가장 높다. 베이킹소다는 이탄산나트륨 또는 탄산수소나트륨(분자식 NaHCO3)으로 불린다. 시중에 판매되는 베이킹소다의 성분표에 100% 탄산수소나트륨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베이킹소다도 엄밀히 따지면 화학물질이지만 인체에 독성이 없어 식품첨가물이나 의약품에 쓰인다. 일반 가정에서는 화학제품으로 잘 제거되지 않는 욕실·싱크대의 찌든 때와 냉장고·신발장 냄새를 제거할 때 사용하면 효과적이다. 과일을 씻을 때 사용하면 껍질에 묻은 잔류농약을 40% 가까이 제거할 수 있다.
샴푸·린스 대신 베이킹소다와 식초를 이용해 머리를 감는 방법도 있다. 베이킹소다로 먼저 두피를 씻은 뒤 린스를 한 두 방울 떨어뜨린 물로 헹궈 내면 머리카락이 부드러워지는 효과가 있다. 처음에는 샴푸를 쓰지 않는 게 찝찝할 수 있지만 모근이 건강해지고 머리결이 좋아진다. 단 사람에 따라 오히려 모공에 피지가 축적되는 경우도 있어 자신의 두피 상태에 맞춰 시행해보는 게 좋다.
구연산은 오렌지·레몬·라임 등의 신 과일에 많이 들어있는 천연 성분이다. 구연산 가루를 물에 타 구연산수를 만든 뒤 분무기에 넣어두면 청소 시 사용하기 편하다. 세균이 많이 번식하는 화장실, 세탁기 배수구, 아이들 장난감에 뿌려준 뒤 닦으면 살균 효과가 우수하다. 간혹 산성을 띤 구연산과 염기성을 띤 베이킹소다를 섞어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면 두 성분이 중화돼 효과가 사라진다.
전문가들은 ‘케미포비아’ 현상이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임 교수는 “가습기살균제 사건으로 소비자는 ‘대형마트에서 파는 거니까 당연히 안심해도 된다’는 막연한 생각을 버리게 됐다”며 “이런 현상이 최소 1~2년은 더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케미포비아 현상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써온 비누와 치약과 같은 생활용품들이 생활에 가져다준 기능과 편리를 무시할 순 없다는 설명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환경부와 식약처가 전수조사에 나서 문제 제품을 퇴출시키기로 한 만큼 결과를 지켜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제품을 선택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