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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 ‘갑을 전쟁’ … 결혼·임신은 당연히 선배님부터
  • 박정환 기자
  • 등록 2015-05-01 01:06:39
  • 수정 2015-05-07 0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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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호사·여성레지던트, 임신순번제 미준수시 왕따·폭언 … 남성레지던트도 암묵적 룰 존재

계약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갑’과 ‘을’은 한국사회의 불공정하고 억압적인 행태를 표현하는 단어로 자리잡았다. 청소년, 장애인, 취업준비생, 여성 등으로 대표되는 을이 사회 곳곳에서 갑의 횡포에 신음하고 있다. 의료계에서도 갑을 관계는 존재한다. 의사와 환자, 의대 교수와 수련의, 의사와 간호사, 같은 직군간 선후배 사이의 갑을관계는 고착화된 지 오래다. 하지만 레지던트 4년차와 1년차, 간호사 초년생과 중고참 사이에서 업무 외에 결혼이나 출산 등 사생활 전반에 대해서도 갑을관계가 영향을 미쳐 개선이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간호사 직군의 경우 대부분 여성인데 의사와 환자에 치이면서 을의 입장을 강요받기 쉬운 처지다. 저수가 구조는 병원들의 인건비 절감과 간호사의 3교대 근무로 이어졌고 이는 ‘임신순번제’라는 구시대적 악습을 만들었다.
여성 노동자가 출산이나 결혼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은 어느 직종에서나 똑같지만 병원의 경우 조직문화가 여전히 보수적이고 남성 위주로 돌아가다보니 여성이 겪는 고충이 더 크다.

간호사 사회에 임신순번제를 시행하는 곳이 많다. 업무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리 정해놓은 순서에 따라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조직 내부의 규칙이다. 지난해 3~5월 전국보건의료노동조합이 조합원 1만826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국의 주요 공공병원과 대학병원 등 보건의료 사업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임신순번제를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임신 경험이 있는 간호사 1902명 중 365명(17.4%)이 임신순번제를 겪었으며 병원종별로는 공공병원은 20.2%, 사립대학병원은 20.7%로 조사됐다.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3년째 근무중인 간호사 유모 씨는 “데이(오전 7시~오후 3시)·이브닝(오후 3~10시)·나이트(오후 10시~오전 7시) 등 3교대로 이뤄지는 업무 특성상 한 명이 빠지면 다른 간호사들의 나이트 근무가 월 1~2회 늘어나게 된다”며 “대체인력을 쓰기도 어려워 임신할 때 수간호사나 동료들의 눈치를 보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결혼 연령인 3~7년차 간호사가 빠지면 비슷한 경력의 간호사를 채용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업무 미숙이 의료사고와 직결된다는 점도 대체인력 채용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내 유명 사립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강모 씨는 “입사 후 막내뻘일 때 임신 사실을 알렸다가 선배 간호사와 동료들에게 ‘은따(은밀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며 “대학병원은 노조 등이 있어 그나마 괜찮지만 중소병원에서 근무하는 동료 간호사의 경우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한다”고 밝혔다.
서울내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윤모 씨는 “‘아이를 왜 꼭 지금 낳냐’는 인격모독적 발언을 듣거나 임신순번제에 이의를 제기했다가 다른 부서로 이동되는 등 인사상 불이익을 당한 선배도 봤다”며 “간호사들의 악습인 ‘태움’ 문화가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는 셈”이라고 말했다.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의 태움은 선배 간호사가 후배에게 폭언 및 폭력을 행사하거나 왕따를 만드는 가혹행위다. 단순한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어 의료계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임신은 물론 결혼계획을 잡기도 망설여진다.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연차가 얼마 안된 간호사에게 신혼여행은 언감생심이다. 지난해 인천지역 중소병원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와 결혼한 박모 씨는 “결혼 후 신혼여행 장소로 푸켓을 염두에 뒀지만 와이프에게 병원 사정을 들은 뒤 무기한 미룰 수밖에 없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출산이나 결혼은 간호사뿐만 아니라 여의사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기도 하다. 특히 업무강도가 센 여성 전공의의 경우 결혼이나 출산을 모두 기피하는 분위기다.
2010년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출산에 따른 여성전공의 수련환경 실태와 개선방안’을 조사한 결과 여성 전공의의 33%가 자녀를 원하지 않았고, 57%는 한 명의 아이만을 갖겠다고 응답했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중반이 대부분인 인턴이나 레지던트의 경우 출산·결혼 기피 경향이 더 심하게 나타났다. 아이를 잉태했다가 과로와 스트레스로 유산하는 경우도 적잖다.
상당수의 여성 전공의들이 수련 기간 중 임신이나 출산할 경우 가뜩이나 부족한 수면시간이 더 줄고, 자신의 교육 스케줄도 엉망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동료 전공의들의 업무 부담이 가중되는 것도 임신 및 출산을 꺼리는 주원인 중 하나다.

남성이라고 해서 결혼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군대보다 엄격한 위계질서 안에서 결혼은 당연히 선배에게 우선 순위가 돌아간다. 간호사와 마찬가지로 한명이 빠지면 업무 공백을 나머지 레지던트들이 메꿔야 하기 때문에 1~2년차 레지던트 입장에선 자리를 비우기가 쉽지 않다. 가뜩이나 주당 100시간이 넘는 근로시간에 신음하고 있는데 후배의 업무 공백까지 메꿔야 한다면 누가 흔쾌히 받아들일까.
서울 소재 종합병원에서 근무 중인 레지던트 2년차 오모 씨는 “사귄 지 3년이 다 돼 가는 여자친구가 결혼을 보채도 당최 결혼 생각이 없는 선배 레지던트들을 보면 결혼을 결정하기가 어렵다”며 “간호사들처럼 직접적으로 말로 표현하거나 서약서를 쓰지는 않지만 남자 레지던트 사이에서도 결혼은 선배 먼저라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의료계 관계자는 “임신과 출산마저 자기결정권이 없는 스트레스가 지속된다면 의료종사자들의 업무능률이 떨어져 의료서비스의 질적 저하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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