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동 즐기지도 않으면서 과시욕에 분수에 넘게 지출하는 ‘피트니스푸어’ 젊은층에 속출
‘운동하는 특별한 나’에 대한 이미지 연출하며 ‘나르시즘’ 소비주의 허상 보여
건강에 관련돼 비합리적인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은 외모를 인정받고 싶거나, 운동에 100만~300만원을 한꺼번에 쓸 수 있는 계층에 속하고 싶은 ‘과시욕’도 한몫 한다.
요즘 우리사회엔 늘씬한 몸매가 건강을 떠나 ‘꼭 갖춰야만 하는 보편적 가치’로 대접받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몸짱이 되기 위해 바쁜 일상 속에서도 피곤함을 억지로 이겨내며 운동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포기하며, 피트니스센터·병원·에스테틱에 과감한 투자를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실제로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외모를 위한 투자는 줄이지 않는 사람이 적잖다. 지난해 7월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소비자 5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안티에이징 산업에 대한 소비자 인식 조사’ 결과 응답자들의 81.8%가 최근 3년간 소비지출여력이 ‘빡빡했다’고 표현했지만 안티에이징 지출은 크게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직장인 이 모씨(25·여)의 월급은 세금을 떼고 나면 약 180만원 남짓이다. 반면 그가 운동에 들이는 비용은 한달에 100만원에 가깝다. 그는 일주일에 3일은 퍼스널트레이닝을, 2일은 필라테스 레슨을 받는다. 그는 “외모가 업그레이드되면 인생이 더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에 큰맘먹고 결제한다”며 “원하는 몸매를 갖추더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운동은 멈추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씨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국내서 외모는 곧 능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상공회의소의 설문 중 ‘외모가 곧 능력이자 자기관리의 척도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63.9%가 ‘그렇다’고 답했다. 심지어 ‘살림은 어려워도 젊게 사는 삶을 누리는데 돈을 아끼지 않겠다’는 소비자도 전체의 29.0%에 달했다.
이 씨는 처음엔 회사 앞 피트니스센터에 등록해 혼자 운동했다. 한달쯤 지나자 센터에서는 이벤트로 모든 회원에게 1대1 맞춤 퍼스널트레이닝(PT)을 체험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처음 받아보는 PT시간, 트레이너에게 스키니한 체형을 지향한다고 말하자 트레이너는 ‘보통체형에서 마른체형으로 가는 게 과체중인 사람이 살을 빼는 것보다 더욱 어려우니 PT를 꾸준히 받아보라’고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1개월 이상 운동했지만 살이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터에 귀가 솔깃해졌다. 하지만 가격이 회당 8만원 선인 트레이닝 비용이 부담이 됐다. 이런 차에 트레이너는 “같이 운동하다보면 원하는 목표에 좀더 빠르게 도달할 것”이라며 “12회에 96만원이지만 현금으로 하면 90만원만 받겠다”고 말해 설득당했다.
속칭 ‘PT’는 자신과 트레이너가 1대1로 팀을 이뤄 함께 운동하는 프로그램이다. 센터·지역 등에 따라 다르지만 1회에 6만~10만원 정도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여기에 재활 등 특별한 목적이 추가되면 비용은 더 상승한다. 여기에 사물함(로커), 운동복까지 대여하면 각각 1만원을 더 내야 한다.
만만한 비용이 아님에도 퍼스널트레이닝이 선호되는 것은 ‘자신이 VIP처럼 여겨지고, 트레이너가 자신에게 모든 걸 맞춰준다’는 이유에서다.
일종의 나르시즘을 충족시켜주는 측면까지 겹쳐져 고비용에도 불구하고 PT를 채택하는 사람이 젊은층을 중심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김 씨는 한달 고정지출이 월세가 50만원에 교통비·통신비·기타 관리비 등 30만원을 더해 100만원을 웃돈다. 여기에 운동비용도 100만원에 육박한다. 여유자금이 전혀 없어 겨우 겨우 카드로 메꾸고 더러 부모님께 신세를 지기도 한다.
그는 “운동비용을 카드로 결제해 생활이 빡빡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차피 다이어트를 하려면 식비를 줄여야 하는데 이 돈으로 나 자신만을 위한 운동프로그램을 짜고 내 스케줄대로 운동할 수 있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점심은 회사에서 해결하고, 나머지 식사는 집에서 보내준 쌀과 김치, 김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생활비에 비해 운동에 과도한 지출을 하는 바람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일컬어 ‘피트니스푸어’라 부르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건강을 위한다는 만족감 이면에 과시욕이나 외모지상주의가 숨어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씨는 운동하는 이유에 대해 “자기관리도 결국 능력차 아니겠는가. 예쁜 몸매로 거듭나야 좋은 남자친구도 사귀고 나 자신에게 더 당당해질 것 같다”며 “요즘 조금씩 살이 빠지자 직장 상사들이 더 좋게 봐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엔 무작정 체중만 감량하면 몸매의 라인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말에 친구와 월 30만원짜리 필라테스 레슨까지 등록했다. 필라테스는 여성들 사이에 ‘여성미를 살려준다’고 알려져 고비용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높다. 친구도 이 씨와 비슷한 경제 형편이다. 두 사람은 필라테스 레슨을 마친 뒤 ‘인증샷’을 찍고 SNS에 공유한다. 글의 제목은 ‘필라테스 레슨 끝, 여유있는 삶’. 월말 카드비가 많이 나올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포스팅이다.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아름다움, 화려한 생활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나르시즘’에 편승해 고액임에도 불구하고 빠듯한 주머니를 털어 운동에 무리하게 투자하는 트렌드가 생겨나고 있다. 경제학자 토드 부크홀츠는 자의식이 강한 젊은층들이 현실의 불안을 감추고 나르시즘을 강화하기 위해 ‘화려한 아바타’를 내세우는 것에 집착한다며 이들을 ‘아바타 세대’라고 명명했다.
고비용 피트니스 레슨도 이를 대변하는 단적인 예다. ‘특정 운동을 하는 나는 건강을 챙기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 ‘남들과 달리 바쁜 생활속에서도 운동까지 챙기는 특별한 나’, ‘내 미모는 이렇게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는 간접적인 메시지가 담긴 것이다. 유행하는 운동의 소비자로서 SNS에 ‘그럴듯해 보이는’ 일상을 공유, 타인의 반응을 봐가며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한다. 운동 자체를 즐기기보다 특정 운동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알리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경향이 강하다.
1개월 전 PT를 받다 그만 둔 오 모씨(24)는 “군대에 다녀온 후 몸이 좋아졌다는 주변의 소리에 욕심이 생겨 그동안 모은 아르바이트비를 모두 PT에 쏟았다”며 “사실 운동에 별로 흥미를 느끼는 타입은 아니지만 운동 인증샷을 올리면 주변의 긍정적인 반응에 억지로 PT를 나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취미에 맞지 않아 운동을 그만두게 됐다”며 “레슨 횟수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돈도 다 써버린 바람에 아르바이트에 나서고 있는 처지”라고 털어놨다.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는 저서 ‘스펜트’(spent)에서 ‘모두 나를 의식하고 있을 것이란 환상, 내가 소유한 것들이 나의 취향과 지위를 설명해준다는 착각이 나르시즘 소비를 유발하는 현대 소비주의의 허상’이라고 지적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건강에 관련돼 비합리적인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은 외모를 인정받고 싶거나, 운동에 100만~300만원을 한꺼번에 쓸 수 있는 계층에 속하고 싶은 ‘과시욕’도 한몫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