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약 사실 모르쇠, 단순 실수라며 지급 거부 … 보험금 지급 대법원 판결 나오자 소멸시효 카드로 대응
자영업자 윤모 씨는 2006년 6월 재해사망 특약이 포함된 ‘삼성리빙케어종신보험’에 가입했다. 당시 특약은 가입일로부터 2년이 경과한 뒤 자살할 경우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보험가입 후 2년 7개월이 2009년 1월 윤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특약 내용과 달리 유가족인 김 씨(배우자)에게 일반사망보험금 4900만원만 지급했다.
재해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김 씨는 2014년 보험사가 재해사망 보험금 5000만원을 추가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의 민원을 금융감독원에 제기했다. 하지만 삼성생명 측은 사망 후 소멸시효 2년이 지났기 때문에 김 씨에게 더이상 보험금을 지급할 이유가 없다며 지급을 거절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지난 29일 “소멸시효 2년이 지난 건은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며 보험사의 손을 들어줬다.
원칙적으로 자살은 보험금 지급 대상이 아니다. 현행 상법 659조는 ‘계약자 또는 피보험자나 수익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발생한 건의 경우 보험회사는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이 없다’는 면책 규정을 담고 있다. 자살에 대해 보험금 지급을 허용할 경우 자살이나 보험사기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보험사 면책기간 2년이 지난 뒤 가입자가 자살한 경우에 한해 일반 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 자살 이후 남겨진 유가족의 생계를 보장하는 게 보험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취지에서다.
가입자가 사망할 경우 지급되는 보험금은 ‘일반 사망보험금’과 ‘재해 사망보험금’ 두 종류가 있다. 일반 사망보험금은 질병 및 재해(상해)로 인한 사망, 자연사, 변사, 가입 2년 후 자살 등을 모두 포함하며 사망진단서 등을 통해 사망한 사실만 입증하면 지급된다.
문제가 되는 건 재해사망 보상금이다. 재해사망 보험금(보상금)은 천재지변이나 교통사고 등 우발적인 사고로 가입자가 사망할 경우 지급하는 것으로 일반사망 보험금보다 액수가 2~3배 많다. 자살은 재해로 인정되지 않아 재해사망보험금은 지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2000년 일부 보험사들이 자살도 경우에 따라 재해사망 보험금 지급이 가능하다는 특약을 추가해 보험상품을 팔면서 ‘자살보험금’ 논란이 불거졌다. 재해사망특약 계약 상품은 2002년 ING생명이 첫 출시했다. 이후 경쟁사도 같은 상품을 앞다퉈 출시했고 2009년까지 전체 보험사에서 280만건의 계약이 체결됐다.
당시 약관에는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지만 피보험자가 정신질환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와 계약 책임 개시일부터 2년이 지난 뒤 자살하거나 자신을 해쳐 장해등급분류표 중 제1급의 장해상태가 됐을 땐 그러하지 아니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즉 원래 재해사망 보험금은 우발적인 사고로 사망했을 때에만 지급하는 것인데, 해당 약관은 보험 가입 후 2년이 지나면 자살해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가입자 외 유가족들은 이런 특약 내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보험사들도 약관을 알리지 않고 숨겼다. 정작 자살자가 발생하자 생보사들은 “일본의 보험 약관을 들여오면서 실수로 약관을 잘못 표기한 것”이라며 “자살은 원칙적으로 재해가 아니므로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며 일반 사망보험금만 지급했다. 유가족에게 지급되지 않은 자살로 인한 재해사망보험금은 계속 누적돼 2015년 기준 2465억원(총 2980건)에 달한다.
현재 이 약관은 사라졌다. 보험사들이 자살보험금 논란을 피하기 위해 2010년 1월 ‘계약의 보장 개시일부터 2년이 경과된 뒤 자살할 경우 재해 이외의 원인에 해당하는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으로 약관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즉 가입자가 사망할 경우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하고 재해사망보험금은 지급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자살보험금 지급 논쟁은 지난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약관을 잘못 만든 것은 보험사들의 귀책 사유”라며 “보험사들은 약관대로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해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보험회사들은 소멸시효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현행법상 보험금 청구 소멸시효는 2년(2015년 3월부터 3년)인데 시효가 지난 뒤 지급 신청을 한 경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소멸시효가 지난 계약은 전체 미지급 건수 2980건 중 2314건(78%), 금액으로는 2465억원 중 2003억원(81%)에 달했다. 보험사별로는 ING생명(815억원), 삼성생명(607억원), 교보생명(265억원), 알리안츠생명(137억원) 순으로 미지급 보험금이 많다.
이에 대해 금감원은 보험사들이 자살보험금을 주지 않고 시간을 끌어 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보험금 지급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유가족들이 소멸시효 2년 내에 재해사망 보험금을 청구해도 생보사들이 줄 수 없다고 버티는 과정에서 시효가 지나버린 사례가 많았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부분의 보험금 미지급 사건이 이런 방식으로 시효가 지난 것”이라며 “생보사들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지난 29일 보험사들의 재해사망 보험금 지급 의무는 인정하면서도 소멸시효가 지난 건은 지급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 사실상 보험사의 손을 들어주면서 자살보험금 논란은 재차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법부와 금융당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자살자 유가족들의 상처만 커지고 있다. 금융소비자연맹 관계자는 “금감원과 보험사는 2005년경부터 자살보험금 문제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며 “최근 국회에서 소멸시효가 완성된 자살보험금 지급을 위해 청구기간 특례를 적용하는 ‘재해사망보험금 청구기간 연장에 관한 특별법안’이 발의됐지만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보험사들은 자살보험금 지급을 허용할 경우 사회적 문제인 자살을 방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생명보험 가입자 사망 원인의 4% 가량이 자살로 추정되고 특히 젊은층일수록 자살 비율이 높다”며 “자살을 재해로 인정하면 더 많은 보험금을 받게 되는 셈이라 자살을 부추기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