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무서운 게 극단적 ‘에이즈 혐오’ …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질병, 생활태도 돌아봐야
누구나 원하는 정보에 쉽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시대가 되다보니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됐을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사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런 병적 심리 상태를 에이즈공포증(에이즈 포비아, AIDS Phobia)다. 에이즈 포비아는 공식적인 병명은 아니지만 대한에이즈예방협회는 성관계 후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하거나 본인이 에이즈에 걸린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로 지칭하고 있다.
에이즈는 과거 불치병으로 여겨졌지만 의학이 발달하면서 관리만 잘 해주면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만성질환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에이즈는 더럽고 문란한 병이며, 걸리는 순간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거나 수치스러운 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김현정 국립중앙의료원 정신건강의학교 교수는 “에이즈 포비아처럼 특정 질병에 걸리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은 공포증 가운데 기타 유형에 속한다”며 “불안증이 함께 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에이즈 포비아를 겪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심각한 증상들을 겪는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된다. 본인에게 나타나는 징후를 에이즈 탓으로 돌린다. 에이즈 질환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 HIV) 감염에 따른 다양한 증상이 본인의 증상과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하면 의심이 점점 늘어난다. 나중에는 일상생활조차 엉망이 된다.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실제로 몸이 아파지는 신체화장애(아무런 내과적 이상 없이 그릇된 생각이 전이돼 다양한 신체증상을 반복적으로 호소하는 질환)를 겪으며 히스테리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신 모씨(33)는 최근 컴퓨터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는 에이즈 포비아를 겪는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끊임없이 ‘새로 고침’을 누르며 새로운 글을 읽는다. 자신과 비슷한 증상을 겪었지만 별 문제가 없다는 사람의 글에는 안도하고, 그 반대 글을 보면 또다시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는 약 3년 전 동남아시아의 윤락업소를 다녀왔다. 하지만 다녀온 지역이 에이즈 고위험지역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접한 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피임기구(콘돔)는 사용했지만 영 찝찝한 마음에 에이즈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붉은 반점, 감기몸살, 설사, 림프절 부종 등 에이즈 증상에 대해 알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언급된 증상들이 본인에게 나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결국 집에서 끙끙 앓으며 식음을 전폐했다.
에이즈는 만약 감염됐다 생각되더라도 바로 결과를 알 수 없어 포비아를 겪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든다. 에이즈는 원인병원체인 HIV에 감염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면역체계가 무너져야 증상이 나타난다. HIV 항체가 형성되는 시기가 사람마다 달라 적어도 성 접촉 등 위험행동 후 3~4주는 지나야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포비아를 겪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이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온종일 에이즈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 씨는 겨우 용기를 내 성관계 후 6주 뒤 HIV 검사를 받았고 음성 판정을 받았다. 기쁜 마음에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려는데, ‘6주 검사는 의미가 없으며 적어도 12주는 돼야 정확한 결과가 나온다’는 글을 보고 그는 다시 좌절했다. 또 6주가 지나고 검사결과는 여전히 음성이었다. 그는 안도했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나는 에이즈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3년이 흐른 지금, 신 씨는 다시 국내 유사성행위업소를 방문했다. 그는 또다시 예전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진짜 에이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검사결과는 여전히 음성이었지만 신 씨는 ‘업소 여성의 몸 상태가 일반인과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에이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는 거의 두 달 가까이 매주 다른 병원에서 HIV항체 검사를 받고 있다. 한 비뇨기과 전문의는 신 씨에게 ‘직접 성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결과도 음성인데,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아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지만 신 씨는 그럴 생각이 없다.
에이즈 포비아는 주로 2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HIV 감염 검사 전부터 본인이 에이즈에 감염됐다고 생각하는 경우와 검사 후 이상이 없다는 판정이 나왔지만 검사 결과를 믿지 못하는 경우다. 신 씨는 두 가지가 동반된 케이스다.
김현정 교수는 “위험행위에 노출됐다면 검사기간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이 오지 않거나 불안감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며 “하지만 음성 결과 확인 후에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닥터쇼핑을 지속한다면 약물치료도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종의 환상(판타지)에 빠진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에이즈 자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더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며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면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이럴 경우 불안증 계통으로 보고 접근해 치료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며 “일반적인 포비아 치료법은 싫어하는 대상에 계속 노출시키는 방법(노출요법)을 이용하는데, 에이즈 포비아의 경우에는 질병에 대해 인터넷이 아닌 학술적인 부분에서 공부하도록 하고, 필요 시 약물치료와 행동인지치료 병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본인이 정도에서 벗어난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할 것”이라며 “이런 현상은 뇌내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져서 일어나는 증상으로 볼 수 있고, 이를 개선해주는 약물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 씨처럼 검사 결과가 나와도 잘 믿지 못하는 것에는 HIV바이러스의 항체생성시기에 따른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통상 HIV 항체는 2~12주에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체 형성 시기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위험에 노출된 후 12주 정도면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항체가 형성된다.
