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어릴 때 부모님의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한약을 복용해 본 경험이 있다. 본래 한약은 쓴맛이 강해 아이들의 ‘기피 대상 1호’였지만 최근엔 아이들이 먹기 쉽게 맛과 향을 첨가한 제품도 출시돼 있다.
아이에게 한약을 먹이는 이유도 조금 바뀌었다. 과거엔 아이의 성장발육 촉진 등 ‘몸보신’이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요즘엔 한약을 대체할 만한 건강기능식품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몸 보신보다는 알레르기비염, 천식, 아토피피부염 등 난치성 질환 증상을 개선하는 ‘치료’ 용도로 복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항생제 오·남용으로 인한 슈퍼박테리아 문제가 부각되면서 감기 등 호흡기질환 치료를 위해 아이에게 보약을 먹이는 부모가 증가하는 추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2017년 유소아 급성 중이염 항생제 적정성 평가’에 따르면 상반기에 전국 의료기관에서 유소아 급성 중이염에 항생제를 처방한 비율은 82.3%로 집계됐다. 네덜란드·덴마크 등 유럽에선 급성 중이염에 대한 항생제 처방률이 40~70%인 것에 비하면 꽤 높은 편이다.
한의학계는 유·소아나 성장기 어린이의 성장 발육을 방해하는 허약증의 원인으로 호흡기질환이나 이비인후과질환을 지목한다. 이를 한약으로 치료하면 장기적으로 키가 크고, 몸이 튼튼해지며, 각종 질병의 발생 위험을 낮추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예컨대 감기에 자주 걸리거나, 비염·축농증을 달고 사는 아이는 또래보다 키 성장 속도가 느리다는 게 통계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한약으로 이들 증상을 완화해 일상생활에 불편을 줄여주면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와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감소해 자연히 키가 크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의사들은 주장한다.
이웃인 일본은 전세계에서 한약이 가장 대중화된 국가다. 감기, 중이염, 축농증 등 상기도감염증 치료의 80%가 한약 처방으로 이뤄진다. 어린이와 성인의 독감 치료에도 활용되고 있다. 2008년 일본 동양의학회의 연구결과 고열이 동반된 인플루엔자바이러스 확진 환자 18명에게 한약인 ‘은교산’을 1일 3회 투여한 결과 16명은 24시간 이내에, 나머지 2명은 각각 48시간과 72시간 이내에 체온이 37.4도 이하로 떨어지고 1주일 동안 재발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은교산은 금은화(인동덩굴 꽃봉오리)·박하·길경(도라지뿌리)·죽엽(왕대나무 잎)·형개(꿀풀과 식물)·감초·연교(개나리열매)·대두황권(갯완두 새싹) 등 약재를 배합해 만든 한약으로 기침, 오한, 인후통, 두통 개선에 사용된다.
한약은 어린이 단골질환인 부비동염(축농증)이나 알레르기비염 완화에도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2016년 발표된 최인화·김민희 강동경희대한방병원 한방이비인후과 교수팀의 연구에서 기존 양방치료에 반응하지 않던 5~8세 만성 부비동염 소아 4명과 성인 1명을 대상으로 형개연교탕을 두 달 간 처방한 결과 증상이 완전히 소실됐다.
형개연교탕은 형개·연교·방풍·당귀·천궁·백작약(하얀함박꽃 뿌리)·시호(산형과 시호 뿌리)·지각(탱자·귤 열매를 반으로 가른 것)·황금(꿀풀과 속썩은풀 뿌리)·치자·백지(산형과 구릿대 뿌리)·길경 등 한약재를 달여 만든다.
한의학에선 감기엔 은교산(인후염 등으로 목이 깔깔한 초기감기)·갈근탕(몸살감기)·소청룡탕(코감기)·삼소음(풍한에 노출된 기침감기), 축농증과 중이염엔 형개연교탕·방풍통성산, 비염엔 형개연교탕·소청룡탕·보중익기탕 등을 처방하고 있다. 또 사상체질로 나눠 소음인은 천궁계지탕·곽향정기산·향소산, 태음인은 마황발표탕·갈근해기탕, 소양인은 형방폐독산 등을 처방하기도 한다.
