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성관계를 가진 후 심한 통증과 염증을 겪는 경우 대개 질염 또는 파트너의 외도 가능성을 의심한다. 산부인과에서 항생제를 먹고, 스스로 관리해도 매번 이같은 일이 반복되면 ‘정액 알레르기’(semen allergy)일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데이비드 레스닉 미국 뉴욕장로교병원(NYPH) 알레르기 과장은 “정자 알레르기로 사망한 여성에 대한 보고는 아직 없지만, 벌에 쏘이거나 땅콩을 먹은 후에 아나필락시스로 사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액으로 인해 숨이 멎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의학문헌에 수록된 정자 알레르기 사례는 2006년 기준 80건 정도”라며 “하지만 나는 매년 두 건 정도의 사례를 접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같은 환자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마이클 캐롤 영국 맨체스터메트로폴리탄대 재생의학 강사는 “정액 알레르기가 피부병이나 성병 증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의사들도 종종 오진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정액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원인을 찾는 데 아직은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지금까지는 남성이 성관계 전 먹거나 마신 음식, 복용한 약물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고 설명된다.
음식이나 약물의 작은 분자가 정액에 스며들어 성관계 중 여성의 성기에 자극을 유발하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이같은 반응을 유발할만한 음식과 약물로는 호두, 콜라, 페니실린 등이 꼽힌다.
또 정액 자체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는 전립선에서 분비되는 단백질이 정액에 들어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김태준 원장은 “정액 알레르기를 해결하는 데 가장 간편한 방법은 성관계 시 콘돔을 착용하는 것”이라며 “남성이 콘돔을 착용해 여성이 정자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성이 라텍스에 알레르기가 있다면 콘돔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 때에는 여성이 알레르기 주사를 맞거나 항알레르기 약물을 피임겔에 섞어 질에 삽입하는 방법을 고려해볼 수 있다. 여성을 소량의 정자에 노출시킴으로써 탈감작시키는 방법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흔하지 않다.
알레르기가 없던 여성이 임신 후 정액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부부는 출산 후 남편의 생일을 맞아 오붓한 시간을 보내다 아내가 돌연 정신을 잃어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사례가 보도되기도 했다. 갑작스런 쇼크는 다름 아닌 남편의 정액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로마린다대병원 카멜라 의학박사는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여성이 임신 기간 면역 체계 이상으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원인물질이 바뀔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