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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정신건강 문제로 우울증 걸려도 ‘산재’ 인정 가능
  • 정희원 기자
  • 등록 2014-04-02 12:26:33
  • 수정 2014-04-03 20: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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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정 시스템 구축됐지만 절차 복잡·싸늘한 주변시선·회사 비협조·신청후 퇴직 분위기에 ‘갈길 멀어’

수직적 직장내 인간관계, 과도한 업무량, 감정노동자의 심리적 상처, 사내 성희롱 등으로 직장인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직장생활 5년차에 접어든 박모 씨(34)는 요즘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자살시도를 구체적으로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간혹 자살하는 사람들의 기사를 접하면 ‘그럴수도 있겠다’고 수긍이 갈 정도다. 그는 자기 혼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술을 좋아하는 부장은 거의 매일 ‘강제 회식’으로 집에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기도 갓 태어난 상황에서 술냄새를 풍기며 밤늦게 들어가면 아내는 ‘버는 것보다 술값 드는 게 많지 않느냐’며 비꼰다. 남들에게 하소연하면 ‘좋은 대학 나와서 공부 더 열심히 하지 그랬냐’, ‘싫으면 한국에서 살면 안 되지’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정신과를 방문하거나 심리상담을 받고 싶어도 시간도, 돈도 걱정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잡코리아의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출근만 하면 무기력하고 우울해진다는 직장인이 평균 10명 중 8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회사 우울증을 겪고 있지만 이를 해결할 방법은 딱히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에서 직장은 ‘감정을 숨겨야만 하는 곳’이다. 자신이 우울감을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이를 공감해주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약해 빠진 사람’,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마련이다. 타인의 괴로움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나도 참았는데 네가 왜?’, ‘우리 때는 그렇지 않았다’ 등 평가절하하는 게 일반적이다.

박 씨처럼 우울감을 달고 사는 직장인은 ‘한국에 사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면서 고작 내놓는 해결책이라는 게 ‘이직’이다. 하지만 극심한 상황이라면 산업재해로 인정받아 요양치료나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대형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41세 여성 A씨는 손님의 거듭된 폭언에 시달리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민원인을 상대로 한 출장업무를 맡던 46세 남성 B씨는 업무처리와 관련된 소송이 진행되던 도중 직장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은 모두 산업재해로 인정돼 보상을 받았다. 업무 중에 고객이나 민원인을 상대하면서 겪은 감정적 소모가 우울증이나 자살로 이어졌다는 점이 인정된 것이다.

직장내 성희롱에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우울증 등이 발생했다면 이 역시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 작은 회사에 근무하는 디자이너 김 모씨(29·여)도 당장 직장을 관두고 싶어도 ‘막막한 현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회사가 작은데다 유일한 여사원이라 전화받는 일을 도맡다보니 ‘진상’을 부리는 고객과의 통화가 탈진하게 만든다.
게다가 남자사원들은 매일같이 대놓고 김 씨의 외모를 흠잡고, 성적인 발언을 일삼아 수치감을 준다. 도가 지나치는 경우엔 ‘정말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솟는다.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고 간섭해대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 씨는 “4년을 이렇게 지내다보니 멘탈이 너덜너덜해졌다”며 “매일 밤 부모님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정도”라고 말했다.
 
국내서 2011년 11월 처음 직장 내 성희롱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바 있다. 당시 피해여성은 회사 간부 두명으로부터 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 신청서를 제출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직장 상사의 성희롱으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피해자의 주장을 산업재해로 인정했고 피해자는 치료비와 휴업 급여를 지급받을 수 있게 됐다.
 
김정현 노무법인 산재 노무사는 “최근 들어 요양보호사, 텔레마케터, 간호사 등 감정노동자의 고충이 보도되면서 정신건강 문제를 산업재해로 인정할 정도로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며 “아직까지는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절차가 험난해 갈길이 멀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정신건강 문제를 산업재해로 인정받으려면 ‘증거’를 모으는 게 우선돼야 하는데 이에 협력하려는 회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며 “산재 신청을 하는 사람은 퇴사를 각오하고 일에 임하는 게 당연할 정도”라고 덧붙였다. 
 
우선 산재 입증에는 우울증, 공황장애에 걸렸음을 확인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진단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이전에 이같은 병력이 없어야 한다는 게 포인트다. 또 산재를 신청하는 시점에서 회사일 외에 ‘정신건강을 피폐하게 만들 만한 사항’이 없어야 한다. 예컨대 이혼, 배우자 사별, 부모·가족·절친의 사망, 애인과의 이별, 경제적 곤궁 등을 꼽을 수 있다.
 
다음으로 회사에서 당한 부당한 사례를 입증하는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텔레마케터의 경우 블랙컨슈머와의 대화 녹음, 진상 고객이나 회사 상사가 자신을 핍박하고 회사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 등을 꼽을 수 있다.

일반 직장인의 경우 상사가 자신의 과오를 ‘평소 맘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하직원에게 전가한 내용을 담은 문서, 성희롱 당한 내용을 증명할 만한 문자메시지 또는 메신저 기록, 부당하게 감봉하겠다고 선언한 뒤 바뀌어진 월급명세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의 유서 등이 필요하다.

김정현 노무사는 “자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회사와 개인 간 갈등이 심하게 나타날 수 있어 산업재해를 신청한 뒤 다시 그 회사를 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제도는 마련돼있지만 사회 전반적인 인식 탓에 아직까지 제대로 활용되지는 못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어 “자신이 너무 힘들어 산업재해를 신청했더라도 주위에서 ‘회사를 배신한 사람’, ‘나약한 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등으로 보기 때문에 산재인정은 물론 업무복귀도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이정호 서울근로자건강센터 심리상담사는 “사회 전체가 압박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는 만큼 자신의 감정을 알고도 피하는 경우가 많다”며 “평소 업무에 활력을 느끼지 못하거나, 일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무기력한 증상이 수주 이상 지속되거나, 감정조절이 어려운 사람은 산재 신청에 앞서 심리상담을 받아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센터에서는 자신의 정신건강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설문을 진행한 뒤 상황에 따라 개인상담, 그룹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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