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사업 연계해 횟수·나이 제한 … 사전공지 못받은 환자 ‘당황’, 병원계 반응도 ‘미지근’
저출산 극복을 목표로 이달부터 보조생식술 등 난임치료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만 정작 수혜자인 난임부부들은 일제히 정부의 전형적인 ‘탁상행정’, ‘생색내기 정책’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기존 지원프로그램과 연계해 건보 적용 시술 횟수를 제한함으로써 과거 혜택을 받았던 사람에 불리한 데다 나이에도 상한선을 둬 만 44세 이하까지만 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다. 기존 지원프로그램과 크게 달라진 게 없고, 오히려 과도한 제한 기준을 설정해 육체적·심리적으로 힘든 난임부부들에게 상처만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난임 관련 진료환자는 2007년 17만800명에서 2016년 22만1000명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국내 부부 10쌍 중 1쌍이 난임으로 고통받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인공수정과 체외수정을 포함한 보조생식술 등의 난임치료시술은 지금까지 비급여 항목으로 분류돼 1회 시술당 300만~600만원의 비용을 환자가 전액 부담해야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2006년부터 체외수정 최대 7회(신선배아 1회당 300만원 범위 4회, 동결배아 1회당 100만원 범위 3회), 인공수정(1회당 50만원 범위) 최대 3회를 지원해왔다. 하지만 일선 병원들이 정부지원 확대를 빌미로 은근슬쩍 난임치료 비용을 인상하는 폐단이 발생하자 건강보험 적용을 통해 일괄적인 진료비 기준을 설정하고 환자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지난달 15일 정부가 발표한 난임시술 건강보험 적용 계획안에 따르면 10월부터 병원별로 달랐던 난임치료 시술 과정이 표준화되고, 배아이식을 포함한 보조생식술의 본인부담률이 기존 100%에서 약 30%대로 감소한다.
세부 치료별로 신선배아 체외수정시술의 경우 전체 162만원(건강보험 수가) 중 49만원, 신선배아의 미세조작시술은 191만원 중 57만원, 동결배아는 77만원 중 23만원, 인공수정은 27만 중 8만원만 환자가 부담하면 된다. 치료 중 진찰, 마취 등 처치, 각종 혈액·초음파검사 등에도 건강보험이 적용돼 총 치료비용은 보험 적용 전 평균 359만원(2016년 기준)에서 적용 후 102만원 정도로 경감된다.
보조생식술은 난자 또는 정자를 체외로 채취해 임신을 도와주기 위해 시행하는 시술을 통칭하는 것으로 신선배아·동결배아의 체외수정과 인공수정 등을 포함한다. 체외수정은 여성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수정 과정을 인체 밖에서 인위적으로 이뤄지게 해 임신을 유도한다. 인공수정시술은 여성의 배란기에 맞춰 남성의 정액을 여성의 질, 자궁경관, 난관 또는 자궁에 넣어 임신 가능성을 높인다.
문제는 건보적용 횟수와 나이에 제한을 둠으로써 상당수의 난임부부들이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부안에 따르면 체외수정은 신선배아 4회·동결배아 3회로 최대 7회, 인공수정은 최대 3회까지만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건강보험 적용을 기존 정부 지원사업과 연계해버려 옛 지원 프로그램에서 시술 기회를 모두 사용한 환자는 건강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정부가 이런 건보 적용 관련 세부안을 시행 보름 전에야 공지하자 난임부부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올해 10월부터 난임치료에 건강보험이 적용된다는 말을 듣고 지원프로그램 횟수를 모두 채웠다는 강모 씨(38)는 “정부가 공청회 등을 통해 기존 지원프로그램과 연계돼 건보 적용 횟수가 제한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줬더라면 정부 지원을 빨리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박춘선 한국난임가족연합회장은 “기존 지원프로그램 지원 횟수와 연계된다고 미리 알려줬어야 난임부부들이 제대로 된 시술 계획을 짰을텐데 갑자기 알려주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기존 지원사업과의 횟수 연계로 혜택을 못 받는 난임 환자는 총 1만5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2015~2017년 정부의 난임 지원사업 대상자 중 건보 적용 지원횟수(신선배아 4회·동결배아 3회·인공수정 3회)를 모두 채워 건보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난임환자는 1만4981명 정도다. 신선배아와 동결배아 횟수 소진자는 각각 7939명, 3476명이었다. 지원 횟수가 한번 밖에 남지 않은 인원은 인공수정이 1만9582명, 신선배아는 9926명, 동결배아는 6487명이다.
만 44세를 초과하면 건보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도 논란 거리다. 정부 안에 따르면 만 44세 이하(시술 시작일 기준) 여성에 한해서만 건강보험을 적용한다. 남성은 연령 제한이 없다. 이에 대해 2년 째 난임치료를 받고 있는 최모 씨(42)는 “결혼 연령이 갈수록 늦어지고 40대 만혼도 많아지는 상황에서 나이를 제한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라며 “첫 아이만큼은 난임치료 횟수와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정부는 만 45세가 넘으면 이식성공률이 1%까지 떨어져 비용 대비 효과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나이 제한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만 44세 초과 체외수정시술 시 출산율은 1% 수준인데 반해 유산율은 70%에 달한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는 체외수정 성공률이 35세부터 감소하기 시작하고 40세엔 23%(출산 성공률 16%), 43세 10%(5%), 44세 6%(2%), 44세 이상은 3%(1%) 대로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독일·영국·일본·프랑스 등은 난임시술 비용 지원 또는 건강보험 적용 시 연령을 제한하고 있다. 국가별 난임치료 건보 제한 연령은 프랑스가 45세, 독일 40세, 영국과 일본이 42세다.
의료계도 적정선의 제한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배덕수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교수)은 “건강보험 급여는 재원이 한정돼 있어 비용 대비 효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정부가 책정한 보조생식술 건강보험 적용 횟수의 경우 다른 나라와 견줘 보거나, 국내 보조생식술 통계에 비춰볼 때 적절한 보험급여 범위라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건강보험이라는 특성을 고려한 현 시점에서 적절한 횟수라는 의미일 뿐 앞으로 저출산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경우 비용 편익 분석을 통해 횟수나 기준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난임치료의 급여화가 고사 위기에 처한 산부인과계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막상 난임클리닉 등 일선 병원들의 반응은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S여성병원 관계자는 “보통 비급여 항목을 급여화할 때 관행수가의 60~70% 선에서 건보수가를 결정하는데 난임치료의 경우 고가 장비와 고도의 치료술기가 필요한 점을 고려할 때 적정 수가가 책정된 것인지 의문”이라며 “정부가 수가를 100% 보전해준다고 하지만 확정된 것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J병원 관계자는 “많은 여성병원들이 난임치료의 건강보험 적용에 발맞춰 전방위 홍보를 하고 있지만 취업난, 양극화, 내집 마련의 어려움 등 사회·경제적 이유로 여성들의 출산 의지 자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환자유입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며 부정적 전망을 내놨다.
정부 정책에 대한 난임부부들의 불만이 병원으로 향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산부인과 활성은커녕 일부 병원들이 난임치료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정부와 함께 건보 적용 횟수·나이 제한을 밀어붙였다는 부정적 인식이 생길까봐 걱정”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