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김 모씨(22)는 최근 큰맘 먹고 남자친구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처음엔 너무나 다정했지만 점점 소리를 지르고 난폭한 행동을 하는 등 ‘폭력의 징후’가 보이더니 급기야 손찌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남자친구를 너무 사랑하는 만큼 감내해야 할 일’로 생각했지만 교양수업을 듣다가 ‘데이트폭력’이라는 개념에 대해 듣게 되면서 이별을 생각하게 됐다.
대학 캠퍼스커플로 만난 남자친구는 번듯한 외모와 유머러스한 성격으로 동기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완벽한 매너로 ‘완벽한 남친’으로 통하고 있었지만, 둘이 있을 때 문제가 생기면 김 씨에게 언성을 높이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얼마 전 사소한 언쟁을 벌이다 남자친구가 김 씨의 어깨를 친 것을 시작으로 그 뒤 트러블이 생길 때마다 머리 등을 ‘가볍게’ 얻어맞고 있다. 한번은 복부를 크게 맞은 적도 있지만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워 혼자서만 끙끙 앓고 있다. 남자친구는 매번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선물을 하거나 좋은 곳에 데려가면서 기분을 풀어줬지만 점점 상처받는 마음에 어렵게 이별을 결심했다.
데이트폭력은 남녀간 교제 과정에서 일어난 육체적·언어적·정신적 폭력을 일컫는 말이다. 일방적인 스킨십이나 성관계 강요, 일거수일투족 감시 및 간섭, 성적인 수치심이 드는 폭언, 언어폭력, 직접적인 신체적 폭력 등이 해당된다.
서경현 삼육대 상담학과 교수가 건강심리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20대 여성 279명 가운데 36.9%가 데이트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자 대학생 중 46.2%가 한 번 이상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행사한 경험이 있었다.
서경현 교수는 “데이트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의 유형으로는 질투심과 소유욕이 강한 사람, 갑자기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김 씨처럼 마음의 상처를 제외한 큰 문제가 없었다면 다행이지만, 목숨을 위협당하거나 실제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많다. 지난해 추석 연휴엔 남자친구의 발길질에 턱을 맞고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결국 사망한 21살 여성의 이야기는 데이트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재조명하도록 만들었다. 가해자 A씨는 여자친구 B씨와 말다툼을 벌이다 B씨의 턱을 발로 차고 뺨을 때렸다. 결국 여자친구 B씨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향한 폭력은 셀 수없이 많다. 2010년 10월, 서울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애인의 모녀를 상대로 흉기를 휘둘러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살인한 사건이 있었다. 2012년 7월에는 애인이 결별을 통보하자 이에 격분한 남성이 울산에서 자매를 살해한 사건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고 있다. 같은 해 9~10월에도 교제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동거녀를 살인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2012년 1~12월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 남편이나 애인 등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120명,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49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범죄를 막다가, 혹은 막았다는 이유로 자녀나 부모 등 무고한 35명도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헤어지자고 했다는 이유로, 혹은 헤어진 후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봉변을 당했다.
왜 이런 현상이 자꾸 벌어지는 걸까. 유은정 좋은클리닉 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는 분노조절·충동조절의 어려움이 서로 호감을 갖고 데이트하는 연인 관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며 “야간 데이트, 혼자 사는 경우, 데이트 자체가 비밀시되고 둘만의 공간에서 이뤄지는 경향이 늘어나는 것도 데이트폭력 유발에 한몫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교양수업을 들으며 자신이 데이트폭력을 당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이별은 무서웠지만 용기를 낸 계기는 ‘잘 헤어지는 법’, 즉 남자친구에게 상처주지 않고 헤어지는 솔루션을 배우면서다. 잠시 스쳐가듯 얘기한 부분이지만 이 씨의 기억에 남았다. 수업 담당교수는 “요즘은 세상이 흉흉해 헤어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며 “이럴 경우 분노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했던 사람에게 화를 그대로 표출하는데, 목숨의 위협까지 받을 수 있어 ‘제대로 헤어지는 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밝은 대낮에, 사람이 많은 카페 등 ‘탁 트인 장소’에서 만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엔 상대방의 장점을 이야기하며 칭찬한 뒤 ‘넌 참 좋은 사람이지만, 내게 과분하다’거나 ‘네 잘못이 아닌 내 문제니 좋게 이별하자’는 식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밝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일단 화를 조절하게 되어서다.
유은정 원장도 “현명하게 헤어짐은 이후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회피하는데 도움이 된다”며 “상대방이 ‘버림받았다’고 느껴 감정의 동요가 심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회피, 일방적통보, 갑작스런 버림은 최악의 이별 매너”라고 덧붙였다.
김 씨는 “상대방의 감정을 잘 달래가면서까지 폭력을 막아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며 “어쨌든 나를 위해 ‘좋게’ 헤어지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착잡한 마음을 털어놨다.