김민희 교수는 “한약을 먹는다고 해서 무조건 키가 크거나 건강한 체질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며 “대신 아이의 체질과 몸 상태를 파악해 습열이나 몸속 노폐물 등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을 제거하고, 영양이나 기운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한약은 몇 살 때부터 먹이면 될까. 한의사들은 한약을 처음 먹이기 적당한 시기를 생후 6개월 이후로 보고 있다. 생후 6개월 이후엔 부모로부터 받은 면역력이 떨어지고 외부활동이 많아지면서 바이러스나 세균 등에 노출되기 쉬워 면역증진과 오장육부 기능 활성화에 도움되는 한약이 효과적이라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어릴수록 소화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약성이 강하지 않은 부드러운 약재 위주로 배합해 한약을 처방한다”며 “안전성을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처 인증을 받은 우수의약품제조관리기준(GMP) 약재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아무리 좋은 한약이라도 복용 전 한의사와 상담해 아이의 체질에 맞는 한약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의 연령에 따라 한약 복용량이 조금씩 차이난다. 보통 한 살 미만은 5분의 1첩, 1~2살은 4분의 1첩, 3~4살은 3분의 1첩, 5~6살은 2분의 1첩이 적당하며 7살 이후부터는 성인과 같이 한 첩을 모두 복용해도 무방하다.
한의사들은 한약을 먹으면 살이 찌는 것은 낭설이라고 강조한다. 한약은 주로 약용식물의 전초·잎·뿌리·뿌리껍질·꽃잎 등이라 한 첩 당 평균 칼로리는 30~50kcal 정도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다만 한약으로 인해 허약했던 소화기계가 강화되고 기혈순환이 촉진되면 식욕이 왕성해지면서 전반적인 음식 섭취량이 늘어 살이 찔 수 있다. 또 생약재에 들어 있는 미량의 천연 스테로이드 성분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얼굴이 통통해지고 전반적으로 비만해지는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고칼로리인 몸보신 음식과 한약을 혼동하는 것도 ‘한약 비만 유발설’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예부터 몸보신 음식으로 꼽힌 붕어, 잉어, 흑염소 등은 고단백 식품이라 조금만 먹어도 금방 살이 찔 수 있다. 이들 음식을 푹 고은 뒤 약처럼 달여 한약봉지에 넣으면 일반 한약과 색, 향이 비슷해 구별하기 쉽지 않다.
아이에게 먹일 한약이라고 해서 무조건 국산 한약재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한의학에는 ‘도지약재(道地藥材)’라는 개념이 있다. 약재마다 최적·최상의 효과를 나타내는 재배지가 따로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자양강장제로 잘 알려진 녹용(사슴뿔)은 추운 지방에 사는 사슴일수록 약효가 강해 국내산보다는 기온이 낮은 러시아 시베리아산이나 뉴질랜드산을 더 높게 친다.
해독 및 약재 중화작용 하는 감초는 98% 이상이 수입품이다. 한의학에선 중국 내몽골자치구 지역에서 재배된 감초를 최상품으로 분류한다. 항염증·진통 효과를 내는 약재인 후박(목련과 후박나무 줄기·뿌리)은 중국 쓰촨성(四川省)산을 최고로 친다. 국산 후박은 약용 가치가 거의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산은 짝퉁’이라는 말은 한의학에서만큼은 예외다. 국산 도지약재로 꼽히는 것은 충남 금산의 ‘인삼’, 강원 정선의 ‘황기’, 경남 밀양의 ‘맥문동’ 등이다.
성장기 아이는 한약 복용 중 특별히 어떤 음식을 가릴 필요는 없다. 다만 차가운 물과 우유, 아이스크림처럼 찬 음식은 폐 기운을 떨어뜨리고 위와 장에 무리를 줄 수 있어 한약을 복용할 땐 피하는 게 좋다. 같은 이유로 체질에 따라 돼지고기 섭취도 가급적 줄일 필요가 있다.
김 교수는 “돼지고기는 차가운 성질의 음식이라 평소 자주 배앓이를 하거나,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아이가 많이 먹으면 탈이 나고 보약 흡수가 더뎌질 수 있다”며 “반대로 평소 열이 많은 아이가 더운 계열의 닭고기, 살구, 파인애플 등 식품을 먹을 경우 몸 안에 열이 발생해 보약 효과가 떨어지거나 피부에 뾰루지 등이 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보통 한약은 지방질이 많은 음식과 함께 복용하면 흡수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고기는 가급적 살코기만 먹이는 게 좋다”며 “빵·과자 등 밀가루 음식과 인스턴트식품은 아이의 비장과 위장에 부담을 주고 보약 흡수를 늦출 수 있어 섭취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약을 어린이 건강관리를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만 여겨야지 맹신하거나, 과도하게 먹이는 것은 금물이다. 성장기 아이는 면역체계나 장기 기능이 완성되지 않아 천연 약재의 독성에 취약할 수 있어 복용 전 전문의와 상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