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조천읍 동백동산의 숲길은 5㎞ 남짓 걸어서 원점으로 돌아오게 돼 있다. 과거엔 이 숲에서 땔감을 얻고, 집을 짓거나 수리할 목재를 구하고 내다 팔 숯을 구웠다. 제법 많은 물을 가진 연못과 크고 작은 습지가 많아 물이 귀했던 시절엔 마실 물과 생활에 필요한 물을 길어 날랐다.
이 숲에 지천이었던 동백나무는 귀한 나무였다. 나무의 재질이 좋아 각종 생활용품을 만들었고 열매로는 기름을 짰다. 목재로, 땔감과 숯으로 나무를 베어내면서도 손대지 않고 남겨둔 동백나무들이 사람들의 눈에 쉽게 보일 만큼 많이 자리를 잡으면서 동백동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0만그루가 자란다고 알려져 있으나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드물고 다른 나무들과 경쟁하느라 빽빽하고 높게 자라 잎은 무성한데 꽃은 찾아보기 힘든 게 안타까움을 더한다.
동백동산 숲길로 들어섰다. 지난해 8월초 숲속의 공기는 축축하면서도 끈끈했다. 마치 깊은 동굴의 입구에 선듯했다. 숲길은 매우 어두웠고 온통 바위가 울퉁불퉁할 뿐 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숲속의 어두움에 익숙해져 가만히 살펴보니 바위 틈을 비집고 각종 고사리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나무마다, 바위마다 마치 옷을 입듯 이끼를 덮어쓰고 있었고 때로는 콩짜개덩굴을 갑옷처럼 두른 나무도 보였다. 송악, 담쟁이덩굴 등이 나무에 올라타 함께 햇빛 경쟁을 하고 있다. 힘겨운 나무들이 행여 바람에 쓰러질 세라 바위 틈새를 비집으며 뿌리를 키워 바위를 움켜쥐고 다시 뿌리를 뻗어 다른 바위를 감싸고 있었다.
동백나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숲에 10만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는데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전기가 들어오고 연탄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나무를 베어낼 필요가 없어졌고 산림녹화 사업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동백동산의 온갖 크고 작은 나무들이 무제한으로 마구 자라기 시작했다. 동백도 옆으로 퍼지기를 포기하고 위로 자라면서 햇빛 경쟁에 뛰어들었다. 나무마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잎을 달고 있으니 어느 나무가 어느 나무인지 나무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알아볼 방법이 없다.
어둠 속에서 겨우 길을 알아보며 숲 속의 이런 저런 식물들을 살피다가 나무숲동굴을 빠져나오고 보니 고요한 연못이 펼쳐져 있다. 주위로 높이 자라 오른 나무들이 바람을 막고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 쬐는데 물풀 사이로 노란 실잠자리 한 쌍이 알 낳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켜켜이 쌓이고 나무와 덩굴이 뒤엉킨 곶자왈 한쪽의 연못에서 식수와 생활용수로 퍼다 쓰며 사람들은 이곳을 먼물깍이라 불렀다. 물이 귀한 산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용암 암반 위에 자리한 먼물깍은 참으로 귀한 수자원이었다.
상수도가 보급되면서 물 사정이 좋아지니 사람들은 더 이상 이 먼 곳까지 물을 구하러 올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수생식물이 자라고 그 그늘 속에 각종 곤충이 터를 잡으면서 먼물깍의 주인이 바뀌었다. 먼물깍의 새 주인들을 위해 사람들은 이 일대를 람사르습지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동백동산 숲속에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수많은 풀과 나무, 곤충과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아름드리나무조차 그 뿌리가 끌어안고 있는 바위가 부실해지면 쓰러지고, 도무지 살아남을 기약이 없던 어린 나무들이 그 곳에 비치는 햇빛을 놓고 치열한 키 크기 경쟁을 한다. 살아 있기를 열렬히 간구하는 그런 ‘곶’(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