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량이 세다고 해서 간이 튼튼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알코올성 간질환의 위험이 높아진다.
연말이 되고 송년회 등 술자리가 잦아지면서 직장인들의 간과 뇌가 혹사당하고 있다. 위장은 물론 신장과 췌장도 알코올의 폭격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과음이 나쁘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지만 술의 특성상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절제하기가힘들다.
오랜 학창시절 친구들, 직장상사라는 공공의 적을 둔 동기들, 10년만에 만난 첫사랑, 맘에 드는 소개팅녀 혹은 소개팅남 등과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얼굴은 빨갛게 변하고 정신이 알딸딸해진다. 술이 계속 들어갈수록 기분은 좋아지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며 최악의 경우 블랙아웃, 즉 필름이 끊기는 현상에 봉착하게 된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어떤 시점부터 술자리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집에 어떻게 왔는지 등이 기억나지 않아 불안감과 자괴감이 밀려온다. 망각 상태에서 주고받은 카카오톡 내용이나 통화목록을 보고 좌절하는 사람도 많다. 단지 술이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절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차피 마셔야 할 술이라면 조금이라도 건강에 도움되는 음주법을 숙지하고 이를 실천하는 게 효과적이다.
간이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알코올 양은 최대 160g이다. 그러나 이는 최대치일 뿐 알코올을 160g 섭취해도 안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체중 60㎏인 남성의 경우 간에 무리가 되지 않는 알코올 양은 하루 80g 정도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권장하는 1일 알코올 섭취량은 더 엄격해서 남자는 40g(소주 5잔), 여자는 20g(소주 2.5잔)이다. 알코올 양은 ‘술의 양×농도’로 계산하는데 도수가 4%인 500㏄ 생맥주 한 잔을 마시면 500에 0.04를 곱한 결과, 즉 20g의 알코올을 섭취하게 된다. 계산대로라면 하루에 생맥주를 4잔만 마셔도 알코올 섭취량이 80g에 달한다. 소주의 경우 2홉짜리 1병, 포도주는 600㎖ 기준 1병, 양주는 750㎖ 기준 4분의 1병 정도가 해당된다.
입으로 들어간 알코올은 위(70%), 십이지장(25%)에서 주로 흡수되고 나머지는 장에서 흡수된다. 과도한 양의 알코올이 들어오면 장 입구가 봉쇄되고 위산이 분비돼 구토증세가 나타난다. 흡수된 알코올은 간에서 두 단계를 거쳐 분해된다. 1차로 알코올탈수소효소(alcohol dehydrogenase)에 의해 아세트알데히드로 전환된다. 이후 아세트알데히드는 아세트알데히드탈수소효소(ALDH)에 의해 초산으로 바뀐 후 최종적으로 물과 탄산가스로 분해돼 몸 밖으로 배출된다.
알코올탈수소효소의 양은 사람마다 달라 주량에서도 차이가 난다. 이 효소가 많을수록 주량은 세지며 특히 유전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술을 잘 마시면 아들도 주량이 센 경우가 많다. 술을 자주 마실수록 주량이 늘어난다는 속설은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알코올이 몸에 들어오지 않으면 생성되는 알코올분해효소도 적기 때문에 술을 오랜만에 마시면 더 빨리 취하고 숙취도 심해진다. 반대로 술을 매일 2주 정도 마시면 간의 에탄올 분해능력이 약 30% 상승한다.
그러나 술이 세졌다고 해서 장기에 미치는 손상 정도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되면서 알코올성 간질환 등의 위험이 높아진다. 전용준 다사랑중앙병원장은 “주량이 세고 술에 잘 취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며 “단지 알코올분해효소가 많을 뿐 간이 튼튼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유준현 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애주가들은 고농도 알코올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정신력과 행동적응을 통해 극복한다”며 “이같은 적응력은 주량과 함께 알코올성 간질환의 위험도 증가시키기 때문에 남보다 주량이 센 것을 자랑하거나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알코올분해효소가 많다고 해도 기준치 이상의 술을 마시면 알코올이 제대로 분해되지 않고 인체에 남게 된다. 체내에 남은 알코올은 혈액을 통해 인체 각 부위에 영향을 끼치는데 이로 인해 나타나는 소화장애, 구토, 메스꺼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등의 증상을 통틀어 숙취라고 한다. 알코올 성분이 위점막을 자극하면 미식거림이나 구토증상이, 뇌신경을 자극하면 두통이 발생한다. 또 알코올 분해과정에서 에너지원인 포도당이 소멸되기 때문에 저혈당 증상이나 무기력감 등이 나타난다.
