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간질’로 불렸던 뇌전증은 치매, 뇌졸중과 함께 3대 신경계질환으로 꼽힌다. 이 중 치매와 뇌졸중은 인구고령화로 환자가 급증하면서 치료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뇌전증은 여전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국내 내로라하는 대형병원들조차 뇌전증수술에 사용되는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아 중증 뇌전증 환자의 고작 1%만 수술을 받고 실정이다. 이에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 나가 ‘원정수술’을 받는 사례도 적잖다.
뇌전증은 뇌신경세포의 비정상적인 과흥분이나 과동기화로 반복적인 발작 증세가 나타나는 경련성 신경질환이다. 질환의 영어명인 ‘epilepsy’는 ‘악령에 의해 영혼이 사로잡힌다’는 의미의 그리스어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뇌전증에 대한 오해와 근거 없는 두려움이 퍼져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전체 환자의 30%는 치료약물에 반응하지 않는 난치성으로 잦은 발작, 정신지체, 발달장애가 동반될 수 있다. 항경련제로 증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은 수술을 고려해야 한다.
대한뇌전증학회에 따르면 국내 뇌전증 환자 36만명 중 약 10만명이 약물난치성 뇌전증인 것으로 추정된다. 약물 난치성 뇌전증 중 경련 증상이 자주 발생해 일상생활이 심하게 어려우면 ‘중증 약물난치성 뇌전증’으로 분류된다. 국내에서 중증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는 3만7225명, 이 중 2만2335명이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는 일반 뇌전증 환자보다 사망률이 10배 높다. 유일한 치료법인 뇌전증수술의 평균 완치율은 71.6% 정도다.
하지만 국내 의료기관들이 뇌전증수술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지 못해 수술 대기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홍승철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수술이 필요한 뇌전증 환자는 매년 1000여명씩 증가하고 있지만 국내에서 이뤄지는 수술은 연간 300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며 “매년 1500~2000건의 수술을 실시해야 대기환자가 줄어들 텐데, 이런 상태로는 모든 환자가 수술받는 데 수십년이 소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뇌전증수술에 필요한 진단 및 수술 장비는 뇌자도(MEG, magnetoencephalography), 삼차원뇌파수술(SEEG, stereoelectroencephalography) 로봇시스템, 레이저 열치료수술 장비(LITT, laser interstitial thermal therapy) 등 세 가지다.
뇌자도는 뇌신경세포에서 발생하는 자기를 측정하는 첨단 진단장비다. 기존 뇌파검사는 뇌표면의 굴곡과 두개골에 따라 검사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지만 뇌자도는 왜곡이 전혀 없고 공간해상도가 뇌파검사보다 10배 이상 높다.
하지만 국내 의료기관엔 뇌자도 장비가 단 한 대도 없어 중증 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이 자비로 일본이나 중국으로 가 뇌자도검사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가까운 일본에서 검사받을 경우 환자와 보호자의 왕복항공료 약 100만원, 입원진료 및 뇌자도검사 비용 300만원, 일본어 통역비용 70만원이 필요하다. 여기에 교통비와 식비 등을 합하면 총 50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
현재 전세계에서 미국이 100대 이상, 일본이 50여대, 중국은 10여대의 뇌자도 장비를 운용 중이다. 국내에선 유일하게 서울대병원이 2011년까지 뇌자도를 운용했지만 현재는 폐기된 상태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한 대의 뇌자도 장비를 들여오려면 30억~50억원이 필요해 병원의 재정적 부담이 상당하다”며 “반면 예상되는 검사 수요나 수익이 투자 비용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돼 일선 병원들이 딱히 도입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국내 뇌전증 환자의 원활한 진단 및 수술을 위해 3~4대의 뇌자도 장비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삼차원뇌파수술은 약 15년 전에 개발된 뇌전증 치료법으로 정확도와 안전성이 높아 미국 등 선진국에서 활발히 시행되고 있다. 두피를 절개하지 않고 지름 0.8mm의 전극을 두피에 꽂아 뇌파검사로 뇌의 어느 부위에서 발작이 시작되는지 확인한 뒤 해당 부위에 열을 보내 발작 증상을 억제한다. 피부절개가 없어 출혈이나 감염 등 부작용 위험이 적다. 해외 연구에 따르면 수술 환자의 85%에서 발작 증상이 감소하거나 없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엔 이 수술에 로봇시스템이 적용돼 안전성과 정밀도가 더욱 향상됐다.
홍 교수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뇌전증수술의 70% 이상이 SEEG 로봇시스템으로 이뤄진다”며 “국내엔 로봇시스템이 한 대도 없어 모두 맨손으로 수술하다보니 시간이 두 배 이상 소요되고 정확도가 떨어져 수술 중 뇌출혈, 수술 후 감염 등이 발생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레이저 열치료 수술장비는 두개골을 열지 않고 조그만 구멍을 뚫은 뒤 내시경을 삽입해 뇌전증 병소를 제거하는 최신 수술법이다. 깊은 부위까지 수술장비를 삽입하기 용이하고, 여러 개의 병변을 간편하게 제거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전체 뇌전증수술의 약 20~30%가 레이저로 이뤄진다. 레이저 열치료 수술장비 한 대당 가격은 약 5억원이다. 다른 뇌전증 수술·진단 장비와 마찬가지로 국내엔 단 한 대의 레이저 열치료 수술장비도 없는 상황이다.
대한뇌전증학회 관계자는 “국내엔 뇌전증 진단 및 수술에 사용되는 필수 장비가 없어 다수의 환자가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가 수백, 수천억원의 치료비를 쏟아붓는 상황”이라며 “수술장비의 국내 도입을 서두르지 않으면 환자들의 경제적 손실이 막심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보건당국의 과도한 규제가 가뜩이나 위축된 국내 뇌전증 치료 환경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K대 신경과 교수는 “뇌전증수술은 신경과·소아신경과·신경외과·뇌영상·신경심리 전문간호사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수술팀을 꾸려야 하고, 뇌전증 수술비 원가는 다른 신경외과 수술비에 훨씬 못 미쳐 수술할수록 병원 입장에선 손해”라며 “이처럼 열악한 상황에서 뇌전증수술에 사용되는 두개강내 전극검사의 수가가 과도하게 삭감돼 아예 수술을 포기하는 병원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신경과 의사들은 신경계질환 치료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불공정하다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뇌전증학회 관계자는 “뇌전증과 함께 3대 뇌질환으로 꼽히는 뇌졸중과 치매엔 각각 수백억원의 예산이 지원되지만 뇌전증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며 “2017년 보건복지부에 뇌전증 의료사회사업의 필요성을 요청했지만 아직 공식적인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현재 전국에 치매센터는 18곳, 치매안심센터는 256곳, 발달장애인지원센터는 18곳이 운영되고 있지만 뇌전증지원센터는 한 곳도 없다”며 “매년 뇌전증 유병률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 대비하고 환자의 삶의 질을 회복하려면 정부의 사회적 경제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