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년간 한 번이라도 수개월간 품절 리스트에 오른 약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코로나19의 재유행이 우려되던 2024년 2~8월 사이에는 해열제, 인후통약, 항히스타민제, 독감 치료용 항바이러스제 등이 일반약, 전문약 할 것 없이 공급이 일시 부족한 사태를 겪었다.
예컨대 목감기, 종합감기 약으로 많이 활용되는 코푸시럽, 코대원 등 디하이드로코데인 성분의 복합제(한외마약)는 지난해 5월 거의 한달 남짓 부족했다.
정신과 약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영진약품 ‘조피클론정’(에스조피클론, 수면제), 일성신약 ‘센시발정’(노트트립틸린, 항우울제), 동화약품 ‘에트라빌정’(아미트립틸린, 항우울제), 한국릴리 ‘심발타정’(둘록세틴, 항우울제) 및 ‘푸로작캅셀’(플루옥세틴, 항우울제) 같은 약들이 원료 공급 부족을 이유로 두어 달 품절 사태를 빚었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약도 품절이 작년 상반기와 최근에 일시적으로 일어나 이 약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곤란한 학부모들의 애를 태웠다.
이리보정(라모세트론, 설사형 과민성 대장증후군)은 2010년부터 아스텔라스가 동아ST를 통해 공급했으나 아스텔라스가 한국 철수를 결정함에 따라 2024년 6월 28일 품목허가를 철회했다.
한국아스트라제네카는 국내 제네릭 난립에 따른 수익성 저하를 이유로 오리지널 당뇨병약인 포시가정(다파글리플로진)의 허가를 취하했고, 이를 원하는 환자, 의사는 물론 도매상, 약국으로부터 원성을 샀다. 작년 4월 25일에 허가가 취하됐으나 유통은 11월말까지 가능했고, 12월에는 반품을 받느냐 안 받느냐 문제로 제약사(HK이노엔, 아스트라제네카의 국내 유통 대행사), 도매상, 약국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제일약품 ‘크라비트정’(항생제), ‘글리틴연질캡슐’, 대웅제약의 소화제 ‘에바제’도 작년 상반기 장기품절을 겪고 하반기에 소량 공급됐다.
뿐만 아니라 유한양행 종합비타민 ‘삐콤정’, 산텐제약의 안과검사용 산동제 ‘산텐미드린피점안액’처럼 수요가 꽤 높은 범용 의약품도 재고가 거의 없는 상황에 빠진 적이 있다.
영진약품의 경장영양제 ‘하모닐란’은 지난해 5~6월 두 달간 품절을 맞았다.
이밖에 호흡기약물(특히 흡입제)이 낮은 채산성을 이유로 공급 축소 또는 허하 취하에 나서고 있다.
이런 일련의 의약품 품절 및 공급 부족 사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원료의약품의 의존도가 중국(약 30%)과 인도(약 50%)로 편중돼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이들 나라에서 생산량이 줄었고, 이를 수입해가는 것도 원활하지 않아 공급망(supply chain)이 망가졌다. 일정한 주문과 생산, 공급 리듬이 깨지면서 생산 기반이 상당 부문 와해됐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로 식물성 원료의 원천이 일부 식물의 작황이 나빠지면서 원료의약품 생산이 원활하지 않은 탓도 있다. 예컨대 이모튼캡슐은 아보카도와 대두를 압착해 발생한 기름 중 불검화물만 추출해 만드는데 아보카도의 경우 재배에 많은 물이 필요하고 아보카도 재배를 위한 삼림 파괴 등이 문제가 된다. 변비약 성분인 락툴로스의 경우 유당을 원료로 삼으므로 원유(우유) 가격이 공급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둘째는 질병에 대한 공포감과 예민함으로 수요는 늘었는데 공급마저 줄어 수급 불균형이 더 심화됐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또는 재유행 우려 심리는 가수요를 부추길 수 있다. 이는 예전보다 집에 비축하는 상비약이 늘어나고, 조그만 증상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약을 챙겨먹는 행태가 빚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감기약, 해열진통제 필수약 부족은 저출산으로 소아의 의약품 수요가 줄면서 각 제약사들이 점차 생산량을 줄이고 신규 투자를 안 하는 현상을 촉발한다. 게다가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은 최대한 약가를 낮춰 보험재정 흑자를 유도하려 애쓴다. 그러다 보니 제약사들은 채산성이 낮은 의약품에 대한 생산 의욕을 잃어 자꾸만 품목을 없애거나 최소한으로 공급하려만 든다.
