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중순이면 새별오름의 억새꽃이 절정에 이르면서 방문객이 급증한다.
한라산의 서쪽 능선에서 외지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오름은 해마다 정월보름에 맞춰 억새를 불사르는 들불축제가 열리는 새별오름이다. 오름의 모양이 초저녁에 뜨는 샛별 같다고 해서 새별오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새별오름은 분화구가 복잡한 형태의 오름이어서 정상부에 올라보면 다섯 봉우리가 보인다.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소재 새별오름은 높이가 519m다. 해발 400m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실제 올라가는 높이는 119m에 그친다. 그러나 오르기에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정상부까지 급한 경사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20분 정도 걸으면 오를 수 있다고 하지만 찬찬히 꽃과 풀을 살피다 보면 20분으로는 어림없다.
새별오름은 시작점을 기준으로 실제 119m 높이에 불과하다. 정상 능선까지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한 편이지만 길이 험하지는 않다.
매년 10월 중순이면 새별오름의 억새꽃이 절정에 이르면서 방문객이 급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새꽃만을 보지만 그 품엔 잔대, 가시엉겅퀴, 야고, 이질풀, 자주쓴풀, 쑥부쟁이 등 온갖 제주 꽃도 함께 핀다. 이 꽃들을 찾아 눈을 맞추다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고 남들이 사진 찍고 볼 것 다 보았다고 내려갈 때에야 겨우 오름 위에 올라서서 서쪽의 넓은 들을 가슴에 안는다. 그 너머 바다 위엔 비양도가 떠 있다.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면 한라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딱지꽃(왼쪽)은 얼핏 양지꽃과 비슷하게 보이며 6월과 7월에 핀다. 해독효과를 기대하며 약용으로 쓰기도 한다. 쑥부쟁이꽃은 제철 가을꽃으로 벌개미취, 해국, 구절초, 갯쑥부쟁이 등과 구별이 쉽지 않다.
새별오름에서 눈에 들어오는 서쪽 벌판에서 650여 년 전인 1370년(공민왕 19년) ‘목호의 난’이 일어났다. 최영 장군이 이끄는 관군이 토호인 몽골인과 그를 따르는 세력을 싸워 진압한 곳이다.
원나라가 탐라의 삼별초를 진압하고 4년 뒤 1277년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했다. 원은 여기에 목호(牧胡)를 보내 말을 기르게 했다. 그러나 원이 기울고 명이 일어나면서 고려와 명의 국교가 이뤄지고 제주의 말을 명으로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목호들이 ‘원 황제의 말을 명에 보낼 수 없다’며 저항했다. 이게 목호의 난이다. 이 때 고려 진압군의 규모를 보면 전함 314척에 병사 2만5600여명이었다. 제주에 남아 있던 몽골인과 원을 따르는 사람들의 세력이 그만큼 강력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흥하고 있던 명은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 했고, 쇠하던 원의 세력이 이에 대항하며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벌판이 이 곳이다.
새별오름의 가시엉겅퀴꽃(왼쪽)과 산부추꽃
이제 사람들은 억새의 장관과 음력 정월대보름 전날과 당일 사이에 들불을 놓아 억새를 태우는 들불축제로 새별오름을 기억한다. 말과 소를 방목해 키우던 옛날, 제주 사람들은 겨울이 지날 때쯤 초지에 불을 놓아 마른풀과 해충을 없애곤 했다. 재는 거름이 되어 풀을 더욱 잘 자라게 했고, 소와 말 먹이기가 수월해졌다.
과거의 풍습을 담아 지금 사람은 새별오름 봉우리의 한 경사면에서 가득 찬 억새를 태우는 들불축제를 벌인다. 오름 전체가 타오르는 듯 보이니 다른 지역의 달집 태우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불이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마치 ‘새별오름 화산이 폭발하는 듯하다’고 한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수밖에 없다.
새별오름 서쪽 벌판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몽골의 잔존세력과 치열하게 전투를 했던 곳이다.
그러나 억새를 바라보며 새별오름을 오르기 시작하면 시작점에서부터 버려진 쓰레기 때문에 마음이 상한다. 쓰레기는 정상부에 올라가도록 끊어지지 않고 눈을 찌른다. 억새는 바람에 일렁이고 사람들은 억새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억새가 꺾인 자리에서 한 발 더 들어가고, 거기서 또 한 발 들어가 사진을 남긴다. 그리고 슬그머니 휴지 한 장 버리고, 마시던 음료도 내려놓는다. ‘흔적 남기지 않고 가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