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사는 김모 할머니(82)는 약에 의지해 산다. 고혈압 관절염 위염 어지럼증 호흡곤란 등으로 여러 병원을 찾아 처방을 받다보니 서랍 속에 약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약을 꾸준히 먹는 것은 아니다. 증상이 호전되면 금세 복용을 중단하고 몸에 문제가 생겨야만 보관해놨던 약을 꺼내 먹는 습관을 갖고 있다. 20년 전부터 처방받은 고혈압약도 예외가 아니어서 머리가 아프거나 불편한 증상이 있을 때만 찾아 먹는다. 김 할머니는 1∼2개월 전부터 어지럼증과 소화불량이 심해졌다. 병원에선 약의 가짓수를 줄이고 약을 정해진 용법과 양, 시간에 맞춰 복용하라고 권고했다.
노인 약물복용에서 피해를 입히거나 가중될 수 있는 요인으로는 △다수의 만성적인 질병 상태 △여러 가지 약물복용 △연령에 따른 생리적 변화 △다수의 주치의에 의한 독자적인 처방 △처방된 용법대로 복약하지 않는 습관 △부적절한 자가 약물요법 등으로 나뉜다.
다수의 만성적인 질병 상태
65세 이상 노인의 80% 이상이 한 가지 이상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에 대한 합병증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노인이 되면 불편한 증상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해지는 동시에 약물에 의존해 질병을 치유하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기 때문에 처방받는 약의 가짓수는 눈덩이처럼 늘어난다. 한편으로 노인은 ‘모든 약은 곧 독’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잘 낫지 않는 질병에 대한 회의가 커서 ‘약발’도 썩 듣지 않는다. 약물 부작용에 의해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면 지병이 악화되거나, 노화가 진행된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약의 위험’을 간과한다.
여러 가지 약물복용
노인의 약물복용 습관에서 가장 주목되는 위험은 통상 4∼5가지 이상의 약을 한꺼번에 먹는 ‘다약복용’이다. 9가지 이상이면 노인의 저하된 약물대사기능과 약물 간 상호작용으로 인해 부작용 발생 위험이 급상승하는 것으로 연구돼 있다.
고령화가 일찍 진행된 선진 외국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처럼 잘못된 약물복용에 의해 유발되는 증상이 10∼35%에 달한다. 미국의 경우 75세 이상 노인은 평균 4.8가지의 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며 이중 35%는 6가지 이상의 약물을 병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약을 과용하는 한국에선 이보다 심할 것으로 우려된다. 특히 여러 가지 약물을 임의로 복용하는 노인이 특별한 이유 없이 피곤감, 식욕저하, 어지럼증 등의 비특이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 약물로 인한 이상반응의 가능성을 위심해 보아야 한다.
2가지 이상의 약물을 복용하면서 다음 중 한가지 이상의 경우에 해당되면 다약복용(多藥服用, polypharmacy)이라고 정의한다. △약물 복용의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 △동일한 종류의 약물을 두 가지 이상 복용하는 경우 △상호작용하는 약물들을 복용하는 경우 △약물 복용에 대한 금기사항에 해당되는 경우 △약물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또다른 약물을 복용하는 경우 △약물을 중단한 후에 질병이 호전되는 경우 등이다.
보통 심울혈성질환을 겪고 있는 노인환자는 디기탈리스(digitalis 부정맥치료제)를 복용한다. 여기에 이뇨제를 같이 먹으면 칼륨과 마그네슘 결핍이 일어난다. 따라서 유실된 미네랄을 보충하기 위해 칼륨이 많이 함유된 음식(우유, 콩, 바나나, 오렌지주스)을 함께 섭취토록 한다. 근위축 증상은 칼륨 결핍으로 일어나므로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진찰을 받고 혈액검사를 해야 한다.
고혈압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알파차단제’ 계열의 전립선비대증 약을 함께 먹을 경우 두 약 모두 혈압을 떨어뜨리는 작용이 있어 어지럼증이 생길 수 있다. 현기증으로 인한 낙상의 위험도 커진다. 이를 모르면 신경과나 이비인후과를 전전할 수 있다.
연령에 따른 생리적 변화
노인은 나이 들어감에 따라 위액 분비량이 줄고, 신장의 기능이 약화되며, 장기의 활동력이 둔해진다. 실제로 장기의 무게는 심장을 제외하고 점점 줄어든다고 알려져 있다.
예비능력(reserve capacity)은 외상, 스트레스 등에 따른 신체기능의 감소를 보상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30세 이후에 매년 1%씩 감소된다. 나이 들면 여러 가지 병으로 인해 각 기관의 수용능력이 감소돼 예비능력도 줄어들게 돼 있다.