따라서 위험행동 이후 3~4주차부터 검사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반대로 12주 이상부터 정확한 결과를 보장한다는 사람이 있다. 박문수 선릉탑비뇨기과 원장은 “HIV항체는 2주에서 형성돼 4주째에 절정을 이루고, 그 뒤 천천히 증가한다”며 “따라서 4주 이후에 검사를 할수록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은 맞지만 그 차이는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경우 6개월을 권장한다”며 “그렇다고 위험행동 후 4주차에 검사한 결과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임신·매독·자가면역질환·신부전증·독감·결핵에 감염됐거나 스테로이드 계통의 약물을 복용한 경우에는 검사 결과가 ‘가짜 양성(위양성)’으로 나올 수 있다. 따라서 1차 검사 후에는 반드시 최종검사를 통해 확인하는 게 좋다.
박 원장은 “국내서 막상 위험행동을 한 케이스는 그리 많지 않다”며 “위험행동은 동성연애를 하거나, 항문성교를 하거나, 주사바늘을 공유하거나, 외국에서 성관계를 가진 경우로 반드시 검사받기를 권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환자가 꽤 있다”며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득해도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정신과 상담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오명돈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진단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현재 에이즈 검사는 감염된 사람을 모두 찾아낼 수 있는 수준”이라며 “예외가 있다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지 3~6주, 아주 드물게는 6개월이 지나지 않아 항체형성이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체적으로 에이즈에 걸릴 만한 위험행동을 한 날로부터 3~6주가 지나 검사했는데 음성으로 판정받은 사람은 에이즈 감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는 일반적으로 8주 정도가 되면 HIV항체가 형성되지만 간혹 항체형성이 늦어진 사람이 있어 이를 모두 고려한 시점인 12주까지를 항체 미검출기(Window period)로 간주하고 12주 이후를 항체검사의 적정시점(확진시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 CDC, 국내 의학자, 한국 질병관리본부의 항체 측정 적정기에 대한 의견이 달라짐에 따라 에이즈 포비아들은 항체 음성검사를 놓고 분분한 나름의 해석을 내놓으며 불안해하기 일쑤다.
최근엔 혈액을 채취한 뒤 효소면역측정법(ELISA)으로 HIV-1, HIV-2에 대한 항체를 검출한다. 신속 검사(Rapid assay)도 가능하다. 이 검사법은 개발도상국이나 HIV 감염이 만연한 국가에서 저렴하고 신속하게(2~10분 내) 결과를 알 수 있도록 개발됐다. 구강점막을 채취해 결과를 확인하는 오라퀵 검사도 그 중 하나다. 최근에는 4세대 중합효소연쇄반응(PCR) 검사법이 나와 항체와 항원을 동시에 색출할 수 있게 됐다.
자신이 에이즈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단지 ‘죽을지도 몰라서’에 그치는 게 아니다. 에이즈는 국내서 ‘절대 걸려서는 안 될 병’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앞으로 에이즈 환자도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이 어쩌면 에이즈 포비아에게 더 고통스러운 이미지로 다가갈 수 있다. 에이즈 자체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 때문에 감염 사실이 드러나면 직장에서 쫓겨나고, 친구도 등을 돌리고, 가족에게마저 외면당하는 게 현실이다.
김 교수는 “아프리카의 경우 에이즈 환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보다 에이즈에 대한 거부감이 적을 것”이라며 “우리나라의 경우 에이즈라면 특이한 성행위를 떠올리며, 감염인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여전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성생활에 관한 한 보수적인 면이 있어 에이즈를 ‘성행위를 과도하게, 혹은 특이하게 하다 받은 벌’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며 “환자들을 극단으로 내몰 만큼 혐오감과 편견이 심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에이즈는 결코 혐오할 만큼 문제가 되는 병은 아니고 정액·질 분비물·혈액으로 감염되는 게 일반적이고 수혈이나 강제적인 성행위, 낯선 사람과의 섹스 등이 아니라면 본인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병”이라며 “포비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괴롭겠지만 자신의 생활태도를 돌아볼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HIV 감염이 아니라는 판정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증상이 6개월 이상 계속된다면 에이즈 포비아 증상을 의심할 수 있다. 해당 질환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정도로 발전했다면 반드시 전문가를 찾아가야 한다. 김 교수는 “에이즈 포비아의 답답한 마음은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며 “오히려 이상한 댓글에 상처만 받을 수 있어 전문가를 찾아 ‘합리적인 대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