김 씨와는 달리 폭력을 당하고도 헤어지지 못하는 여성도 많다. 유은정 원장은 “이는 매맞는 아내와 동일한 심리 상태로 데이트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내가 좀 더 잘하면 나에게 화내거나 때리지 않을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 등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성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이 데이트폭력을 경험한 뒤에는 반복될 확률이 높고, 심지어 계속되기 쉬우므로 반드시 이 부분에 대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 원장은 “반복되는 패턴에 무기력해진 여성들의 선택은 가만히 있는 것”이라며 “이럴 경우 여성들은 헤어짐을 너무 두려워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나같이 맞고 지내는 여자를 누가 사귈까’, ‘이 남자말고는 나와 연인관계를 맺을 남자는 없을 것’ 등 자존감까지 저하되면 이별은 더욱 어려워진다.
또 남자친구가 사사로이 간섭하고 감시하는 심리적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수동적 태도도 데이트폭력을 부추길 수 있다.
만약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면 사소한 의견 차이가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먼저 부모나 친구 등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을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폭력을 행사한 날짜와 시간을 자세히 기록해 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몸에 남은 상처 등은 사진을 찍거나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어 둔다. 문자메시지나 메신저 등을 이용해 협박받는 경우 이를 캡처하거나 저장해 증거를 남겨야 한다.
전문가들은 “교제 때 시작되는 작은 폭행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며 “사소한 폭력의 징후가 나타나면 단호하게 ‘그만 하라’는 입장을 나타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대방이 용서나 화해를 구하려 들 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하는 게 포인트다.
하지만 이렇게 저장하고, 증거를 모으고, 주위 사람에게 알렸다 하더라도 국내서 데이트폭력에 대한 처벌은 쉽지 않다.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은 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방지법으로 제재할 수 있다. 하지만 데이트폭력이 경우 민·형사상 처벌을 할 수 있지만 경찰들은 ‘치정 문제’로 여겨 가볍게 생각하기 일쑤다.
영국에서는 이런 문제를 줄이는 방법으로 남자친구의 전과를 조회할 수 있는 제도인 ‘클레어법’을 시범실시, 올해부터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이 법은 2009년 클레어 우드라는 30대 여성이 헤어진 애인에게 살해된 게 계기가 돼 생겼다.
우드의 남자친구는 전에도 여성 폭행 전과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 이후 여성이 원하면 애인의 관련 전과를 경찰에 조회할 수 있도록 한 클레어법을 맨체스터 등 4곳에서 시범 실시했다. 올해 3월부터는 잉글랜드와 웨일즈 전역으로 확대된다. 당시 영국에서는 데이트폭력은 ‘헤어질 때’ 가장 심하다는 지적이 이는 등 찬반논란이 거셌다. 하지만 시범기간 2년 동안 111건의 전과공개가 이뤄졌고 영국 정부는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해 예정대로 확대 실시한다.
미국에서도 2월은 ‘데이트폭력 근절의 달’로 지정할 만큼 범국가적으로 경각심을 일으키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 여성데이트피해예방대책(PSA)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상황이다.
데이트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법 마련도 중요하지만 사회 전반에 깔린 잘못된 성의식이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의 변화, 사회적 인식 변화를 위한 캠페인, 예방교육 강화 등이 이뤄져야 한다.
유은정 원장은 “사랑은 책임감 있고 성숙한 두 성인이 서로 자아의 경계를 느슨하게 하고 비밀을 공유하며 감정을 나누는 과정”이라며 “때로는 자신의 자아의 경계를 느슨하게 한 만큼 내 모습을 상대방에게 많이 드러내기도 하고 상대의 모습이 나에게 거울처럼 비춰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다만 “둘 사이의 비밀만 공유되고 보편적 인간관계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병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며 “특히 의존적인 성향 때문에 자기주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남자에게 이끌리기 쉬운 여성은 가급적 부모·형제·친구들에게 교제 사실을 알리고 둘만의 시간 말고도 주변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 관계를 객관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성폭력·데이트폭력 예방법(한국여성의전화 제공)
1. 평소에 나의 의견을 분명히 말하는 습관을 들인다.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 주는 게 습관화되면 원치 않는 행동을 강요받을 때에도 쉽게 거절할 수 없게 된다.
2.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내가 원치 않는 성적 행동을 당하면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하라. 많은 사람들은 확실한 대답이 없으면 ‘무언의 동의’를 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3. 상대와 평소 성에 관해 터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라.
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말 할 수 있어야 ‘당황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4. 나를 질책하는 사람을 주의하라.
옷 스타일을 문제 삼거나, 친구들을 만나지 말라고 하는 등 간섭하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게 좋다.
5.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모르는 곳에서 데이트하는 것은 피한다. 어디서든 혼자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비상금을 챙겨놓는다.
보통 처음 가는 곳이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 인적이 드문 곳에서 데이트 성폭력이 잦다. 잘 모르는 지역에서 생기는 불안감으로 인해 평소 알던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는 심리를 남성이 역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