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서모 씨(31)는 퇴근 후 TV프로그램에서 방송되는 먹방을 보며 야식을 즐기는 게 유일한 취미다. 어중간한 퇴근시간 탓에 저녁을 제 때 챙겨먹을 수 없어 자연스럽게 한밤 중이 되서야 음식에 손이 간다. 야식에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TV에서 방송되는 맛집을 스마트폰에 기록하는 것도 재미 중 하나다.
스타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먹방’과 유명 쉐프들이 요리쇼를 선보이는 ‘쿡방’이 열대야 및 올림픽과 맞물리며 더욱 인기를 얻고 있다. 누구든 퇴근 후 이런 방송을 보다보면 더위 탓에 없어졌던 식욕도 생긴다. SBS ‘백종원의 3대 천왕’, JTBC ‘냉장고를 부탁해’, tvN ‘수요미식회’ 등 정규방송 및 케이블·종편에선 20~30개의 먹방·쿡방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아프리카 등 인터넷 개인방송에서도 먹방이 인기 콘텐츠로 사랑받는다. 인기 BJ(Broadcasting Jockey)들은 3~4인분은 족히 될 음식들을 혼자 야무지게 먹으며 시청자들과의 대화를 이끌어나간다.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거나 소리를 들었을 때 식욕이 당기는 것은 당연하다. 기억 속에 저장된 ‘먹고 싶다’는 정보가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공복일수록 이런 자극은 심해진다.
하지만 늦은 시간 식욕이 생겨 야식을 먹는 습관이 반복될 경우 비만, 위장장애, 성인병 등 각종 건강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먹방이 꼭 요즘에만 인기를 누린 것은 아니다. 이미 1984년 영국의 언론인 로잘린 카워드(Rosalind Coward)는 저서 ‘여성의 욕망’(Female Desire)을 통해 맛보다는 색감과 분위기 연출 등 시각적인 부분에 치중하는 것을 ‘푸드 포르노’(Food Porno)라며 비꼬았다.
야식증후군(야간식이증후군, Night eating syndrome)은 저녁 7시 이후 식사량이 하루 전체 식사량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수화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낮에는 입맛이 없어 굶거나 간식으로 때우다가 잠자기 전이나 한밤 중에 자다 일어나서 음식물을 먹는 경우가 많다”며 “원인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스트레스에 대한 비정상적인 반응이 주원인으로 꼽힌다”고 설명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부신에서 스트레스호르몬인 ‘코티솔’의 분비가 증가한다. 이 호르몬의 역할 중 하나가 스트레스 요인에 반응해 신체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식욕이 증가한다. 자신도 모르게 음식에 손이 가게 되고 특히 달콤하거나 짭짤한 음식을 먹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우울증, 불안, 신체 이미지에 대한 왜곡된 인식 등은 이런 증상을 유발 및 촉진하는 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석훈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야간식이증후군은 비만, 혈압상승, 당뇨병 등 건강문제와 직결되는 데다 우울증이나 물질남용 같은 문제가 원인인 경우도 흔하므로 근본 원인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잦은 야식은 비만의 주원인이다. 낮에는 교감신경이 주도적으로 작용해 에너지를 소비하는 방향으로 대사가 이뤄진다. 반면 밤에 부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면서 체내 영양소를 지방으로 축적해 다른 시간대에 음식을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살이 찌기 쉽다. 칼로리가 높은 야식 특성상 비만 위험은 더욱 높다. 야식 인기메뉴인 양념치킨 한 마리의 칼로리는 1300㎉, 족발 소(小)자는 768㎉, 피자 한 조각은 382㎉에 달한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이 지난해 국제학술지 '두뇌와인지저널'에 게재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먹방은 비만 유발제 역할을 한다. 사람들에게 먹방 영상을 보여준 뒤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분석한 결과 탐욕 중추가 자극돼 식탐으로 이어졌다.
야식증후군은 다양한 소화기질환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신진대사가 활발하지 않은 밤 시간대에는 위산 분비액이 줄어 음식물을 섭취할 경우 위가 부담을 느끼고 소화불량이 일어나기 쉽다”며 “주로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가 많아 위에 염증이 생기는 위염을 초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위염은 위점막층이 손상돼 염증이 생겨 위산이 닿으면 아프거나 쓰린 증상이 발생하는 질환이다. 심할 경우 위의 두번째 층인 점막하층까지 손상되는 위궤양으로 악화될 수 있다. 또 야식을 먹고 바로 누우면 위와 식도의 괄약근이 열리면서 위안의 음식물이 식도로 역류해 가슴이 쓰리는 역류성식도염의 발병위험이 높아지고, 복부에 노폐물이 정체된 상태가 지속돼 간의 기능이 떨어진다. 이럴 경우 여드름이 많이 생겨 피부건강을 해치고 식이장애와 수면부족까지 이어진다.
늦은 식사는 부종에도 영향을 끼친다. 야식을 먹고 난 다음날에는 얼굴, 팔, 다리가 퉁퉁 붓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않아 생기는 일종의 혈액순환장애로 방치할 경우 살이 되기도 한다. 전신부종은 심장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신이 △담배를 많이 피고 하루 평균 소주 3잔 이상 마신다 △평소 밥보다 인스턴트 및 패스트푸드 음식이 당긴다 △새벽 1시 이전에 잠들기가 어렵다 어렵고 잠자는 시간이 일정치 않다 △잠자는 도중 허기를 느껴 일어난 적이 많다 △아침을 잘 거르고 점심에도 식욕이 없는 편이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하면 폭식한다 △체중 변화가 심하거나 배가 많이 나왔다 중 3~5개에 해당된다면 야식증후군을 의심해볼 수 있다.
이 질환은 심각한 경우가 아니라면 스스로 예방하고 조절할 수 있다. 잠들기 힘든 밤엔 습관적으로 야식을 즐기기보다는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게 좋다. 저녁식사 시간을 오후 7시에서 8시 정도로 늦추는 것도 야식을 피하는 방법이다. 밤에 늦게 자야 할 경우 점심과 저녁 사이에 간식을 먹어 저녁 식사를 적당히 뒤로 미루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도 식욕을 참기 힘들 땐 물이나 우유 한 잔, 오이, 당근 등을 먹으면 포만감이 들면서 폭식을 피할 수 있다. 과일을 밤참으로 먹는다면 당분이 적은 토마토 등이 좋다.
병원에서 실시하는 치료법으로는 배고픔과 상관없이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양의 음식을 먹는 강제식사법과 야간에 음식 섭취를 제한하는 행동치료를 실시한다. 스트레스나 우울감에 대한 정신과적 치료로 항우울제, 식욕억제제, 항경련제 등을 처방하는 약물요법과 상담 및 인지치료 등 심리요법을 병행하기도 한다.
이수화 교수는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에게 혼자 또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가볍게 즐기는 야식은 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지만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며 “위염 등 소화기계 증상이 심하다면 야식의 근본 원인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하루 세끼 규칙적으로 식사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