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우울증은 개인의 정신건강은 물론 기업의 생산성도 갉아먹으므로 직종별, 직급별, 연령별, 성별로 기업 및 사회적 차원의 맞춤대책이 시급하다.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가 끝나는 엔딩 음악이 들리는 순간부터 ‘다시 지긋지긋한 월요일이구나’ 하고 한숨쉬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토요일 저녁부터 회사에 나갈 생각에 출근하기 직전까지 말이 없어지고, 의기소침해지고, 무기력하게 잠만 자는 직장인도 적잖다. 이렇다보니 직장인들 사이에서 공감받으며 회자되는 게 ‘월요병’이다. 다시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회사에 가야한다는 생각에 무력감, 우울감, 분노, 짜증 등을 느끼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뉴스Y 김 모 기자는 월요병을 막으려면 ‘일요일에도 나와서 일하면 되지 않느냐’는 당황스러운 솔루션을 제시해 직장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 기자의 SNS계정은 많은 네티즌의 공분에 ‘계폭’(자신의 계정을 삭제하는 행위)당하기도 했다. 월요일이면 사직서·두통약 등의 키워드를 놓고 검색하는 직장인들이 넘치는 상황에서 엇박자를 놓았으니….
최근 잡코리아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의 10명 중 8명은 출근만 하면 무기력하고 우울해진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항시적인 구조조정 분위기, 승진경쟁, 연봉제 등 구조적인 시스템은 물론 대인관계, 진상손님 등 개인적인 문제까지 겹쳐 회사에 나가는 것 자체에 견디지 못할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죽지 못해 다니는 회사’에 출근하면서 정신건강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당하는 직장인이 적잖다.
실제 불안함 마음이 번져 우울증으로 악화되더라도 주변의 ‘나약한 사람’, ‘그것도 못 견딜거면 회사에 다니지 말아야지’라는 부정적인 시선 탓에 병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행여나 승진 등에서 문제가 생길까봐 지레 겁먹는 경우도 적잖다.
정성훈 대전 을지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울증은 일종의 뇌질환으로 결코 마음이 약하거나 어리석어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며 “생물학적, 심리적, 환경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유발된다”고 말했다. 심리적인 요인이 우울증을 유발하는 첫 단추의 역할을 하는데 개인마다 스트레스를 수용하고 소화해내는 신체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이는 우울증에 걸리고 어떤 이는 극복하게 된다.
직장인들이 달고 사는 흔한 두통, 근육통 등도 우울증의 신호일 수 있다. 정 교수는 “흔히 정신적 침체만을 우울증 증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두통, 어깨결림, 전신통증, 소화불량, 피로감 등 신체적 문제도 우울증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며 “신체적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되고 막연한 우울감, 집중력 저하, 기억력 감퇴 등을 동반한다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 진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정호 서울근로자건강센터 심리상담사는 “직종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직장인들이 우울감을 호소하는 주된 이유는 과도한 업무 등 직무스트레스, 업무에 대한 압박, 인간관계 등”이라며 “특히 인간관계 문제는 업무를 하는데 의사소통이 어렵거나, 업무에 상관없이 개인을 인격적으로 무시·모독당하는 경우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간혹 우울감이 아닌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욱하는 경우도 많다”며 “이는 주로 40~50대 남성에서 볼 수 있는데 평소 쌓이던 감정이 적절한 데서 드러나지 못하고 만만한 부하직원 등에게 터뜨리는 사람도 적잖이 볼 수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회사에서 억누르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자신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결과다.
직장인의 우울증 양상은 획일화되지 않고 기업규모·직종·연령·직급마다 스트레스 양상과 강도가 다르다. 제각기 심신이 지쳐서 기업의 성장성을 잠식할 정도여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생산공장에서 5년째 근무중인 27살의 여성근로자 김모 씨는 지난 3월 작업 도중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작년부터 생산라인에 들어서기만 하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불안하고 머리가 아프더니 올해 들어선 아침에 회사에 나가는 일이 싫고 점차 지각과 결근이 잦아졌다. 요즘엔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고 이러다간 자살이라도 할 것 같다는 충동을 느낀다. 단순·반복작업을 하는 생산직에서 나타날 수 있는 전형적인 우울증이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간 인수합병이 활발해지면서 자리보전이 어려워진 금융업 종사자들은 가시적인 스트레스는 없어도 수치로 드러나는 업무실적 및 고과평가에 좌불안석이다. 10년전 40대 중반에 이사가 된 국내 시중은행의 이모씨는 억대 연봉을 받는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승진 이듬해 외국계 은행과 합병되면서 더 높은 실적을 올려야 했다. 이를 위해 매일 저녁 10시 넘어 퇴근해야 했고 평일 밤이나 주말이면 고액예금고객에게 음주나 골프를 접대해야 했다. 정신과에선 우울증·불안증을 동반한 적응장애이니 휴직을 권고했으나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한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둔 채 몇년전 자살을 선택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은행은 예금유치액, 예금 대비 대출률, 신용카드 확장이나 보험판매액, 주택청약통장 건수 등을 수치화해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연거푸 두차례 달성하지 못할 경우 본부 후선(後線)대기로 발령이 나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며 “까탈스런 고액예금고객의 불평불만을 다 들어주다보면 애간장이 녹는다”고 말했다. 더욱이 피인수된 은행 출신 행원이나 비정규직이라면 소외감에 의한 스트레스가 가중되기 마련이라고 덧붙였다.
