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교육열은 대단히 높아 자녀의 학습능력이나 지식이 또래 아이보다 뒤쳐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명문대 진학율이 높은 서울 강남권과 목동, 경기도 분당·일산 등에 위치한 유명학원의 경우 수업 종료 시간대가 되면 학원차량과 자녀를 픽업하러 온 부모들의 차가 뒤엉키며 일대 교통이 마비될 정도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12월 전국 초·중·고 학생 1만35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7.5%가 초등학교 때 고교 영어·수학 과정을 선행학습한 것으로 조사됐으며, 중학교 과정을 선행학습한 비율은 22.1%에 달했다.
선행학습 열풍은 한국사회의 ‘빨리빨리’ 문화와 끝모를 교육열이 적절히 배합돼 만들어진 시대의 자화상이다. 교육열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치동 ‘대치맘’들 사이에서는 ‘유유익선(幼幼益善)의 법칙’이 불문율로 통한다. 자녀가 선행학습을 시작하는 시기는 ‘어리면 어릴수록 좋다’는 의미다.
이 지역에선 유아 때부터 영어 선행학습을 시키는 게 기본이다. 대입 및 취업 전쟁에서 외국에서 살다 온 ‘리터니(Ruturnee)’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학습을 시작해야 한다는 논리다.
수학도 영어 못지 않게 선행학습이 판을 치는 과목이다. 2018년부터 수능 영어시험이 절대평가제로 바뀌면서 수학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학원가에서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교육열이 높은 학부모들은 늦어도 중학교 1학년 전까지 미적분을 끝내야 남은 기간에 심화문제를 풀며 수능에 대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굳게 가진다. 부모들의 이런 믿음에 부응해 학원들의 특목고·자사고·의대 진학 대비 프로그램은 수학 진도를 평균 3~5년 앞서 나간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2014년 2월 국회를 통과한 선행학습금지법(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 특별법) 제정안이 2년 만에 선행학습을 부분 허용하는 쪽으로 개정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졸속 입법 논란도 일고 있다. 국회 통과 시 ‘선행학습 금지’라는 본연의 입법 취지가 퇴색하면서 사실상 ‘누더기 법안’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자녀의 두뇌발달 과정과 학습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선행학습은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서유헌 소장은 “두뇌와 교육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은 뇌 건강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뤄져 왔다”며 “아이의 창조성이나 인성의 발달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보다 ‘일찍’, ‘많이’ 학습시켜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인지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고 우려했다.
뇌는 성인이 돼야 기본 구조와 신경세포 사이의 회로가 완성된다. 이 때문에 성장 중인 아이는 뇌신경세포가 엉성하고 가늘다. 이런 상태에서 조기교육이나 선행학습을 과도하게 시키는 경우 뇌에서 일종의 과부화가 일어나 과잉학습장애증후군, 우울증, 애착장애, 각종 정신질환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전선이 엉성하거나 가늘게 연결된 상태에서 전류가 과도하게 흐르면 불이 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선행학습은 단순한 지식전달과 암기를 통한 문제풀이만 하기 때문에 스스로 공부하는 힘을 오히려 떨어뜨린다. 학원에서 과도한 과제를 받으면 아이들은 불안감을 느끼고 높은 난이도 문제를 풀지 못해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과 불만이 커지면서 성격장애나 돌발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선행학습의 또다른 문제는 학생이 학습내용을 알고 있다는 우월감에 빠져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열린사회참교육학모회는 최근 발간한 ‘왜 선행학습을 금지해야 할까’에서 “지나친 주입식 선행학습은 한창 호기심이 많을 아이의 지적능력과 창의성을 떨어뜨리게 된다”며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해 수업의 흐름을 깨거나 아예 수업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행학습의 폐해는 언어영역보다는 수리영역에서,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 교과목에서 더 심하게 나타난다. 에듀플렉스에듀케이션 관계자는 “선행학습으로 공부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면 장거리 마라톤과 같은 고교 교과과정을 따라갈 수 없게 된다”며 “특히 수학은 학년이 높아질수록 이해를 많이 해야 하는 과목이기 때문에 단순 암기에 길들여진 경우 성적이 떨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만족이 없는 강제적인 선행교육은 인지기능·언어능력·수리능력 등을 담당하는 좌뇌를 혹사시킨다. 반면 감정과 본능, 창의성을 관장하는 우뇌의 활동은 억제된다. 이 때문에 선행학습에 지친 일부 청소년은 우뇌활동이 억제된 나머지 폭력, 인터넷중독, 본드 흡입 등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감정적인 충족감을 느끼려 한다.
전문가들은 무리한 선행학습보다는 꾸준한 복습이 성적을 향상시키는 비법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해 4월 서울대 학생 1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84%가 ‘복습을 철저히 했다’고 응답했다. 이들은 ‘복습을 해야 배운 것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자녀의 학습 성과가 부진할 경우 한 학기 이상의 선행학습은 피하는 게 좋다. ‘뒤의 어려운 것을 공부하다보면 실력이 늘어서 지금 하는 내용은 자연히 쉬워질 것’이라는 바람과는 달리 현재 학습내용이 능숙치 않은 상태로는 뒤의 내용이 소화되지 않고 시간과 노력만 낭비하게 된다. 이런 학생의 경우 반대로 1년 전 배운 부분을 철저하게 복습을 했더니 갑자기 성적이 폭발적으로 올랐다는 사례가 많이 보고되고 있다. 서 원장은 “우리 교육의 70% 이상은 암기 위주이기 때문에 주로 좌뇌의 기능만 발달시킨다”며 “이같은 반뇌(半腦)교육보다는 좌·우뇌를 균형적으로 발달시키는 전뇌(全腦)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