노인들은 예비능력의 대부분(95%)을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심혈관 및 중추신경계의 이상은 예비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려 원상 회복하기 어렵다.
노인은 혈액순환이 활발하지 않아 약물의 배출과 흡수가 느리다. 신장의 사구체여과율은 노인에서 최고 50%까지 감소한다고 알려져 있다. 간 효소 기능의 약화로 약물대사가 느려서 성인 용량만큼 복용해도 약물의 혈중농도가 오랜 시간동안 높게 유지된다. 이 때문에 부작용이 자주 나타난다.
중추신경계 약물은 노인에서 약효가 과도하게 발현될 수 있어 일반양의 3분의 1 내지 3분의 2 정도로 투여를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다. 와파린(혈액응고억제제)과 페니토인(항경련제)처럼 치료역(치료용량의 범위)이 좁은 약물 등이 바로 그 예다.
반면 노인의 면역력은 성인보다 약하기 때문에 항생제는 더 많은 양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면역력저하는 스트레스, 외상, 감염과 맞물려 산성-α1당단백(α1-acid glycoprotein)을 증가시키는데 이 단백질과 결합하는 리도카인(국소마취제), 프로프라놀롤(고혈압약) 등의 약물은 효과가 감소될 수 있다.
노인의 신체 기능부전 외에 체내 구성성분의 변화도 노인의 약물 복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신체는 노화를 겪으면서 지방이 늘어나고 단백질과 수분이 줄어든다. 예컨대 지방이 많아지면서 비극성 지용성약(벤조디아제핀, 바비츄레이트, 프라조신↔극성:디곡신, 베라파밀, 리튬)이 지방에 축적되기 쉽고 체내 수분이 낮아 약물농도가 높아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혈장 단백질인 알부민 합성이 감소하면서 이 단백질과 결합하지 않는 비결합, 활성형 유리약물의 혈중농도가 높아지게 된다. 이 때문에 유리약물들이 급격한 작용을 나타내면서 독성과 약물부작용이 커진다. 이 같은 정신적·신체적 배경 때문에 노인의 약물 부작용은 성인층의 3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수의 주치의에 의한 독자적인 처방
가장 흔히 복용하는 고혈압약을 예로 들자. 고혈압과 심부전에 효과적인 ‘안지오텐신 전환효소 차단제(ACEI)’ 계열 약물은 부작용으로 이따금 마른 기침을 하게 된다. 그런데 환자가 이를 약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병원에서 진해제나 천식약을 처방받는다면 불필요한 고생을 하는 셈이다. 혈압강하제와 기침약(테오필린)을 함께 먹으면 가슴에 격심한 통증을 겪고 경련을 일으키며 심지어 졸도할 수 있다. ACEI 혈압강하제가 테오필린의 성질을 변화시켜 혈액 내 농도를 급격히 올리기 때문이다.
다른 병원에서는 지금 나타난 증상에 진단을 한정하게 되고 다른 병과의 관련을 고려하지 않게 된다. 평소 위궤양이 있는 환자가 관절염 때문에 정형외과를 찾을 경우 정형외과에서는 위장질환에 대해서 묻지 않고, 환자도 위의 상태와 관절의 통증과는 관계가 없다고 치부해버리기 쉽다. 병원에서 관절염 증상 완화를 위해 만약 비스테로이드계 항염증제(NSAIDs)를 처방한다면 위궤양이 급속히 악화될 수 있다.
또 뇌졸중과 심장병은 별개의 질환이라 따로 약을 처방받아 복용할 수 있는데 같은 성분을 겹쳐 먹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일반인들은 개개 기관의 역할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위가 아프면 위만 치료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의 장기는 서로 관련지어 활동하고 있으므로 상호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병원처방약(전문약)과 약국에서 파는 약(일반약)을 함께 복용하는 것도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시판하는 약에는 유효성분의 양이 적어서 병원처방약과 함께 복용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실제로 당뇨병 때문에 혈당치를 억제하기 위한 약을 늘 복용하는 사람이 목의 염증을 진정시키기 위해 약국에서 파는 비스테로이드계 항염증제를 복용하면 혈당치가 지나치게 내려가 현기증을 일으킬 수 있고 심하면 혼절할 수도 있다.
또 약국에서 파는 비타민제나 드링크제를 병원처방약과 함께 무심코 마셔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비타민A나 비타민D 같은 지용성 비타민은 소변으로 배설되지 않아 과잉섭취하면 몸 안에 계속 축적된다. 드링크제 안에는 보통 카페인이나 알코올이 함유돼 있고 당분도 상당히 많다. 병원처방약과 함께 복용할 경우 약의 흡수 속도에 영향을 미치고 효과가 지나치게 강렬해지거나 증상이 악화될 염려가 있다.
