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은 세계 자살예방의 날이다. WHO와 국제 자살예방협회(IASP)가 2003년 전 세계에 생명의 소중함과 국가적·사회적으로 증가되고 있는 자살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제정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고, 국내 사망원인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목숨을 끊는다. 시간당 1.5명, 하루 평균 38명이 자살한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자료에 따르면, 2019년도 한 달 평균 자살한 사망자 수는 1,150명, 연간 1만 3,799명이 사망했다.
OECD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도 여전히 한국이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10만 명당 24.6명이 자살로 사망한다. OECD 평균 사망률(11.0명)보다 2배나 넘는 수치다. 우리나라 다음으로 △리투아니아(21.6명) △슬로베니아(16.5명) △벨기에(15.9명) △일본(14.7명) △미국(14.5명) 순으로 자살률이 높다.
대부분 정신건강문제(34.7%)나 경제생활문제(26.7%)가 주요 자살 원인이다. 육체적 질병문제(18.8%), 가정문제(8.0%), 직장이나 업무문제(4.5%) 등으로도 자살을 택했다. 정신질환자는 8.6배, 만성질환자는 2.6배나 자살 사망 발생률이 높다. 우울장애나, 수면장애, 불안장애에서 자살률이 높아, 이 질환자는 특히 더 주의해야 한다.
이강준 인제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울증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에 몰입하는 왜곡된 인지를 갖게 한다”며 “자신을 무능하고 열등하며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 자기비하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자살 생각을 들게 만든다”고 말했다.
또 이강준 교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결핍되면 충동조절이 안되어 자살위험성이 높아질 수 있다”며 “심리적인 원인도 중요하지만, 생물학적인 원인도 간과하지 말고 약물학적인 치료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죽고 싶어” “내가 없는 게 낫겠어” 표현이 ‘자살 징후’
“죽고 싶다”는 말을 평소와 다르게 자주하면 자살 징후일 수 있다. “더 이상 사는 것이 의미가 없어”, “유일한 해결방법은 내가 죽는 거야”와 같은 말도 위험하다. “나는 이제 가망이 없어”와 같은 절망감을 표현하기도 하고 “불안하고 초조해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와 같이 불안초조증을 심하게 나타내기도 한다. 또 “내가 없어지는 것이 훨씬 낫겠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와 같은 자기비하도 위험한 자살 징후다.
이상 행동 징후도 보인다. △평소 아끼던 물건을 주변 사람에게 나눠 준다 △다른 사람 몰래 약을 사 모은다 △위험한 물건을 감춘다 △표정이 없이 우울증상을 보인다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단절하거나 대화를 회피하는 증상도 자살 징후일 수 있다.
이강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오랫동안 침울하던 사람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갑자기 평화스럽게 보이거나 즐거워 보이는 등 태도가 변하는 행동도 위험한 징후일 수 있다”며 “자살을 결정하면 오히려 차분해질 수 있어 한번 더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경청·공감’ 자살예방 도움...‘상담·약물 치료’ 필요
자살 징후를 보일 때 논쟁이나 충고, 훈계는 피해야 한다. “자살 같은 생각은 하지 말아라”, “네 부모님은 생각 안 하니?” 같은 말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악화시킬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살징후를 보이는 사람 말에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이 자살 예방에 도움 된다. 듣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자살계획에 대한 정보를 알 수도 있다. 얼마나 위기에 처해있는지도 파악해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강준 교수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얘기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며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자살 예방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살 예방을 위해선 평소에 불안과 우울감을 줄이고, 잠을 푹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우울한 기분이 들면 운동, 산책, 일기쓰기, 명상 등이 도움이 된다. 되도록 혼자 있는 시간은 줄인다. 속에 담아둔 힘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도 도움이 된다. 불안 우울감이 계속되면 적극적으로 상담이나 약물치료를 받는 게 좋다. 만약 자살 위기가 닥친 위급한 상황이라면 지역에서 운영하는 ‘자살예방센터’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강준 교수는 “자살은 우울감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충동으로도 유발되기 때문에, 기분과 충동이 잘 조절되지 않고 괴롭고 힘들다면 혼자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구하거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와서 상담하고 약물치료를 받는 것을 권유한다”며 “심리적인 스트레스, 성격, 주변 환경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이유로도 자살사고가 나타날 수 있음므로 원인을 파악해서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신 건강 신경쓰면 정신질환자 취급하는 세태도 원인한국인은 신체 건강을 꼼꼼히 챙기는 것에 비해 스스로의 정신 건강에는 무관심하다. 스트레스는 상담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개선된다. 현재 대부분의 보건소가 스트레스 상담실을 운영하기 때문에 굳이 정신과를 찾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활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 강남구 정신보건센터의 스트레스상담실 이용자는 방문·전화·온라인을 합쳐 하루 평균 6~7명에 그친다. 1회성이 아닌 정기적인 상담을 받는 사람은 이 중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불안정한 정신 건강 상태=정신병'이라는 잘못된 등식을 고집하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를 키운다.
