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첫 울음소리가 들려야 할 산부인과가 아이러니하게 '노키즈존' 마냥 바뀌고 있다. 분만을 포기하는 산부인과 개원의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소아청소년과의 새벽 오픈런이 일상이 됐고, 이제 가까운 지역 내 분만할 곳을 찾지 못해 다른 의미의 '원정 출산'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산부인과 개원의들은 필수 의료 붕괴에도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책의 부재를 지적했다.
대한산부인과개원의협의회는 20일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진행한 추계학술대회를 맞아 기자간담회를 열어 필수 의료 붕괴, 특히 산부인과 분만 관련 수가, 사법 리스크, 규제 등 정책 부재가 만들어낸 총체적인 난맥상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적극적인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우선 필수 의료 부문인 산부인과 개원의의 분만 기피 문제와 관련해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기 위한 첫걸음으로 안전하지 않은 진료 환경, 즉 사법 리스크를 꼽았다.
지난 2012년부터 2020년 사이 업무상 과실치사상으로 기소돼 형사재판을 받은 산부인과 의사는 총 39명으로, 주요 진료과에서 정형외과 51명, 성형외과 44명 다음으로 많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22년 11월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접수된 산부인과 조정 신청 건수는 연평균 113건에 이른다.
김재유 대한산부인과개원의협의회 회장은 "사법 리스크의 문제는 1순위로 올라섰다. 수익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시대에 산모와 아이를 위해 분만하는 의사가 줄어드는 문제를 정부는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3천만 원에 불과한 무과실 분만 사고 보상금을 10억 원으로 상향할 것을 요구했다. 이미 분만 사고 소송에서 손해배상 금액이 10억 원을 넘고 있으며, 사고 후 막대한 간호 및 간병비용을 감안할 때 보상 금액을 현실적으로 10억 원으로 대폭 상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저출산 대책에 들어가는 연간 15조 원의 예산 중 0.1%만 사용해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대책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 의료사고처리특례법을 신속하게 통과시켜 의료진이 불가항력적 의료사고로 인해 과도한 형사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국회의 결단을 요구했다.
특히 필수 의료인 분만 중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해 소송 위험을 두려워해 분만을 포기하고 있고, 이는 분만 인프라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며 특례법은 산부인과 의사 지원율을 회복하고 필수 의료 서비스 제공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정부의 특례법의 경우 의사가 책임보험이나 종합보험에 가입한 경우 형사소송 시 형의 감경 요건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수 의료 붕괴를 막기에는 부족하며, 선의로 이뤄진 의료 행위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상죄로 기소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인 만큼 강력한 보호 장치를 촉구했다.
협의회는 또 분만 시 의료 과실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복지부에서 설정해, 의료진과 환자 간의 법적 분쟁 등 갈등의 여지를 사전에 해소하고 분쟁 시 표준화된 판결을 돕는 시스템을 구축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는 의사들이 분만 현장에 복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관련해 박혜성 수석부회장은 "분만은 참 어려운 과정이다. 소신껏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제 민사도 아닌 형사소송의 위험을 떠안고 분만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며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미 붕괴된 분만 인프라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고 밝혔다.
오성윤 부회장은 "분만 가능한 의료기관이 350곳 정도다. 합계출산율을 고려하면 700곳 정도가 있어야 하나, 최저 마지노선 50%마저 무너졌다"며 현 상황을 분석하고 "이 같은 분만 기피를 촉진하게 된 배경으로 분만 사고로 실형이 선고됐던 2017년 인천 법원의 구속 판결 이후라고 진단했다.
이외에도 적절한 제왕절개 수술 수가 현실화, 질강처치료 급여 기준 개선, 수가 체계의 대대적인 개편을 요구하는 한편, 기준 병상이 아예 무의미한 산부인과의 현실에 맞게 다인실 의무 규정 등의 폐지 등 의료과 맞는 규제 개선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