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해야 건강하다’. 사회역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리처드 윌킨슨 영국 노팅엄대학 교수가 지은 책의 이름이기도 하고, 세계보건기구(WHO)가 수년전 내놓은 경제적 평등과 건강과의 관련성을 연구한 보고서의 결론이기도 하다. 빈국이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보다 높은 사망률을 보이고, 같은 미국에서도 경제적 불평등이 높은 도시나 흑인 집단거주지가 높은 사망률과 열악한 건강상태를 보이는 것은 무수한 통계로 거의 정설이 됐다.
흔히 보건학자들은 과식 과음 운동부족 등 라이프스타일을 개선하면 생물학적, 유전적인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절대적으로 가난하고 불평등이 심화돼 있으면 쓸데 없는 얘기가 되고 만다. 유전적 인자는 사회적 인자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일으켜 발현되기 때문에 라이프스타일만 고친다고 해서 건강의 불평등이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은 외형상 매우 부유한 나라이지만 기대여명(어떤 시점의 남아 있는 생존 기대 수명)도 상대적으로 짧고, 건강 불평등도 심각하다. 의료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서 기대여명을 증가시키는 데에 의료서비스가 기여한 정도는 최대로 잡아야 20%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비해 같은 선진국인 일본은 미국보다 기대여명이 훨씬 높다. 2007년 일본의 평균수명은 82.6세로 OECD 국가 중 가장 길다. 반면 미국은 78.1세에 그친다. 이에 대해 일본인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다가 소식하고, 흡연을 덜하며, 과거보다 소금섭취를 줄였고, 유전자가 좋으며, 경제력이 뒷받침됐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하지만 유전자가 좋다는 데에는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이 그다지 동의할만한 대목은 아닌 듯하다. 일본의 식료품 가격이 비싸 불가피하게 소식한다는 것은 일본을 가본 사람은 대체로 수긍할 만한 일이다.
흔히 의료비를 많이 지출하면 건강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국민의료비는 미국이 11.0%(2007년)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고 일본은 8.1%(2006년) 정도다. 같은 기간 가계소비 중 경상의료비 비중은 미국이 19.8%나 되는 반면 일본은 11.8%에 그친다. 1995년 미국은 GDP 대비 14.5%를 의료비에 지출했고 일본은 7% 수준이었다. 이따금 국내 의사들이 한국의 GDP 대비 의료비 비중이 매우 낮아(2007년에 6.8%) 국내 의료의 질이 더 이상 향상되지 않고 환자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며 의료비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로 양자간에 비례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니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는 술 먹다가 쓰러져 길가에 있으면 앰불런스에 실려가고 그럴 경우 건강보험으로 처리되지 않으면 순식간에 2000만원이 넘는 비용이 청구된다. 미국의 복잡한 의료보험제도를 송두리째 이해하고 있는 국내 전문가가 거의 전무한 것처럼, 아직도 미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개혁은 미완의 것이고 여전히 갈길이 멀다. 오로지 한국에 태어나 공공 건강보험의 혜택을 입고 치료비 때문에 집안이 거덜나지 않는, 그리 높지 않고 괜찮은 비용으로 치료받을 수 있음에 필자는 늘 감사해하며 살고 있다.
일본인이 오래 사는 이유는 어느 정도 안정된 부에다가 경제적 평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다수의 보건학자들 주장이다. 헌신과 충성, 존경, 분수에 만족함 등 아시아적 가치가 결집된 일본은 높은 스트레스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충하는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일본을 ‘나라는 부자인데 국민은 가난하다’고 일컫는 것처럼 기본이 탄탄한 경제력에 빈부 격차가 미국보다 완만한 게 건강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다고 보여진다.
한편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가난한 쿠바, 코스타리카, 스리랑카와 같은 나라들은 건강 불평등 수준이 낮다. 쿠바의 경우 미국과 비슷한 수준의 영아사망률과 기대여명을 보여주고 있다. 가파른 경제성장의 시기에 노동자들의 건강 상태는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멕시코의 예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 4월말 서울시는 2005~2009년의 5년간 연평균 인구 10만명당 사망률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사망률이 낮은 구는 서초구(305.0명), 강남구(328.8명), 송파구(353.7명) 순으로 이른바 ‘강남 3구’가 차지했다. 사망률이 높은 구는 중랑구(437.4명), 금천구(432.8명), 강북구(430.1명),노원구(429,8명),동대문구(428.0명) 등 경제적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구 순이었다. 학력이 높을수록 사망률이나 자살률이 낮은 양상도 나타났다.
서울시는 이같은 지역별 건강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오는 9월 ‘서울시민 복지기준’을 발표하고 취약지역에 의료서비스를 집중하고 예산을 더 많이 배분키로 했다. 이처럼 경제적 불평등이 건강의 불평등을 낳으니까 이를 시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많은 보건사회학자들이 제기했다. 서울시의 조사는 어쩌면 진보진영이 박원순 시장이 선거에서 승리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많이 가진 사람들의 눈으로는 지극히 사회주의적인 입장으로 보일 것이다. 당연히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양극화가 심화돼가는 한국 사회에서 많은 호소력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절대적 가난을 해소하고 빈부 격차를 완화하는 것은 분명히 건강 수준을 올리는데 보탬이 된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은퇴 연령에 접어들면서 지난해 12월에는 6645개의 법인이 새로 생겼다. 한국은행이 2001년 1월 신설법인 통계를 발표한 이후 역대 최대 규모다. 50대 이상의 창업은 주로 식당 숙박업 레저 도소매업 등으로 몰리고 있다. 이들 중 몇명이 생존해 피같은 창업자금을 보전 또는 키워나갈지 걱정이다. 50대 이후에 한번 실패하면 재기하기가 쉽지 않다. 영세 자영업자들이 출혈경쟁을 하는 바람에 연쇄도산하는 현상은 지금도 증후가 보이고, 수년후면 더욱 심해져 어떤 참상을 알 수 없다.
프랜차이즈에 가입해 자영업으로 최근 가장 성업 중인게 커피전문점이다. 동아일보 지난 7월 2일자 기사에 따르면 카페베네, 스타벅스 등 커피전문점의 매장 수는 지난 6월 20일 현재 정확히 3000개다. 이 중 40.5%는 1215개는 서울에 있다. 같은 서울에서도 강남구엔 246개(서울의 20.2%)가 몰려 있는 반면 도봉구엔 5개(0.4%)밖에 없었다. 커피전문점의 지도가 ‘부(富)의 지도’가 되버린 셈이다.
경제 불평등은 이처럼 커피전문점의 지역 편중 현상을 뚜렷히 나타냈다. 이뿐이랴 교육의 불평등, 정보화의 불평등도 빈부 격차에서 나온다. 그런데 많은 경제신문이 예측하길 커피전문점 창업은 지금이 정점으로 조금만 더 가면 도산하는 곳이 속출할 것이란다. 한잔에 4000원이 넘는 커피값,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돈을 쓰는 그리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과 젊은이들, 또 그 돈을 훑겠다는 커피전문점 창업 러시. 뭔가 불안하다.
조금 더 안정되고 건전하며 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다소나마 해소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독일처럼 제조업을 진작시키고 허황된 인식의 거품, 소비생활의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분수를 지키고, 부자는 부자대로 사회적 책임을 지키도록 노력하는 길만이 건강하고 영속한 사회를 이루는 곧은 원칙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