외상후격분장애란 해고·이혼·파산·펀드 손실·가까운 이의 사망·불치병 진단 등 충격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감정을 3개월 이상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다가 결국 방화 자살 폭력 등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증후군이다. 외상후격분장애는 무엇이 원인인지 확실하지 않은 화병(火病)과 달리, 뚜렷한 원인이 있다.
이 교수는 "토지보상비 문제로 속을 끓이다가 숭례문에 불을 지른 범인이 대표적 사례"라며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으며 이렇게 발생하는 사건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에 사회적인 차원에서 예방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가상(假想)의 화 다스려서 정신 건강 유지하는 법 익혀야하지만 국민의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은 아직 부족하다. 홍진표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는 "이런 실정에서는 현실적으로 각자 자신의 정신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이어 "산에 올라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억울한 심정을 글로 써 보면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는 데 도움된다"고 말했다.
스트레스를 담아두지 말고 술자리에서 원인 제공자의 흉을 보거나 노래방에서 감정을 터뜨리는 것도 임시방편이 될 수 있다.스스로 화를 다스리기 힘들면 인지행동요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채정호 교수는 "상담하는 의사가 다양한 부당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의응답을 하는 방법을 쓴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본인이 회사에 많은 공을 세웠는데 보상은 다른 사람한테 돌아간 경우, 타인의 과실로 교통사고가 나서 가족 중 누군가가 사망한 경우 등을 상상한 다음 가상(假想)의 화를 다스려 봄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을 슬기롭게 처리하는 방법을 미리 배워두는 것이다.
자살 시도자 중 20%가 90년대생 20대 여성들
90년대생이 온다더니, 90년대생 여성은 자살율이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응급의료기관 66곳에 실려온 2만2572명의 자살 시도자 가운데 20%(4607명) 정도가 1990년대생인 20대 여성이었다. 모든 연령과 성별을 비교해 가장 높은 수치다. 불과 4년 전인 2016년까지만 해도 전체 자살 시도자 중 20대 여성 비율은 9.8%였다.
국가 통계상으로도 이 같은 추세가 나타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자살률은 2017년 11.4%에서 2018년 13.2%, 2019년에는 16.6%로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같은 기간 남성의 자살률이 20.8%, 21.5%, 21.6%로 여성보다 높지만, 증가 폭에 큰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전문가들은 90년대생 여성이 극단적 선택에 노출된 이유에 대해 경험과 현실의 차이를 꼽는다. 정혜주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는 “OECD 국가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여성의 교육 수준이나 건강 등은 최고 수준으로 나온다. 그런데 취업률이나 임금 등에서는 여전히 낮다.
과거 세대 여성이 가정과 육아를 중시했던 것과는 달리 90년대생은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아가도록 가치관이 형성됐지만 막상 사회에 진출하면 일자리나 승진 등에서 여전히 좌절을 겪는 점 등이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