처방된 약물 용법에 대한 복약 불이행
고혈압약을 먹어 혈압이 떨어지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고 해서 운동·식사요법도 하지 않은 채 약 복용을 중단한다면 언젠가 뇌졸중이나 심장병에 처할 위험이 크다. 실제로 고혈압 약물을 복용하다가 증상이 없고 괜찮아졌다 생각해서 임의로 약물 복용을 중단한 후 혈압이 조절되지 않아 합병증으로 뇌졸중이 와서 입원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또한 당뇨약 복용을 임의로 중단한 후 고혈당 혼수로 응급실에 입원하는 경우도 있다. 약물은 처방된 대로 꾸준히 복용했을 때 질환이 잘 조절되고 합병증 없이 잘 관리할 수 있다.
고령자는 만성질환자인 경우가 대다수인데 인식능력과 기억력이 감퇴해 약물복용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노인환자들은 되도록 간단한 복용방법을 택하고 지속시간이 긴 약물을 활용하는 게 좋다. 복용시간별로 약제를 묶어 약 먹는 시간을 잊지 않도록 조치한다.
거동력 저하, 경제적 어려움으로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못해 치료시기를 놓치거나 부작용을 겪은 경험이 있어 복용을 중단하는 경우도 빈번하므로 주위에서 잘 보살펴줘야 한다.
이밖에 노인은 심한 부작용이나 다른 약과의 상호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약은 가급적 배제하는 게 바람직하다.
부적절한 자가약물요법
우리나라 사람들은 약을 구입할 때 자가진단을 토대로 약을 구입해 먹는 경우가 다반사다. 2007년 4월부터 7월까지 서울시내 한 노인복지관의 진료실을 방문한 8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지난 4주간 복용한 약물과 그에 대한 지식정도를 연구한 결과, 약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환자일수록 복용 약의 수가 많고, 복용약물의 수가 많은 노인일수록 약물 부작용 경험이 많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만성질환을 갖고 있을 때 복용하는 약은 평생 꾸준히 먹어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노인환자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약물이 원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환자나 보호자들은 약물에 대한 정보를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첫째, 평소 복용하는 약물의 이름을 외워두고, 약품명이 길고 어려우면 처방전을 보관해둔다. 둘째, 같은 성분의 약물이라도 용량이 다양하므로 1정당 정확한 약물의 함량을 알아둔다. 셋째, 복용중인 약물이 어떤 효능이나 약리작용을 갖고 있는 약물인지 익혀 두도록 한다. 복용중인 약의 효능을 의사가 전달 받으면 환자의 질병에 대한 이해도가 커지고 응급상황 시 환자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선 자가진단을 지양하고 ‘약수첩’을 활용하는 게 좋다. 약수첩은 자신이 복용한 경험이 있거나 지금 먹고 있는 약을 적고 약에 대한 부작용, 앓고 있는 질환을 표기한 것이다. 약수첩에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생활리듬으로 살고 있는지, 음주나 흡연습관은 어떤지도 적으면 더욱 좋다. 의사는 이를 통해 처방이나 조제를 할 때 병용해서는 안 되는 약을 피하고, 부작용이 덜한 약을 고르며, 환자에게 맞는 복약지도를 내릴 수 있다.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약이라도 복용에 따른 자신의 증상을 세세히 설명하는 게 좋다. 예컨대 “감기약만 복용하면 꼭 위장이 쓰리다”는 한마디 정보가 전달될 수 있다면 의사는 위장에 부담을 덜 주는 성분으로 된 약을 처방해 줄 수 있다. 알레르기 체질 유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인약물복용의 부작용 예방
노인은 가급적 운동, 휴식, 자원봉사, 평생교육, 노래교실, 댄스치료, 상담 같은 비약물요법을 먼저 시도한다. 그리고 주치의나 단골약국을 선정해 중복 처방을 피해야 한다.
노인에게 적절한 약제는 불활성화된 대사물을 가져 작용시간이 짧거나, 지용성이 덜하고 하루에 복용횟수가 적은 약물이다. 복잡한 약물투여방법을 간단히 하기 위해 의사에게 미리 협조를 구하고 충분한 설명을 들어 복용방법을 정확히 숙지하도록 해야 한다. 보호자와 동행해 함께 복약방법에 대해 교육받고 이 약을 왜 먹는지, 어떻게 먹는지, 얼마나 오래먹는지와 잠재적인 부작용이 무엇인지 지시사항이 담긴 문서를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약물복용여부를 매일 달력에 기록하는 습관도 권장할만하다. 주기적으로 철저히 모니터링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