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치악산 금강송 울울창창 … 남한강변의 폐사지
2019-11-13 19:06:35
성황림 태고 적 신비 간직한 천연기념물 숲 … 뮤지엄 산은 현대화된 명 건축물
벌써 닷새 전이 입동 절기다. 가을은 너무 짧다. 형형색색의 단풍이 산을 수놓고 있지만 이런 아름다운 풍경도 순식간에 지나간다. 저물어가는 가을의 끝자락, 강원도 원주로 떠나볼 일이다. 원주는 영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중앙선 철도가 지나가는 강원도의 핵심 도시다. 수도권과 충청권에서 간다면 하루 여행지로도 무리가 없을 만큼 가깝게 느껴진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원주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경기도와 영남 사이에 끼여 물길로 운송되는 생선, 소금, 인삼 등과 궁전에 쓰이는 재목 따위가 모여 들어 하나의 도회로 되었다. 두메와 가까워서 숨어 피하기가 쉽다”. 서거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동쪽에는 치악이 서리고, 서쪽에는 섬강이 달리니, 천년고국(天年古國)”이라고 했다.
강원도의 심장, 500년 역사 ‘강원감영’
시내 한복판에 있는 강원감영(일산동)은 원주의 과거를 잘 보여주는 도심 속 역사 문화 공간이다. 조선 시대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이 관청은 조선 500년 역사를 꿋꿋이 지켜온 강원도의 심장이자 원주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설치돼 고종 32년(1895) 8도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강원도의 26개 부, 목, 군, 현을 다스려왔다. 30여 동에 이르던 건물들은 1950년 6·25 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됐지만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布政樓),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宣化堂), 내아인 청운당(淸雲堂)은 오롯이 남아 위엄과 격조를 느끼게 해준다. 선화당 왼편 강원감영사료관은 강원감영의 옛 모습과 사진 자료, 감영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 감영터에서 발굴된 금동허리띠고리, 나막신, 동전, 호패, 분청사기, 백자 등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시내 단구동에는 박경리(1926~2008)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박경리문학공원이 있다. 선생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옛집을 원형 그대로 볼 수 있고 소설에 등장하는 홍이동산, 평사리마당, 용두레벌 등이 재현돼 있어 소설 속 분위기를 잘 전해준다. 홍이동산은 ‘토지’에 나오는 아이 주인공인 ‘홍이’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동산이라는 의미이다. ‘용두레벌’은 ‘토지’ 속의 이국땅인 간도 용정의 용두레 우물과 간도의 벌판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박경리 선생은 이곳 옛집에서 토지의 4부와 5부를 썼다고 한다.
원주를 애기할 때 한지와 옻은 빼놓을 수 없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와 옻 공예품의 원료인 옻나무가 특산품으로 꼽힐 정도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한지테마파크는 한지의 역사와 우수성, 변신과 예술성을 살펴보고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한지를 주제로 한 전시회와 국내외 신진작가를 발굴·지원하는 작가 레지던스를 연중 운영하며 한지문화 확산을 위한 워크샵도 진행한다. 매년 ‘원주한지문화제’와 ‘대한민국한지대전’을 개최해 천년의 숨결과 멋을 간직한 원주한지를 널리 알리고 있다.
원주천 옆의 태장동은 일찍이 옻나무가 많이 자라던 곳으로 유명하다. 옻은 자개장이나 문갑, 장롱, 탁자, 서류함을 만드는데 쓰인다. 이곳에서 나는 옻은 양이나 품질 면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수공예로 만들어지는 옻나전칠기는 원주시가 지역특화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원주시 지정면 신평리와 흥업면 대안리에 옻나무 집단재배단지가 형성돼 있다. 옻칠기공예관(소초면 구룡사로 142)과 옻문화센터(원주시 봉산로 20)에 가면 관내에서 활동 중인 무형문화재와 공예인들이 만든 옻칠기 공예품을 구입하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동쪽에 치악, 서쪽엔 섬강 … 구룡계곡 등산로, 금강송 빽빽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추어탕집이 많이 눈에 띈다. 추어탕은 전국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대중음식이지만 원주식 추어탕은 맛이 좀 독특하다. 고추장으로 국물 맛을 내 진하고 걸쭉하다. 탕에 들어가는 감자, 토란대, 부추, 파, 양파, 미나리, 표고버섯 등 채소는 감칠맛을 내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다. 진득하고 얼큰하고 구수한 추어탕 한 그릇이면 보약이 따로 필요 없다.
