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집을 가졌지만 대출원리금 갚기가 버겁고 심지어 빚만 가득 안고 경매에 내놔야 하는 처지에 몰린 사람을 일컬어 하우스푸어(house poor)라고 한다. 매년 올라가는 전세값에 허리가 휘는 중산층 바로 아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렌트푸어(rent poor)다. 뼈 빠지게 일하지만 심지어 야간대리운전이나 ‘회사 몰래 부업’ 등 더블잡, 트리플잡을 갖고 분주하게 뛰지만 가난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은 워킹푸어(working poor)다.
자녀의 교육과 결혼에 빠듯한 삶을 사느라 노년에 쓸 돈이 없는 은퇴자의 가난은 리타이어푸어(retire poor)이고, 해외유학·고액과외·사립유치원 등에 돈을 쏟아붓어 곤궁한 사람이 에듀푸어(edu poor)이다. 회사 때려 치고 퇴직금으로 또는 돈을 빌려서 사업을 벌였는데 장사가 안돼 망하게 생긴 영세 자영업자가는 소호푸어(soho poor), 등록금 마련이 어려운 대학생은 스터디푸어(study poor), 호화혼수로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도 돈이 바닥난 신혼부부가 허니문푸어(honeymoon poor)다. 아기 양육비 부담이 커 징징대는 부모는 베이비푸어(baby poor)다.
요즘 지속적으로 양산되는 신조어 그룹 중 하나가 이같은 ‘푸어 시리즈’다. 푸어 시리즈에 함몰돼 스스로를 불행하고 억울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푸어 신드롬’이다. 다들 가난 타령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데에는 자기책임이 없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하우스푸어들은 부동산 경기 상승에, 이 때 아니면 평생 집을 갖지 못할 것 같아 무리하게 돈을 질러 집을 샀다. 건설사는 신도시에 아파트를 마구 지어대고, 금융사는 신나게 집 살 돈을 빌려줘 고리이자를 받아내고, 정부는 경기부양한다며 이에 동조했다.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은 하우스푸어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다. 얼핏 보기에 무리한 주택구입을 방조한 당·정이 하우스푸어를 구제할 방법을 찾아주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된다. 새누리당은 나랏돈으로 하우스푸어의 집을 사주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빚을 갚고 다시 집을 되가져가게 하는 ‘보유주택 지분매입제도’ 등을 구상하고 대선공약에 반영하려 하고 있다.
그래도 집을 소유한 사람은 무주택자보다도 나을텐데 표밭인 중산층 또는 중산층 바로 아래 계층의 마음을 사려고 이런 정책을 내놓는 게 합당할까. 집없는 사람들이 보기엔 화가 나고 소외감이 깊어질 것이다. 경제행위는 어디까지나 자기 책임하에 이뤄지는데 하우스푸어를 위해 이런 정책적 지원이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허례허식에 빠져 전혀 경제형편이 안되는데도 호텔에서 결혼하고, 서울 시내에서 최소 20평대가 넘는 아파트를 전세로 구하고, 명품 옷과 핸드백·다이아몬드 반지를 필수 혼수로 장만하는 사람은 또 어떤가. 이런 신혼부부 중에는 인생2막을 시작하기도 전에 돈이 없어 골골하고, 심지어 경제적 문제 때문에 이혼까지 고려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학교 동문은 물론이고 직장 동료나 사회에서 만난 이런저런 사람한테 돈을 빌려 아이를 미국이나 중국, 유럽, 호주 등으로 유학 보내고 정작 자신은 월급날이 돼도 통장에 잔고가 거의 없고 돈 빌려준 사람으로부터 천덕꾸러기가 된 사람이 적잖다.
어렸을 적 필자의 어머니는 옛날 살던 친정마을에 한 엄마가 자식을 학교에 보내려 고무다라이(대야)를 훔쳐 팔아서 만날 동네사람한테 두드려맞고 살았는데 그 아들은 나중에 그 어렵다던 사시에 합격해 한을 풀었다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이 정도의 에듀푸어라면 수긍이 가고 성공사례라 생각되는데 왠지 지금의 분수 넘치는 해외유학 열풍은 씁쓸하다. 교육도 자기 역량에 맞게 시켜야지, 감당못할 빚을 내가며 시켜야 하는가. 자녀의 ‘스펙’을 올린다고 더 좋은 직장에 간다는,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베이비푸어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모들이 애들을 호사스럽게 키우니까 아이들이 나약하고 버릇 없게 자라며, 돈이 없어 많은 자녀를 갖지도 못한다. 김재정 전 대한의사협회장은 저출산 극복과 산부인과 경영난 해소를 위해 종종 ‘막 키우기 운동’을 전개하자고 했는데 일리 있는 말이다.
다들 더 큰 집, 더 좋은 직장, 더 이름난 대학, 보다 윤기나는 육아, 더 안정된 노후를 위해 뛰지만 그럴수록 마음의 가난, 상대적 가난은 커진다. 행복에 이르는 공식은 욕망에 맞게 역량을 키우거나, 욕심을 줄이고 작은 것에 만족하거나 둘 중 하나다. 많은 전문가들은 후자가 더 실행하기 편한 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들 ‘축소지향적’으로 살아 활기없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부(富)라는 게 어느 정도 채워지면 그 이상의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민주화는 덜 되고 의식주가 충분하진 못했지만, 희망이 넘치고 인심만은 훈훈했던 1970년대 중반~1980년대 후반이 종종 그리워진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신드롬이 불고, 2002년 한 신용카드회사가 “여러분, 여러분…모두 부자 되세요. 꼭이요”라는 광고를 내보내면서 사람들은 왠지 더 돈맛을 알게 됐고 오늘날 ‘가난 타령’(푸어 신드롬)을 부끄럽지도 않게 내뱉는 시대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푸어 신드롬은 다시 말해 ‘억울 시리즈’,‘피해의식 시리즈’,‘자기한탄의 극치’다. 푸어 신드롬을 토로하는 사람은 빚은 졌으되 집, 자녀, 배우자, 미래의 희망 등을 갖고 있다. 이런 것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에 비하면 행복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푸어 신드롬에 빠진 것을 모두 사회탓, 남탓, 정권탓으로 돌리면 못난 사람이기 쉽다. 지금 가난하면 허리띠를 졸라매 조그만 목돈이라도 마련하려 안간힘을 써야 한다. 분수에 넘치는 소비는 줄여야 한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경제는 스스로 꾸려나가야 한다.
괜찮은 일자리 부족, 물가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소득으로 경제양극화는 점점 심화돼가고 있다. 심지어 결혼적령기의 젊은이들은 돈 없어서 결혼도 못하고,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이런 비극의 중심에는 획일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이분법적 사고가 강할수록, 모든 것을 쉽게 단정지으려는 사고방식이나 선입견이 완고할수록, 곧바로 결론내려는 조급증이 활개칠수록, 사물을 과대 또는 과소평가하는 성향이 깊을수록, 불행이 자신에게만 찾아온다는 ‘머피의 법칙’에 빠질수록 스스로를 비하하기 쉽고 푸어신드롬에서 헤어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긍정적인 사고와 자기정체성, 절제심이 푸어신드롬을 극복하는 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