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유욕을 갖고 있지만 물건이든 추상적인 기억이든 정도가 지나칠 경우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특정 물건을 병적으로 수집해 모으는 저장강박증이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잊지 않고 전부 기억하는 과잉기억증후군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SBS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은 지나칠 만큼 모든 것을 기억하는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주인공(유승호 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초기억증후군으로도 불리는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은 그리스어의 ‘Hyper(과도한)’와 ‘Thymesis(기억)’의 합성어로 과거에 경험한 일들을 통째로 기억하는 증상이다. 전세계 100여명 정도가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 미국에서 이 질환을 최초로 진단받은 질 프라이스라는 여성은 좌우 전두엽을 모두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4세 이후 삶을 전반적으로 기억할 뿐만 아니라 몇 시에 일어나 누구를 만났는지까지 상세하게 기억한다. 그녀의 사례는 2006년 뇌과학 분야 국제학술지인 ‘뉴로케이스’에 게재되기도 했다.
같은 질환을 진단받은 영국의 레베카 샬록이라는 여성은 판타지소설인 ‘해리포터’ 책 7권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할 때 해리포터를 읽었더니 책 내용이 모두 외워졌고 밝혔다.
과잉기억증후군은 발견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의학적인 연구가 부족해 정확한 발병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으면 대뇌피질 중 기억력과 관련된 관자이랑과 측두극, 집중력과 관련된 두정하구 등 회백질 부피가 일반인과 차이난다.
또 과거의 기억을 뇌의 우측 전두엽에만 저장하는 일반인과 달리 과잉기억증후군 환자는 좌·우측 전두엽을 모두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이 질환은 남들보다 기억력이 뛰어난 게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나쁜 기억에 대한 ‘망각’을 아예 할 수 없어 부정적인 측면이 훨씬 크다. 실제로 과잉기억증후군 환자들은 머릿 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굉장히 피로하다고 호소한다. 첫 사례자인 질 프라이스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짐(burden)’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슬프거나 아픈 기억이 잊혀지지 않고 계속 떠오를 경우 현재의 정신 건강이나 삶의 질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과잉기억증후군이 추상적인 기억을 잊지 못하는 질병이라면 저장강박증은 실제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집안에 쌓아두는 것을 의미한다.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저장강박장애, 저장강박증후군, 강박적 저장증후군이라고도 한다. 어떤 물건이든지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계속 저장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는 일종의 행동장애로 습관이나 절약 또는 취미로 수집하는 것과는 달라 심한 경우 치료가 필요하다.
발병원인은 확실하지 않지만 가치판단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이 손상돼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물건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인지, 버려도 될 것인지에 대한 가치평가를 쉽게 내리지 못해 일단 저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의사결정 능력이나 행동에 대한 계획 등과 관련된 뇌의 전두엽 부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이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정신의학회는 저장강박증을 독립된 질병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질병이 아닌 증상으로 여기다보니 정확한 실태 파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포천 빌라 살인사건의 피의자 이모 씨가 남편의 시신을 갖고 있었던 것도 ‘저장강박증’ 때문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씨가 거주하던 포천 빌라 안에는 곳곳에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고 파란 쓰레기봉투도 방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딱히 사용하지도 않는데 그것을 정리하거나 버리기는 어려운 일종의 성격장애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며 “좀 더 심하게 보자면 정신병의 초기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저장강박증은 다른 강박증보다 치료가 쉽지 않으며 인지행동치료나 약물치료로 증상을 개선하는 게 최선이다. 조철현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저장강박증은 자신의 건강은 물론 가족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하고 이웃들까지 힘들고 위험하게 만드는 정신적·심리적 질병”이라며 “이를 치료하기 위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행동에 대한 교정, 특정 물건에 대한 당사자 태도에 대한 교정, 버리지 못하는 불안감·강박감에 대한 교정 등을 포함한 인지행동치료를 실시한다”고 말했다.
약물치료는 우울증치료제로 개발된 세로토닌재흡수차단제를 사용해 신경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뇌내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불안, 초조, 우울, 의심, 강박감 등이 유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우울제는 불안감이나 우울감을 완화시킬 뿐만 아니라 강박적인 사고나 행동을 개선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