과음 후에는 당분과 수분을 충분히 보충해 알코올 분해를 돕고 탈수현상을 막아야 한다. 물은 숙취의 원인인 아세트알데히드를 체외로 배출시키는 데 도움된다. 그러나 만성 소화불량이 있는 사람은 냉수나 차가운 음료를 너무 많이 마실 경우 위의 소화기능과 간의 알코올 분해 활동이 오히려 떨어질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또 일반 냉수보다는 전해질과 당분이 풍부한 꿀물, 과일주스, 스포츠이온음료 등을 마시는 게 더 효과적이다. 음주 전이나 음주 중 사탕 2~3개를 천천히 녹여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용준 원장은 “숙취를 해소하기 위한 해장음식으로는 자극이 적은 콩나물국이나 북어국, 조개국이 좋다”며 “지나치게 얼큰한 해장국, 자극적인 라면, 기름에 튀거나 볶은 음식, 인스턴트식품 등은 위와 간을 오히려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술이 빨리 깬다는 생각 때문에 습관적으로 구토를 하는 행위는 식도와 위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구토를 하면 위장장애가 일부 해소되면서 술이 깬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알코올은 95%가량이 위·십이지장에서 흡수되고 이내 30분 만에 소장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토한다고 해서 실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위산이 역류하면서 식도를 손상시킬 수 있다. 구토할 때 위액이나 피가 나오는 경우 위와 식도를 연결하는 점막이 찢어졌을 수 있기 때문에 바로 병원을 찾아 검사받는 게 좋다. 단 메스꺼움 때문에 저절로 구토가 나올 때에는 참지 말고 곧바로 토해야 한다. 구토를 계속 참으면 잘 때 토사물이 넘어와 기도가 막히고, 소화되지 않은 음식과 술로 복통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숙취를 최대한 줄이고 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술을 천천히 마셔야 한다. 소주 한 병을 30분 동안 마시는 게 소주 2병을 2시간 동안 마시는 것보다 해롭다. 술 마시는 속도를 줄일수록 뇌에 도달하는 알코올 양이 줄고 간이 제대로 알코올 성분을 해독시킬 수 있다. 또 잘 알려진대로 맥주처럼 도수가 약한 술부터 시작해 위스키나 양주 등 독한 술을 마시는 게 좋다. 위 점막은 어떤 자극을 가한 후 전보다 강한 자극을 주면 적응력을 통해 덜 손상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과음이 간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알코올성 지방간은 과음으로 발생하는 가장 흔한 질환으로 간내 지방합성이 촉진되고 정상적인 에너지 대사가 이뤄지지 않게 된다. 진행 정도에 따라 지방간만 끼어 있는 가벼운 단순지방간, 간세포 손상이 심하고 지속되는 지방간염, 복수나 황달을 동반하는 간경변증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알코올성 간염이나 간경변증으로 진행된 후에는 술을 끊어도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간경변증의 경우 4년 생존율이 50%에 불과하다.
최근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에너지폭탄주’는 간질환 위험을 더욱 높인다. 에너지음료에 함유된 다량의 카페인이 각성작용을 일으켜 알코올 섭취에 따른 신체 증상에 둔감하게 만들고 과음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또 이 음료에 든 탄산은 알코올 흡수를 가속화해 간과 뇌를 더욱 손상시킨다. 문일환 이대목동병원 간센터 교수는 10일 “에너지폭탄주는 알코올의 흡수 속도를 높여 빨리 취하게 만들지만 카페인 성분 탓에 울렁거림이나 졸림 등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며 “이 때문에 평소보다 더 많은 술을 마시게 되고 간질환의 위험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과음은 뇌에도 영향을 미쳐 사고력을 저하시키고 자제력을 잃게 한다. 보통 간은 흡수된 알코올의 90%를 처리한다. 그러나 간이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160g 이상의 알코올이 체내에 들어온 경우 나머지는 뇌에 도달한다. 혈중 알코올농도가 0.05%일 때에는 사고력, 논리력, 판단력 등이 둔화되고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게 된다. 음주운전 단속기준이기도 하다. 더 올라가 0.1%가 되면 운동부조화, 흥분, 균형유지 곤란, 언어구사 장애 등이 나타난다.
블랙아웃은 뇌세포에 알코올이 침투해 나타나는 뇌기능 마비현상이다. 혈중 알코올 농도 0.15% 정도부터 기억력 장애가 나타난다. 음주 이후 일정 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총괄적 블랙아웃과 부분적으로만 기억이 안나는 부분적 블랙아웃이 있다. 블랙아웃 현상이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생하면 뇌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초기에는 뇌가 손상되지 않고 회복되지만 필름 끊기는 일이 반복되면 뇌가 영구적인 손상을 입으며, 알코올성 치매로 발전할 수 있다.
이정권 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술을 매일 마시는 것을 피하고 1주일에 최소한 2~3일 정도는 금주해야 한다”며 “술 마실 때 안주를 충분히 먹는 먹어야 다음날 발생할 수 있는 영양장애를 예방하고 간에 주는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