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MERS)가 사실상 종식되면서 메르스 환자에게 사용한 의료폐기물 처리 방안에 관심이 모아지는 가운데 전국 국립대병원 10곳 중 6곳의 의료폐기물 이동거리가 100㎞가 넘는 것으로 드러나 안전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서울대병원과 제주대병원 등 두 곳은 의료폐기물 이동거리가 무려 300㎞가 넘었다.
박주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분석한 ‘2010~2015년 국립대학교병원 의료폐기물 현황’에 따르면, 국립대학병원(분원 및 치과병원 포함) 16곳의 의료폐기물 총 이동거리는 6480㎞으로 병원별 폐기물 이동거리는 서울대병원, 제주대병원, 경상대병원, 강릉원주대치과병원, 강원대병원 등 순으로 길었다.
서울대병원과 제주대병원의 올해 기준 의료폐기물 이동거리는 각각 350㎞와 308㎞를 기록했다. 이들 병원은 300㎞가 넘는 거리임에도 5년간 오로지 한 업체와의 계약을 통해 의료폐기물을 처리해왔다. 반면 전북대병원의 5년간 의료폐기물 이동거리는 매년 3㎞를 유지해 서울대병원의 폐기물 이동거리와 무려 116배 차이가 났다.
2013년 기준 전체 의료폐기물량은 3777t으로 병원별 폐기물량은 서울대병원(1208t), 부산대병원(338t), 분당서울대병원(334t), 양산부산대병원(323t), 충남대병원(314t) 순으로 많았다. 의료폐기물량 중 3분의 2를 차지하는 이들 병원 중 유일하게 분당서울대병원만 이동거리가 100㎞ 미만이었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경북 경주에 위치한 업체를 통해 의료폐기물을 처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국립대병원이 아니라 이번 조사에서 빠진 삼성서울병원도 경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과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은 약 280㎞ 가량 떨어진 경북 고령에서 의료폐기물을 처리한다.
병원들이 가까운 수도권이 아닌 먼 지방의 업체를 통해 의료폐기물을 처리하는 이유는 비용 때문이다. 안상윤 건양대 병원경영학과 교수는 “국내의 경우 주로 의료폐기물 처리를 처리업자에게 위탁하고 있는 상황으로, 가능한 처리 비용이 낮은 업체를 선정하다보니 감염성이 높은 의료폐기물이 장거리 운송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의료폐기물 처리를 권역화하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각종 이해관계가 얽혀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박주선 의원은 “외국에서는 폐기물로 인한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감염성 폐기물의 발생지 인근 처리’ 원칙을 두고 장거리 이동을 제한하고 있다”며 “의료폐기물 이동거리를 줄여 감염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면 권역별 처리제도 등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료폐기물은 병·의원, 보건소, 의료관계 연구소와 교육기관 등에서 배출되는 탈지면·거즈·붕대·기저귀·인체적출물·주사기·주사침·체온계·시험관·분석장치·방사선필름 폐현상액·유기용제 등을 지칭한다.
보통 격리의료폐기물, 위해의료폐기물, 일반의료폐기물로 나뉜다. 격리의료폐기물은 전염병으로 격리된 사람의 의료행위에서 발생한 일체의 폐기물, 위해의료폐기물은 동물사체·시험검사 등에 사용된 배양액·주사바늘·폐혈액백, 일반의료폐기물은 혈액이나 체액 분비물 배설물이 묻은 탈지면·붕대·거즈 등이 포함된다.
2013년 기준으로 붕대나 거즈 등 일반의료 폐기물이 전체의 81%에 달했고 주사바늘·치료제·폐혈액백 등 위해의료 폐기물이 18.7%, 전염병으로 격리된 사람에게서 나온 격리의료폐기물이 0.3%를 기록했다.
