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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건강
남편·시댁·자녀로부터의 상실감 … 찬장 속 술병 가득한 ‘키친드링커’
  • 정희원 기자
  • 등록 2013-10-18 17:34:19
  • 수정 2013-10-23 16: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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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울증 진행된 상태서 만성음주로 간경화·불임 초래 … 남편·가족 지지가 치료의 지름길

극 중 평소엔 완벽한 주부이지만 아들과의 불화,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알코올중독에 빠지게 된 브리 밴 드 캠프(마샤 크로스 분). 미국 ABC방송국 ‘위기의 주부들’ 캡처

50대 주부 안 모씨는 20대 초반에 남편과 결혼해 평탄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둘째 아이 출산 후 사업을 시작한 남편이 지방이나 외국에 나가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혼자 두 명의 아이를 돌보는 게 벅찼고 모든 결정을 남편 없이 혼자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두려움, 우울감, 불면증을 겪게 됐다. 남편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안 씨를 무시했고, 심지어 귀찮아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이후 문제는 더 심각해져 남편의 두 집 살림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 사실에 안 씨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이혼하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혼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좌절했다. 결국 그는 자녀양육에 몰두하게 됐다.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우울증은 깊어지고 삶의 전부였던 아이들이 커가면서 엄마의 존재가 점점 작아지자 극심한 소외감에 시달렸다. 시댁과 친정에서도 ‘남편이 돈을 잘 버는데 뭐가 문제냐’,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참아라’라는 반응으로 위로받을 곳조차 없었다.

불면증에 시달리기를 몇 년째, 주변 사람 중 한명이 ‘술을 마시면 도움이 된다’며 술병을 건넸다. 한 모금 들이켜 보니 늘 불안하고 우울했던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후 가족들이 모두 나간 시간에 숨겨놓은 술병을 꺼내 몰래 술을 마시는 게 습관이 됐다.
 
마시는 술의 양은 점점 늘어나고, 술로써 현실에서 도피하는 행동이 심해졌다. 심지어 가족들 앞에서 술을 마시거나, 집안일은 전혀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자 안 씨가 올인했던 자녀들조차 그를 집안의 ‘트러블메이커’로 여기는 눈치다.
안 씨는 서운한 마음에 지난날 원망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가족들은 술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원망하기만 할 뿐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 남편은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술을 마시게 됐는데’라는 억울함과 분노가 더욱 커지고 술을 다시 찾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안 씨는 이후 취중에 음식을 하겠다고 가스불을 켰다가 잠이 들어 큰 화재사고를 낼 뻔한 사건을 계기로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자녀에게도 외면당했다. 이후 자살시도까지 한 뒤 친정식구들이 문제점을 알고 장기 입원치료를 고려하는 중이다. 안 씨는 “제일 원망스러운 것도 가족이고, 미안한 것도 가족”이라고 말하며 여전히 만성우울증 등으로 힘들어하는 상황이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알코올중독’은 더 이상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급증하는 여성 알코올중독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남편과의 불화·자녀와의 충돌·시부모와의 갈등 등 가정 문제와 불면증, 의욕상실, 신경과민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남성이 바·호프집 등 공개적인 술집에서 사업상 또는 사교적인 만남을 통해 알코올중독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달리 여성은 대부분 숨어서 홀짝거리거나 주방의 찬장에 술을 숨겨 놓고 마시는 게 특징이다.
 
김성주 민주당 의원(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이 15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제출받은 ‘2010∼2012 알코올중독 진료청구 현황’에 따르면 2011년 4만3899명이었던 여성 알코올중독자는 2012년 5만4375명으로 23% 증가했다. 이는 같은 기간 남성이 16.9% 증가한 것과 비교해 크게 늘어난 수치다.
 
여성 알코올중독은 40대에서 가장 빈번했다. 알코올중독 진료청구 건수가 4만3703건에 달해 전체 여성 중 최근 3년간 가장 많았다. 이어 30대가 3만3183건, 50대가 3만941건, 20대가 1만3138건 등으로 뒤를 이었다. 김성주 의원은 “기존에는 남성들만의 문제로 생각됐던 알코올중독이 이제는 여성과 청소년들도 해당되는 문제가 되었다”며 “특히 여성들의 알코올중독은 태아와 아이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술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치명적이다. 여성은 알코올분해효소(ADH)가 남성의 약 25%에 불과해 남성보다 더 쉽게 취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체구도 작고, 체내 수분량보다 지방량이 많은 등 신체구조상으로도 알코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전용준 다사랑중앙병원 병원장은 “여성은 남성에 비해 신체 내 수분이 적은 대신 체지방이 높기 때문에 같은 체중의 남성과 동일한 양의 술을 마셔도 혈중 알코올 농도가 남자보다 높다”며 “알코올 흡수 속도는 빠르지만 해독은 더디게 이뤄져 알코올 영향이 오래 지속된다”고 말했다. 즉 여성은 술이 장기에 미치는 손상이 남성에 비해 더욱 클 뿐만 아니라 알코올 의존에 빠질 위험이 높고, 술로 인한 정신·심리적 손상 정도가 심해 알코올의존에 빠질 위험도 높다는 말이다.

