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에 거주하는 광고기획자 양모 씨(27·여)는 산부인과에 경구피임약을 처방받으러 갔다가 거절당했다. 그는 평소 다낭성 난소증후군으로 꾸준히 바이엘헬스케어의 ‘야즈’(성분명 드로스피레논·에티닐에스트라디올, Drospirenone·ethynylestradiol, 3mg/0.02mg)를 처방받아 복용해왔다. 하지만 의사는 당분간 약을 처방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사전피임약 복용 후 사망사건이 정리되면 그때부터 다시 오라”고 말했다.
2012년 2월과 올해 5월에 사전피임약을 복용하고 2명의 여성이 사망하자 해당 약물을 처방하는 의사나 이를 복용하는 환자 가운데 ‘걱정된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적잖다.
인천 사망 환자, 약물-부작용간 연관성 입증 … 피해구제 약물로 선정
지난 5월 인천 검단지역 한 산부인과에서 바이엘의 사전피임약 ‘야스민’(드로스피레논 3mg 에치닐에스트라디올 0.03mg)을 처방받아 복용한 여성 환자가 사망했다. 앞서 2012년 2월에도 춘천의 S모 병원에서 월경통을 겪던 환자가 야스민을 3개월 처방받은 뒤 약 한달 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는 증상 등을 보이다 사망한 바 있다. 이밖에 국내 한 산부인과에서 여의사가 야스민을 복약한 뒤 하지마비 증상을 보이는 등 ‘야스민 사고’가 적잖이 발생했다.
지난 3일엔 사망한 인천 환자 역학조사 결과 ‘약물-부작용 간 연관성’이 입증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야스민을 피해구제 약물로 선정하고 환자 유가족에 사망보상금 등을 조만간 결정해 지급한다는 방침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환자 의무기록 등을 분석한 결과 약물이 사망 부작용을 야기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더욱이 숨진 환자는 야스민 투여 적응증인 ‘피임’이 아닌 ‘월경 배란일 조정’ 등 허가초과 적응증을 목적으로 약제를 투약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야스민은 고나도트로핀(gonadatropin 성선자극호르몬)을 억제해 배란을 막고 자궁 경관의 점액과 자궁내막의 변화를 일으키는 프로게스틴 유도체다. 이 약은 ‘4세대 피임약’의 주요 성분인 드로스피레논 3㎎, 에티닐에스트라디올 0.03㎎이다. 동일 성분의 약으로 같은 회사의 사전피임약 ‘야즈’가 있다. 야즈는 드로스피레논 함량은 야스민과 동일하지만 에티닐에스트라디올 함량이 야스민보다 0.01㎎ 적다. 이들 사전피임약은 비단 피임 목적이 아니라도 산부인과에서 호르몬 이상, 생리불규칙, 다난소 난소증후군 여성들을 대상으로 처방되고 있다.
프로게스틴 유도체 약물은 최근 국내외에서 혈전색전증 등 심혈관계 부작용 위험이 유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혈전색전증은 쉽게 말해 핏덩어리가 생겨 혈관이 막히는 질환이다. 피임약에 들어 있는 황체호르몬은 본래 혈전색전증을 일으키는 등 부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위험성은 극히 적은 편이다. 다만 야즈와 야스민 등 4세대 피임약에 포함된 드로스피레논은 기존 제품에 비해 환자의 혈전 발생 위험성을 높인다는 사실이 보고된 바 있다.
사전피임약, 무조건 나쁜 것 아냐 … 건강한 여성에겐 충분히 효과적
사망 사건 후로 바이엘 피임약의 인기가 주춤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여전히 이 회사의 제품은 가장 많이 처방되고 있다. 야즈는 국내 산부인과 사전 피임약 판매율 1위를 차지했다. IMS 헬스데이터 기준으로 야스민은 올해 1분기 5억9700만원 어치가, 야즈는 24억9900만원 어치의 제품이 팔려 사전피임약 중 가장 많은 양이 판매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야즈는 국내에서는 부작용 사례가 보고된 바가 없다.
양 씨가 다니는 산부인과처럼 ‘당분간 처방을 하지 않겠다’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산부인과 의료진들은 ‘가이드라인을 따라 제대로 처방하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즉 4세대 피임약과 이번 사망 사례 사이에 환자의 심혈관질환 위험 가능성을 확인해야 하지만 건강한 여성에게선 충분히 효과적일 수 있다는 의미다.
김태준 호산여성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4세대 피임약은 혈전 형성의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어 장기간 흡연했거나 심혈관질환 위험이 있는 여성은 다른 피임약을 써야 한다”며 “하지만 일반적인 건강한 여성이라면 두통, 체중증가, 부종(수분정체) 등 부작용이 개선된 4세대 피임약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1분진료 위험, 또다른 사망 환자 막으려면 충분한 상담 필수
따라서 의사는 처방에 앞서 충분한 건강상담을 해야 한다. 바이엘 측은 의사들과 약사들에게 충분히 가이드라인을 설명하며 교육하는 상황이지만 이를 ‘슬그머니’ 넘어가는 의료진도 있는 게 사실이다.
여대생 윤모 씨(24)는 호르몬 문제로 1여년간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다. 그는 번화가에 있는 네트워크 산부인과를 다녔는데, 병원에서 의사를 만난 적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정도를 말하고 피임약을 처방받으러 왔다고 하면 처방전이 나와 이를 받고 약국에 가면 손쉽게 약물을 처방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럴 경우 개인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자칫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치료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일부 병원에서는 이같은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김 원장은 환자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는 “드로스피레논 함유 복합경구피임제는 개인별 정맥혈전색전증(VTE: venous thromboembolism)의 위험도를 감안해 처방하도록 돼 있다”며 “가령 심장질환이 우려되는 여성에게는 2~3세대보다 혈전생성 위험이 높은 4세대 피임약을 권하기보다 레보노르게스트렐·에티닐에스트라디올 등을 주성분으로 하는 2세대 피임제가 권고된다”고 말했다.
또 상담 시 피임약 처방에 앞서 의사는 기본적으로 질병력, 혈압스크린 후 피임제 사용력, 임신·분만·수유 여부, 복용중인 약물, 현재 사용중인 피임법 등을 파악해야 한다. 정기적인 검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대목이다.
김 원장은 “상담을 거쳐 분만 후 6주 이내의 수유부, VTE 위험인자가 있는 분만 후 3주 이내의 여성, 35세 이상의 하루 15개비 이상의 흡연 여성, 혈전색전성질환 질환력이 있는 여성 등에게는 투여를 금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야스민의 부작용 보고에 따르면 혈전 관련 이상반응 발생하면 복용을 중단해야 한다. 김 원장은 “이미 피임약을 복용하는 여성들에게 두통, 복통 등 통증이 발생하면 즉시 병원으로 오도록 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지영 건국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건강한 젊은 여성일수록 야스민 복용 후 혈전 부작용이 드물다고 알려져 있어 앞으로도 부작용 사례가 나오지 않는 한 지금의 처방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임상 현장에서 선호되는 약물은 야스민보다 에스트로겐의 용량이 적은 ‘야즈’”라며 “상황에 따라 고용량 호르몬제제가 요구되는 환자도 있을 수 있어 결론적으로는 부작용 없이 환자에게 잘 맞는 약을 선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상담해햐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