이렇게 나온 의료폐기물량은 2013년 연간 총 15만4719t으로 전년 대비 17% 늘었고 최근 5년간 연평균 증가율은 12%를 기록하는 등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전체 폐기물의 25% 정도가 혈액·체액·분뇨 등에 오염된 폐기물이기 때문에 세균감염 위험이 높고, 검사실과 조제실에서 발생하는 각종 폐약품과 독극물 및 수은 등은 유해중금속 오염을 유발할 수 있다. 주사바늘·유리병은 폐기물 청소원이나 처리업자의 부상 및 감염 위험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병원 욕실의 폐수, 먹다 남은 음식 등도 병원균 감염의 위험이 있어 의료시설 내의 생활폐기물도 일반폐기물과 구별해 처리해야 한다.
의료폐기물의 처리는 의료기관 자체나 외부 처리업체에서 소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다만 체온계 등 중금속을 함유한 폐기물을 소각을 할 경우 유해성분이 공중으로 방출돼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폐해가 발생한다. 항생물질이나 항암제를 매립하거나 하수도에 흘려보내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켜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처럼 의료폐기물은 자연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어 철저히 관리돼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미 몇년 전부터 일부 대형병원들의 부실한 의료폐기물 관리가 지적돼왔는데도 딱히 개선된 점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폐기물처리장으로 가는 이동거리가 길 경우 중간에 오염물질을 전파시킬 수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법안이 발의됐지만 각종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2년째 계류 중이다.
2013년 홍영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대표발의한 ‘폐기물관리법 일부 개정안’은 전국을 권역화 의료폐기물를 처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즉 전국을 수도권역(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및 경기도), 강원·충청·호남·제주권역(강원도, 대전광역시, 충청북도, 충청남도, 세종특별자치시,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전라남도 및 제주특별자치도), 대경·동남권역(대구광역시, 경상북도,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및 경상남도)으로 나누고 의료기관은 같은 권역에 위치한 폐기물처리업체에게만 의료폐기물 처리를 위탁해야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환경부, 대한병원협회, 일부 의원들은 지금처럼 처리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굳이 법을 바꿔 갈등을 조장할 필요가 없다며 법안 통과를 반대하고 있다. 갈등의 시발점은 의료폐기물 업체간 이익다툼과 처리 단가다.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은 대부분의 대형병원이 몰려 있어 의료폐기물이 가장 많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만약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현재 수도권에 위치한 3개의 의료폐기물 업체가 모든 일감을 독식하게 된다. 그동안 수도권에서 이동해온 의료폐기물 물량으로 쏠쏠한 이득을 거뒀던 지방업체들이 개정안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로 환경부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서울 및 수도권에서 발생한 의료폐기물 6만8271t 중 수도권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처리된 양은 1만8492t(부산 13t, 충북 9591t, 충남 413t, 전남 31t, 경북 8444t)에 달했다.
게다가 의료폐기물 권역화가 시행되더라도 현재 수도권내 3개 업체가 감당하기엔 폐기물량이 많고 시설을 확대하는 것도 인근 주민들의 반대 탓에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결국 권역화가 돼도 지방으로의 폐기물 이동은 막을 수가 없기 때문에 굳이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게 반대 측의 논리다.
병원들은 권역화가 될 경우 의료기관의 선택권이 좁아지고 처리 단가가 상승한다며 개정안을 반대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현재 대형병원들이 굳이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에서 의료폐기물을 처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가 때문”이라며 “만약 폐기물을 권역별로 처리하될 경우 폐기물처리 업체, 특히 수도권에 위치한 업체들의 입김이 세져 처리 단가가 치솟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의 경우 원칙적으로 의료폐기물은 발생한 주에서 처리해야 하며 텍사스주 등 일부 주는 다른 주에서 발생한 의료폐기물의 반입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특히 의료폐기물이 발생한 병원에서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권장하며 처리방법으로는 소각, 증기멸균, 열처리, 화학멸균 등을 제시한다.
유럽연합도 기술과 시설이 허용하는 한 발생지에서 가장 근접한 곳에서 폐기물을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안 교수는 “미국처럼 국내에서도 의료폐기물 처리의 범위를 권역화해 그 지역에서 책임을 지도록 해야 장거리 이동으로 인한 유출 위험을 줄일 수 있다”며 “세계보건기구(WHO) 권고대로 병원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의료폐기물 처리 대책을 수립하고 보건의료 관계자들에 대한 관련 교육을 강화해야 감염성 의료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