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개월 ‘초고속 개발’ 덕분 올 美 6.4% 성장 IMF 전망 … ‘자국우선주의’ ‘말한 것 실천’은 미덕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다음 대선에 또 도전하기 위해 제3정당을 창립한다거나, 사비 2000만달러를 들여 비영리단체 ‘미국우선주의 정책연구소’(America First Policy Institute·AFPI) 설립을 추진 중이라는 최근 근황이 보도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1월 20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는 참석하지도 않은 채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열린 환송식에서 “잘 지내라. 우린 곧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시나트라의 노래 ‘마이웨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에어포스원을 타고 플로리다로 떠났다.
트럼프 퇴장에 가장 박수를 보낸 곳은 중국일 것이다. 2018년 7월부터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에서 트럼프는 거침없이 보복관세 폭탄을 때려댔고, 중국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몰아붙였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 코로나19)을 칭할 때마다 ‘차이나 바이러스’ ‘우한바이러스’라며 중국인의 상처를 후벼팠다.
트럼프가 대선에 실패한 결정적 이유는 코로나19 대유행 초기에 잘못 대응한 것이다. 미국 코로나 하루 신규 확진자는 트럼프 퇴임 직전인 올 1월 8일 30만669명으로 정점에 달했다. 1월 21일 기준으로 누적 확진자는 2500만명, 누적 사망자는 41만명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세계 1위의 신종코로나 환자 대국이었다.
그러나 작년 12월부터 화이자, 모더나, 얀센 백신이 잇따라 허가되면서 18세 이상 성인 중 한번이라도 백신을 맞은 사람은 지난 18일 기준 1억2998만명으로 50.4%로 성큼 올라섰다. 18세 미만까지 포함한 전체 인구 중 8400만명(25.4%)이 면역 형성에 필요한 접종(2회, 얀센만 1회)을 마쳐 집단면역 형성 기준인 70%에 가까워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대략 3억도스의 백신 물량을 확보한 이상 집단면역 목표 달성은 시간 문제다.
트럼프는 재임 4년 동안 좌충우돌하며 ‘악동’ 이미지를 보였지만 지난해 3월 ‘워프 스피드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신속한 백신개발 및 배포 계획을 밀어붙여 빨라야 18개월 걸린다는 백신 개발 기간을 9개월로 단축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화이자, 모더나 백신의 경우 두 번 접종만으로는 면역력 형성이 미흡하고 한번 더 부스터 샷(Booster shot, 추가 접종을 통해 떨어진 면역력을 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평가돼 미국민에게 필요한 물량을 늘려야 할 처지다. 미국 내에서 남아도는 물량을 우리나라 등 여러나라고 공급받을 수 있겠다는 낙관적 시나리오에 차질이 생겼다.
정부는 백신 확보에 실패한 비난 여론을 의식해 미국과 백신-반도체 스와프(맞교환)을 계획 중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생활환경이 가속화되면서 모바일 통신용 반도체는 물론 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산업용 반도체가 지난해 말부터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12일 ‘반도체 대책회의’ 중 삼성전자 임원 앞에서 반도체 소재 웨이퍼를 들어보이며 “미국에 투자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생명이 중요한가, 산업의 쌀이라는 반도체가 더 중요한가. 문제는 그동안 현 정권이 미국과 관련해 대북 또는 대중 정책에서 미국과 깊은 유대와 신뢰를 쌓지 못한 것이다. 미국-일본-호주-인도로 이어지는 대중 전선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물론 외교안보 차원에서 미국과 엇박자를 내왔다. 이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백신 좀 달라고 부탁하기는 면구스러운 일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1월초 벤자민 베타냐후 총리가 화이자의 CEO인 알버트 불라(Albert Bourla)와 17번의 전화 통화를 나누며 설득한 끝에 백신을 조기에 선점했고 현재 전국민의 53%에 해당하는 497만명이 2차 접종까지 마쳤다. 올 1월만 해도 하루 1만명이 넘던 신규 확진자도 최근에는 100명 밑으로 떨어졌다.
