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창고형 약국’ ‘도매형 약국’의 개설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월 11일경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 국내 첫 창고형 약국이라는 ‘메가팩토리’ 약국이 개설된 이래 광주광역시, 대구광역시, 경기도 안양과 부천에 이어 최근에 서울에도 생겨났다.
서울에는 이미 종로 5가 일대에 국내 최저가를 표방하는 도매약국이 밀집해 있음에도 과연 임대료 비싼 서울 강남과 약국에 생긴 ‘도매형 약국’이 수지타산이 맞을지 의문이다.
지난 16일, 국내 최초 ‘도심형 큐레이션 대형약국’을 표방한 옵티마웰니스뮤지엄약국(OPTIMA WELLNESS MUSEUM약국, OWM)의 2호점인 종각점이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안에 들어섰다. 지난 9월 25일, 서울 강남역과 신논현역 사이에 1호점인 낸 데 이어 두 번째 도발이다. 1982년 설립된 약국 기반 프랜차이즈 ‘옵티마’가 신개념으로 창업했다는 이 대형약국은 자본에 의한 기업형 영리약국의 서막을 여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
OMW약국 2호점(종각점)
도매형 약국은 대형마트처럼 카트를 끌고 일반의약품, 건건가능식품, 위생용품, 건강음료 등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형태의 약국이다. 대형 도매 약국과 차별화하기 위해 해당 약국들은 ‘창고형’ 약국으로 불리기를 선호하는 것 같다.
도매형 약국은 일반의약품, 영양제(비타민), 건강기능식품, 반려동물 의약품, 위생용품 등 2500여 종 이상의 제품을 구비하고 있으며, 동네약국보다 10~30%가량 저렴하다고 알려져 있다. 종로 대형약국보다 일부 싼 품목도 있지만, 가격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비싼 약도 상당수라고 한다. 건기식이나 위생용품의 경우 일부 품목은 온라인 최저가보다 비쌀 수 있어 사전 가격 비교가 필요하다.
도매형 약국에서는 일반 약국과 달리 약사의 사전 상담이나 복약지도 없이,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가 필요한 의약품을 소비자가 쓸어 담기 때문에 특정 의약품을 자주 구입하는 사람이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의약품 관련 정보력이 높은 소비자에게 분명 편리한 점이 있다.
하지만 분명히 낭비 요소가 있다. 시간과 교통비를 들여 도매형 약국에 간 이상 본전을 뽑으려면 꽤 많이 사야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과소비를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최근 개인정보 대량 누출로 문제를 야기한 쿠팡에 코가 꿰인 ‘쿠팡 중독자’가 불필요한 물건을 사서 집안에 쓰지도 않고 쟁여놓듯이 도매형 약국에서 약을 잔뜩 구입해놓고 안 먹고 버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최근 쿠팡 이용을 줄여 절약도 하고 환경도 보호하려는 노력을 ‘쿠팡 디톡스’라고 부르는데 이미 ‘드럭 디톡스’가 필요한 상황에서 도매형 약국 등장으로 더욱 그 필요성이 강조돼야 할 것 같다.
국내서는 매년 엄청난 의약품이 폐기되고 있다. 연간 약 6000톤이 실제 복용하지 않거나, 관리나 조제를 잘못해서 버려지고 있다. 이 중 10%가량만 약국이나 보건소에서 수거되고 나머지 90%는 일반쓰레기로 폐기돼 환경오염과 자원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유효기한이 지나지 않은 의약품을 버리지 않고 적응증에 맞게 재활용하는 게 가장 좋은 환경오염 및 자원낭비 방지책인데 과연 이를 수행할 여력이나 마인드가 소비자나 의약품을 취급하는 전문가인 약사들이 있느냐는 게 문제다. 아마도 시간상, 절차상, 비용상 약국에 버려달라고 의뢰하는 게 가장 무난한 처리법이 될 것이다.
한국 노인들의 다제약물 복용률은 매우 높다.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3분의 1 이상(약 34.6% 이상)이 10개 이상 약물을, 절반 가까이(약 46.6%)가 5개 이상 약물을 장기간 복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도매형 약국의 등장은 다제약물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 심화, 건강 악화 위험 등을 초래하므로 그 개설에 대한 보건당국(각 지역 보건소)의 적절한 제어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덴마크, 핀란드 등 일부 유럽 국가들은 약국 개설 시 약사 1인당 1약국 원칙과 함께, 인구수 및 기존 약국과의 ‘거리 제한; 규제를 적용하여 약국 수와 분포를 조절하고 있다. 이는 국민 건강과 공공성을 위한 조치로, 특정 지역에 약국이 과도하게 몰리지 않도록 하고 약사 1인당 책임성을 강화하려는 취지다. 독일의 경우 분점 운영은 가능하나 여러 가지 제약이 가해진다.
도매형 약국 개설자들은 대형 프랜차이즈의 일원(임원으로 재직하거나 또는 고용된 약사)이거나, 의약분업 상황에서 병의원 처방에 종속돼 비굴하게 약사 역할을 하는 게 싫어하는 약사들인 것으로 분석된다. 전자의 경우라면 1약사 1약국이란 약사법 취지에 반하므로 관련 법령을 엄격하게 해석해 법적 제제가 가해지도록 약사회와 시민사회가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약국 개설자가 자본의 종속을 받지 않고 순수 자기자본으로 개업했는지 면밀하게 심사해 개설에 제동을 걸어줄 필요가 있다.
도매형 또는 창고형 약국은 평수가 최소 100평이 넘고, 평균 130평 안팎이라고 한다. 이 정도의 투자비용이면 대형 처방전문 약국을 인수하는 비용과 대등할 것으로 보인다. 후자에 해당하는 약사들이 이런 관점에서 도매형 약국 창업을 결정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도매형 약국은 약사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박리다매로 ’난매(亂賣)‘를 치면서 약사사회의 유통질서를 교란해 동네약국의 경영을 어렵게 하고, 나아가 공중건강까지 해치는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로 보여질 수 있다. 박리다매 이면에는 유명 브랜드는 좀 싸게 팔아도,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 소비자에게 덜 알려져 있으나 마진이 좋아서 특정 제품을 ‘역매(逆賣)’로 끼워파는 상술이 작용한다는 점을 소비자들은 알아채야 한다.
현재는 이들 약국이 전문약 조제를 거의 하지 않지만 수요가 생기면 전문약 조제에도 나설 것으로 보인다. 올해 4월부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대체조제 후 약사가 의사에게 하는 통보 절차를 간소화함으로써 이런 시나리오가 구체화될 날이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내서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의 생산실적은 약 85% 대 15%다. 일반약 비중이 점차 줄어들다가 2023년과 2024년에 미소하게 2년 연속 증가했다. 일반약은 접근성이 높으나 약효 면에서 전문약에 비해 비할 바가 못된다. 특히 만성, 난치성, 희귀성 질환일수록 전문약의 개입이 필수적이다. 일반약은 그야말로 대증적인 치료이며, 약간의 심리적 안정 효과와 예방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일반약의 과다 사용을 부추기는 도매형 약국의 범람을 막는 정책이 필요하다. 의사가 없으면 환자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의사가 불필요한 병을 만들고 과잉진단을 유도한다는 비판적인 경구다. 따라서 불필요한 약이 팔려나가지 않으면 의약품 오남용 우려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