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구 신도림동에 사는 주부 김모 씨(57)는 1년에 한번씩 받는 국가건강검진 암검진 결과표를 받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검사 결과 ‘AFP’ 수치가 높으니 소화기내과 진료를 받으라는 소견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AFP는 간암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암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그는 극도의 우울감에 빠졌지만 병원에 가보자는 가족들의 설득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대학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간 일부에 염증이 생겼을 뿐 암은 아닌 것으로 확인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2년째 한국인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암은 빨리 진단할수록 생존율이 급격히 상승한다.
암종별로 다르지만 가장 확실한 진단 방법은 조직검사다. 이 검사는 길고 가느다란 침을 찔러 넣거나(유방암·전립선암·골수암·간암·폐암), 내시경기구를 삽입해(위암·대장암·폐암) 암이 의심되는 부위의 조직을 떼어낸 뒤 현미경으로 관찰해 암 여부를 판단한다. 하지만 조직검사는 바늘을 찔러 넣는 침습적 방법이라 환자의 고통이나 두려움이 큰 편이고, 검사에 오랜 시간이 소요돼 모든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것은 무리다.
이로 인해 의료기관에선 검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체 수검자 중 암 확률이 높은 사람만 선별한 뒤 조직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때 암 확률이 높은 환자를 선별하는 게 종양표지자검사다. 종양표지자검사는 혈액검사를 통해 몸 속 종양에 의해 생성된 물질인 종양표지자 수치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혈중 표지자 농도로 종양의 존재를 가늠해볼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종양표지자가 특정 암에만 반응하는 게아니라 다른 종류의 암이나 암이 아닌 질환에도 수치가 증가할 수 있어 검사 자체의 민감도와 특이도는 낮은 편이다. 실제로 종양표지자 수치가 정상보다 높게 나온 사람 100명 중 실제로 암에 걸린 사람은 5명 미만에 그친다. 이로 인해 의학계는 암 확진을 위해 종양표지자검사 외에 자기공명영상(MRI), 컴퓨터단층촬영(CT), 조직검사 등을 병행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즉 종양표지자 검사 수치가 높게 나왔다고 해서 크게 상심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검사 수치가 정상이라도 무조건 안심하지 말고 추가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다. 30여개의 종양표지자 중 실제 임상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은 AFP, PSA, CA125, CEA, CA19-9 등이다.
AFP(α-fetoprotein, 알파태아단백)
태아의 간에서 생성되는 태아혈청단백으로 간암 종양표지자검사 지표로 활용된다. 태아 발생 초기에 생성돼 출생 후 8~10개월이 지나면 점차 감소하며 정상 수치는 20ng/mL 이하이다. 정상보다 수치가 높으면 간암, 간경변, 간염 등을 의심해 볼 수 있다. AFP 종양표지자검사는 복부초음파검사와 함께 간암 선별검사로 활용된다.
보통 간암 환자 10명 중 9명에서 이 수치의 증가가 관찰된다. AFP 수치가 400ng/mL 이상까지 치솟으면 간암일 가능성이 95% 이상이다. 또 암 병기가 진행되거나, 재발 또는 전이될 경우 검사 수치가 상승하고 반대로 치료하면 낮아져 간암 치료 경과를 살피는 데에도 유용하다. 하지만 간암 중 소간세포암종은 약 40%, 간세포암은 약 25%에서 AFP 수치가 정상이고 B형간염이나 C형간염인 경우에도 수치가 100ng/mL 이상 올라갈 수 있어 단독검사로는 간암 조기진단의 효용성이 낮은 편이다.
정숙향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간암은 다른 암에 비해 위험인자가 확실한 편”이라며 “B·C형 간염바이러스, 간경변증 등 위험인자를 가진 사람은 6개월 간격으로 간암 종양표지자검사와 복부초음파검사 등 선별검사를 받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PSA(Prostate Specific Antigen, 전립선특이항원)
전립선 상피세포에서 합성돼 생성되는 분해효소로 정상 수치는 0~3ng/mL이다. 전립선 조직에 문제가 있으면 항원 수치가 높아진다. 수치가 3ng/mL 이상이면 전립선암을 의심해볼 수 있다.
PSA 수치가 지속적으로 높거나 상승 속도가 빠른 경우 전립선암 가능성이 높다. PSA 수치가 4~10이면 4명 중 1명, 10~20이면 2명 중 1명꼴로 전립선암이 발견된다. 하지만 PSA는 전립선비대증이나 전립선염 등 다른 전립선질환으로도 증가할 수 있어 전립선암을 확진하려면 직장수지검사·전립선초음파·조직검사를 병행해야 한다.