이렇다보니 알코올성 간염이 남성보다 여성에서 더 높은 발생률을 보인다. 전 원장은 “남성에 비해 지방조직이 많아 간에 모인 알코올이 전신에 분포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배설도 느려 간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지는 게 여성 알코올성 간염 발생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이어 “여성은 월경주기에 따라 여성호르몬 분비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주량을 예측하기도, 조절하기도 힘들다”고 덧붙였다.
 
윤영환 부천진병원 원장은 “여성이 소주 한 병을 비우는 것은 남성이 소주 세 병을 비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며 “주부 알코올의존증 환자들은 보통 우울증을 겪으면서 술을 마시게 되는 반면 남성들은 술을 많이 마시다 우울증에 빠져 서로 대비된다”고 설명했다.
우울증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자제력을 잃기 쉽다. 이럴 경우 감정기복이 심해져 자해 또는 자살시도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감성적이므로 더욱 위험하다.
 
우리나라 여성 알코올중독 환자는 남성과는 달리 비도덕적이고 정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음주문화에 너그러운 것도 사실은 ‘남성 한정’이다. 여성 알코올중독 환자의 이혼율이 남성에 비해 높은 이유도 이를 뒷받침한다.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이 알코올중독에 걸린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남성 알코올중독 환자보다 더 냉대받게 된다. 남성 중독자에 비해 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전준환 부천진병원 사회복지사는 “여자의 술 마시는 행동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키친드링커’(Kitchen drinker)의 가족들은 치료를 권하기보다 가족 내에서 해결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 것 같다”며 “예컨대 술을 사지 못하도록 돈을 주지 않거나, 방에 자물쇠를 걸기도 하며, 심지어는 폭력을 사용하고, 환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는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통제 및 비위맞추기 식의 대처는 술문제를 악화시킬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이후 여성의 행동이 달라지지 않으면 ‘도와줘도 변할 기미가 없다’며 가족 구성원들도 분노·우울감을 느끼는 등 또 다른 ‘가족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사회적 시선에 수치심을 느껴 술 마시는 것을 스스로 숨기다보니 결국 알코올중독이 만성화된 상태에서 발견되는 게 대부분이다.
 
주부 알코올중독의 원인은 대부분 남편·시댁과의 갈등 때문을 꼽는다. 뿐만 아니라 ‘남편의 술 마시는 습관’도 적잖은 영향을 받는다.
윤 원장은 “남편이 평소 ‘주폭’(酒暴, 주취 상태 폭력)을 하거나 술을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본 아내는 스트레스를 같이 술로 풀어 맞대응하거나 함께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럴 경우 주부의 ‘가정을 책임져야 할 역할’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감추기에 급급한 가족이 많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병원치료를 받도록 만들어보지만 이미 만성화된 상태에서 입원하고, 결국 재발과정을 겪게 된다. 전 사회복지사는 “알코올 중독 치료는 대개 2~3번의 입·퇴원을 반복하며 발전적으로 좋아지는데 가족들은 단 한 번의 치료로 급격한 변화를 바란다”며 “경제적 부담까지 떠안게 되면서 결국 포기하는 경우도 적잖다”고 지적했다.
결국 악순환이 반복되고 이혼·별거 등의 형태로 나타나 가족해체가 이뤄진다. 이혼하지 않더라도 가족들은 환자를 무시하거나 비난하게 돼 환자는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잊기 위해 술을 더 마시게 되고, 결국 가족 모두가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술을 습관적으로 마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거나, 가족이 이를 캐치했다면 문제를 숨기지 말고 주변에 알린 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병이 진행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특히 여성 알코올중독 환자는 간질환, 우울증, 불안증, 폭식증 등이 동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중독 외에 신체·정신적 질환이 있는지 찾아내는 과정도 필요하다.
전용준 원장은 “이미 알코올중독을 앓고 있는 여성에게는 무엇보다 가족의 관심이 최고의 치료약”이라며 “알코올중독은 혼자서 극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생각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빨리 극복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윤 원장은 “임상에서 알코올중독을 겪는 주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점은 ‘돌아갈 곳이 사라지는 것’”이라며 “부부치료·가족치료는 많은 변화를 초래하는데, 환자의 낮아진 자존감을 극복하고 변화와 희망을 기대하는 시발점이 된다”고 조언했다.

TIP. 키친드링커 예방수칙
 
1. 우울하다고 술로 풀지 않는다. 취미를 개발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2. 임신 중 음주는 2세를 위해 단연코 중지한다.
3. 남편의 술 문제, 술로 풀지 않는다.
4. 혼자 있을 때 몰래 집안에서 술마시는 것을 피한다.
5. 남자와 같은 양으로 마시지 않는다. 여자는 빨리 취한다.
6. 술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폐해(예컨대 불임, 피부노화)를 생각해본다.
7. 술을 마시더라도 음주 전 식사는 꼭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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