영업직은 실적달성에 대한 강박감과 자존감 없는 삶이 스트레스의 주범이다. 외국계 G제약사에서 영업맨 이모 과장(35)은 회사 임원까지 경쟁사로 전직할까봐 늘 챙겨주는 사내 ‘넘버5’ 영업맨이지만 속이 곪아있다. 영업 8년차에 접어들다보니 간과 쓸개는 물론 영혼까지 팔아야 한다는 영업맨 수칙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객인 의사들의 터무니없는 요청을 받고 거절도 못하고 오래도록 끙끙댄다. 거의 매일 이어지는 술자리를 마치고 새벽에야 집에 돌아오면 정신적으로 탈진된 자신의 모습에 이유없이 왈칵 눈물을 쏟아진다. 요즘엔 불면증까지 찾아오면서 만사가 귀찮고 하루에도 몇번씩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하는 생각을 한다.
관리직·사무직 직원들은 상사와의 ‘내무반’생활이 노곤하다. 꼼꼼한 일처리는 물론이고 상사와의 관계가 인사평가 보직배정을 좌우하다보니 잘 보여야 하는 게 스트레스가 된다. 대기업에 다니는 32세의 김 모 대리는 “상무가 화장실 앞에 서 있다가 용변을 보고 나오는 전무에게 깍듯이 수건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아부의 극치를 봤다”며 “줄 잘서야 출세한다는 게 눈이 보이니 이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은 사내 대인관계 형성 자체가 스트레스”라고 말했다.
연령별로는 30대 후반~40대 초반에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에서 책임지는 역할을 맡기 시작하는데다 결혼과 자녀 출산, 교육 등으로 걱정이 많은 연배다. 종신고용 시대가 끝나면서 전업이나 전직을 고려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40대 중후반은 중간관리직이 되는 세대로 조직을 거느리면서 큰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게 부담스럽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과 교수는 “승승장구한 사람일수록 윗사람은 잘 모시지만 아랫사람을 다루는 법이 서툴다”며 “승진을 계기로 대단한 업무 성과를 이루려다보니 마음은 고달프고 신체건강까지 무너지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20대는 대학시절까지 엘리트로 대접받던 사회초년생들이 회사라는 실제 사회에 나와 엄격함을 접하면서 견디기 힘들어하는 연령층이다. 30대 중초반은 스트레스는 받지만 업무습득과 회사적응 능력이 상승하는 시기로 스트레스가 줄거나 극복되는 과정을 밟는다. 50대는 사내 경쟁에서 이겨 웬만한 임원 자리에 오른 만큼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경영일선에서 언젠가는 물러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지나친 직무스트레스는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산재위험과 관련 의료비를 높이는 만큼 경영진의 스트레스 저감정책이 요구된다”며 “사내에서 직급에 맞는 라이프 스타일 코칭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종민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먹고 살자니 마지못해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으로는 회사에서 대박이 터질리 없기 때문에 CEO와 고위임원들이 직원의 마음 건강 챙기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려면 창의성과 자발적인 근로의욕이 필수적인데 불행한 마음으로는 변화를 거부하고 혁신을 주도할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한 일터와 직장인을 가꾸는 게 현대 경영에서 중요해지고 있다.
우 교수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향하던 과거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근로자들의 자아의식이 형성되면서 마음에 병이 늘었고 한국도 그런 상황에 임박해 있다”이라며 “직장인들의 행복한 삶과 기업 생산성 제고를 위해 직장검진에서 정신건강 체크를 필수항목으로 넣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신 관련 고위험군의 비율을 전체 인구의 4.6%,이들의 생산성 저하를 30∼50%로 산정해 직무스트레스와 관련 직·간접 손실비용을 추산해보니 연간 13조1623억원에 달했다”며 “절대빈곤에서 헤쳐나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던 1970∼1980년대에는 정신건강을 챙길 겨를도 없었으나 경제수준 향상으로 근로자의 자아의식이 형성되면서 정신질환이 늘고 경영성과를 좌우할 수 있는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우울증은 단순히 의욕이 없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갑작스레 무기력감과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번아웃신드롬’(burn out syndrome),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파랑새증후군’, 자신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 ‘와이미신드롬’(why me syndrome), 직장에서는 감정을 숨기고 웃고 있지만 속은 타들어들어가는 ‘스마일마스크증후군’ 등이 동반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어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