PSA 수치가 크게 높지 않으면 직장수지검사와 초음파검사를 먼저 실시한 뒤 최종적으로 조직검사에 들어간다. 전립선 문제 외에 성관계 사정 후 48시간 이내이거나, 자전거를 탔거나, 방광경검사를 받았거나, 테스토스테론 같은 호르몬제를 복용한 경우에도 PSA 수치가 높아질 수 있다. 반대로 비만이거나 아스피린을 복용한 경우 수치가 낮아진다. 즉 검사 전에는 PSA 수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을 피해야 한다. 이밖에 전립선의 부피가 클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PSA 수치가 상승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비뇨의학계에선 40대 이상 남성이라면 증상이 없더라도 1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도록 권고하고 있다. 최근엔 PSA 수치가 정상 범위 내에서 높을수록 심혈관질환 위험이 감소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관련 추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CA125(cancer antigen 125, 암 항원 125)
당단백질로 분류되는 뮤신(mucin) 구조의 항원으로 질식초음파검사와 함께 난소암·자궁내막암 선별검사로 활용된다. 정상 수치는 0~35μg/mL이다. 진행된 난소암 환자의 90% 이상에서 CA125가 정상 수치 이상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이 종양표지자는 정상인의 1~2%에서도 상승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암 외에 자궁근종, 자궁선근증, 자궁내막증, 양성종양, 생리, 전신염증, 췌장암, 폐암, 유방암, 대장암, 위암 등 여러 원인에 의해 증가할 수 있어 암 진단 유용성은 높지 않다.
다만 부인암 가족력이 있는 고위험군이나 폐경 후 여성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난소암은 초기에 증상이 없어 암세포가 골반 밖으로 전이된 3기에 진단되는 경우가 많다. CA125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고 수치가 정상치보다 높을 경우 골반초음파와 골반CT를 받으면 증상이 없는 난소암을 조기에 발견하는 데 효과적이다. 특히 직계가족 중 난소암 환자가 2명 이상이거나, 가족 중 대장암·자궁내막암·난소암 등이 다발적으로 발생한 사례가 있으면 정기적으로 CA125 종양표지자검사를 받는 게 좋다.
CEA(carcinoembryonic antigen, 암태아성항원)
당단백질의 한 종류로 위장관암 진단에 사용된다. 정상 수치는 5ng/mL 이하이며 10~20ng/mL는 양성질환, 20ng/mL 이상은 악성종양을 의심해볼 수 있다. 처음엔 대장암에서만 수치가 올라가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후 폐암·위암·췌장암·담도암 등 대부분의 암과 간경변, 갑상선기능저하증, 신부전, 류마티스관절염 등에서도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 선별검사로서의 의미는 적은 편이다.
다만 대장암의 경우 진단 당시 CEA 수치가 높을수록 암이 진행된 경우가 많아 병기와 예후를 가늠해보는 지표가 될 수 있다. 또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CEA가 1~2ng/mL 정도 높게 나올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또 CEA는 간에서 대사되므로 간으로 전이된 암이나, 황달이 생기는 진행성 암을 진단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CA19-9(carbohydrate antigen 19-9, 탄수화물 항원 19-9)
당지질의 일종으로 루이스(Lewis) 혈액형 항원이 변형된 것이다. 정상 수치는 0~37U/mL이다. 췌장암에 가장 특징적으로 반응하지만 담도암, 담낭암, 담관암, 위암, 간암, 대장암 등 다른 소화기암에서도 수치가 높게 나올 수 있어 위·대장내시경과 복부CT검사를 병행해야 한다. 췌장염, 위궤양, 궤양성 대장염 같은 양성질환에서도 증가해 단독검사로서 유용성은 다른 종양표지자보다 더 낮은 편이다.
또 췌장암이나 담도암은 암세포가 있어도 수치가 상승하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CA19-9 수치가 높을수록 예후가 악화된다는 연구결과도 보고됐다. 치료 후 수치가 다시 상승하면 재발을 의심해볼 수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수치가 일시적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실제로 건강검진 결과 CA19-9 수치가 높은 사람 중 대부분은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거나, 가벼운 양성질환만 확진된다.
이미경 중앙대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이상적인 종양표지자는 실제 암이 없을 때 ‘없음’으로 검사해내는 ‘특이도(진음성률, specificity)’와 암이 있는 사람을 질환자로 판별하는 ‘민감도(진양성률, sensitivity)’가 높아야 하지만 AFP나 PSA를 제외하면 선별검사로서의 유용성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라며 “암을 정확히 진단하려면 진찰소견, 조직검사, 영상의학적 검사 등을 적절하게 병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종양표지자 수치는 암을 확진하진 못하지만 암이 얼마나 멀리 퍼져 있는지, 병기가 어느 정도인지, 치료 후 예후는 어떤지 등을 가늠하고 그에 맞는 치료전략을 짜는 데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