미국이 백신 공급을 무기로 미국에 20조원 규모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라고 요구할까. 정부는 백신 부족난을 해소하기 위해 영어(囹圄) 생활을 하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풀어주며 이에 화답할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트럼프가 남긴 미덕이라면 자국우선주의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어떤 비난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며 자국민에게 소홀한 것에 분통을 터뜨리는 미국 백인 중산층 및 서민층의 마음을지지 기반으로 삼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기회의 나라’ ‘평민의 나라’라는 미국의 모토를 복원하기 위해 애썼다. 미중 밀월, 친중 글로벌리즘으로 중산층은 해고되고, 서민과 이민자의 일자리는 중국 등에게 빼앗기는 것을 되돌리려 했다. 이른바 자본주의와 민중을 결합한 ‘보수 포퓰리즘’이란 모험을 감행해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재선에는 실패했다. 적어도 지지자를 포함한 국민들에게 자기가 뱉은 것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인 것은 트럼프의 장점이다.
트럼프는 재선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코로나19 치료제 및 백신 개발을 독려했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억지로 코로나19 치료제로 긴급사용승인을 유도했다가 나중에 승인이 취소되는 창피를 겪었지만 그 적극성은 알아줘야 한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자신이 코로나19에 걸려 덱사메타손 치료를 받아보고 적극 이 약의 코로나19 치료제 승인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의 스가 히데요시 총리는 미국 방문 중인 지난 17일 화이자의 불라 CEO와 통화하면서 백신을 추가로 확보했다. 올 1월 계약한 7200만명분 백신에 물량을 추가, 오는 9월까지 전국민이 맞을 물량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배후에는 미국의 대중전략을 일본이 100% 받들겠다는 선물이 있었다.
흔히 국가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후흑(厚黑學)을 논한다. 얼굴 두껍고(面厚) 속이 검어야(心黑)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고 외세로부터 자국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과거 양김 중 김대중 대통령은 속은 검은데 얼굴이 얇고, 김영삼 대통령은 마음은 하얀데 얼굴이 두껍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은 정작 후흑하지도 않고 심성이 반듯한 것으로 아는데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또는 대통령을 둘러싼 세력들에 포위돼 결론적으로 ‘후흑’하다는 평가를 반대세력으로부터 듣는다.
트럼프는 후흑한 사람 중 하나다. 아마도 미국이 대통령제가 아니고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독재가 가능한 상황이었다면 충분히 장기집권을 획책했을 것이다. 수많은 신출귀몰하고 비합리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할 일은 하고 마는’ 불도저 같은 추진력이 요즘 이 나라에 필요하다. ‘촛불세력’ ‘태극기부대’ ‘대깨문’ 등에 휩쓸리거나 눈치 보며 편가르기를 통해 또는 그 반사이익으로 덕을 보려는 지도자들은 현 상황에서 소용이 없다. 비난에도 불구하고 소신 있게 정책을 밀어붙이되 중용과 포용, 소통과 합치를 실현할 인물은 당분간 요원하다는 말인가.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이 올해 6.4% 성장한다고 전망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1조9000억달러 ‘슈퍼 부양안’을 내놓은데다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무려 180억달러를 쏟아부어 백신 개발에 올인한 후광 덕분이다. 트럼프의 거친 언행에 바이든은 선거에 승리했고, 트럼프가 남긴 유산으로 혜택을 보는 것도 꽤 있음을 바이든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세계 1등 방역국가’라며 백신 도입에 늑장을 부리다가 계약하지도 않은 백신을 “확보했다”, “서서히 들어오고 있다”고 둘러대면서 올 5월부터 들여온다는 2000만명분의 모더나 백신이 8월이나 돼야 국내에 상륙한다는 사실에 별반 뚜렷한 해명도 못하는 우리 정부는 반성할 것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