앞서 열거한 품절약은 수가가 개당 수십원이거나, 수백원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환자 수요가 적은 게 많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원료의약품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데 있다.
과거에 국내 제약사들은 저가 필수의약품을 공급하면서 다른 고부가가치 의약품을 끼워 파는 전략으로 낮은 채산성을 극복하려 애썼다. 한편으론 국민건강증진에 기여했고, 한편으로는 양적 성장을 통해 질적 성장을 도모할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미국 유럽의 글로벌 제약사들이 당뇨병, 고혈압 같은 다빈도 만성질환의 범용 의약품 대신 항암제 또는 환자 수가 매우 적지만 ‘살인적’ 부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초고가 희귀의약품으로 연구개발의 중심을 옮기면서 과거의 국내 제약사의 ‘미덕’이 상실돼가는 중이다.
태준제약의 ‘라미나지액’은 위십이지장궤양, 미란성위염, 역류성식도염 등의 지혈 및 자각 증상 개선에 인기가 높은 의약품이다. 하지만 생산 설비 노후화로 지난해 11월 단종됐다. 수요는 상당하지만 생산 설비에 투자한 만큼 상응하는 수익이 기대되지 않으므로 품목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체품목이 있지만 환자의 신뢰도나 미세한 약효의 우수성을 충족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낮은 채산성을 이유로 시장을 떠나는 제약사가 야속하면서 ‘정말 배가 불렀다’는 시선도 나온다. 불과 10여 전에는 단돈 몇십원이라도 벌려고 한 성분당 70~80개의 제네릭이 난립한 게 허다했다. 지금도 이런 제네릭 난립은 여전하지만 달라진 것은 적어도 약값이 개당 500원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100원 이하의 품목을 놓고 경쟁하던 시대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대형 제약사는 전혀 품절이 될 이유가 없는데도, 고의로 유명 간판제품의 ‘품귀설’을 흘리며 약국이나 도매상이 미리 사가기를 재촉하는 가수요를 부추긴다. 품목 당 주문량이 적은 약국에게는 수량을 제한하거나 아예 공급하지 않는 제약사도 있다. 약사들은 가뜩이나 조제 수가는 거의 오르지 않았는데 환자들에게 약이 왜 없냐는 항의에 속을 끓이고 있고, 이런 일부 제약사의 기만적 행위에 분노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필수의약품 및 퇴장방지의약품에 대한 약가 인상, 바이오 원료의약 연구개발 및 시설투자액에 대한 세제혜택, 국산화가 필요한 의약품 및 생산기자재 개발 활성화 지원, 조제 수가 인상 등으로 품절 현상을 타개하려 뒤늦게 대책을 세웠다.
식약처는 완제의약품 공급중단 보고 시점을 기존 60일 전에서 180일 전으로 앞당기고, 공급부족이 예상되는 경우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한 '의약품 등의 안전에 관한 규칙'을 지난 5월 26일 개정했다.
개정안은 3개월 이상 생산·수입이 일시적으로 정지돼 공급이 1개월 이상 정지되는 품목에 대해 공급부족 의무보고를 하도록 기준을 신설하고, 이를 계획이 수립된 날로부터 1개월 내 보고하도록 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지난해 12월, 의약품 안정 공급 체계 관리의 책임을 제약사에 지우고 법제화에 나서고 있는 데 따른 ‘모방 대응’으로 보인다.
필수의약품 부족을 재정 지원을 통해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정부의 정당한 역할로 간주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특정 몇가지 품목만으로 충분히 고수익을 챙기면서 채산성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수십년 또는 십수년 유지해온 제약사-약국-환자 간 의약품 흐름에 대한 약속을 내팽개치는 게 ‘국민건강증진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언필칭 내세우는 제약사들의 이중가면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필수의약품 부족의 근본적인 원인, 부족이 장기화될 수 있다면 이 또한 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보다 핵심적인 대책 마련에 중점을 두고 정부와 제약사, 의료인, 약사, 시민단체 등이 합의를 이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