원주의 얼굴 격인 치악산(雉岳山)은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으로 불리다가 언제부턴가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은 꿩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까치 치’자를 써서 치악산으로 불리고 있다. 정상인 비로봉(1288m)을 위시해 남대봉(1181m), 향로봉(1043m) 등 1000m 이상 산들과 구룡계곡, 부곡계곡, 금대계곡, 신선대, 구룡소, 세렴폭포, 칠석폭포 등은 계절마다 색다른 풍치를 선사한다.
구룡계곡은 설악산이나 오대산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산행에 자신이 없다면 구룡계곡의 맑은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자극을 받게 될 것이다. 매표소에서 구룡사로 이어지는 숲길에는 소나무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금강소나무가 빽빽하게 솟아 있다. 주 등산코스인 구룡사-세렴폭포-사다리병창-비로봉(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치악산의 진면목을 체험해 볼 수 있다. ‘병창’은 강원도 사투리로 절벽이라는 뜻이다.
치악산 동남쪽 신림면 성남리에는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제93호)로 지정된 성황림이 있다. 태고의 모습을 잃지 않은 숲에는 복자기나무, 소나무, 쪽동백, 버드나무, 고로쇠나무, 젓나무, 왕느릅나무, 들메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등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하다. 성황림 한복판에는 나무로 지은 성황당이 신비스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다. 성황당 옆에는 커다란 전나무와 음나무가 서 있는데 음나무는 여성을, 전나무는 남성을 상징하며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사다리 구실을 한다고 한다. 매년 음력 4월 8일과 9월 9일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지낸다.
성남리에서 신림면사무소를 지나 제천 방면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종탑이 보이는데 107년 역사를 간직한 용소막성당이다. 횡성의 풍수원성당과 원주성당에 이어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생긴 성당이다. 성당 건립 직후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신자들이 3000여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가 컸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식량 창고로 쓴 덕에 참화를 면했다.
옛 영화가 그리워지는 폐사지 3곳 … 법천사지·거돈사지·흥법사지
원주 여행에서 폐사지(廢寺址) 답사는 필수 코스다.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하는 부론면과 지정면에 남아 있는 세 개의 절터를 일컬음이다. 부론면 법천리의 법천사지(法泉寺址)와 정산리의 거돈사지(居頓寺址)부터 가본다.
거돈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돼 고려 초에 대찰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옛터에 다다르니 적막이 흐른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말았다. 절터에 남아 있는 불좌대와 금당터, 3층석탑(보물 750호),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78호)만이 저 아득한 1000년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법천사지는 황학산(黃鶴山·341.9m)의 서편, 남한강과 가까운 곳에 있다. 거돈사지는 황학산의 동편에 있다. 법천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돼 고려시대에 크게 융성한 절로, 역시 임진왜란 때 전소됐다. 고려 선종 2년(1085년)에 건립된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59호)가 남아있고 그 옆에 있던 지광국사현묘탑(국보 101호)은 경복궁 옆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또 하나의 옛 절터는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흥법사지(興法寺址)다. 한 때 그 규모가 꽤 컸던 흥법사지 또한 옛 영화를 찾을 수 없다. 넓었던 터는 현재 모두 밭으로 변하고 말았는데 삼층석탑(보물 464호)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보물 463호)만이 외롭게 남아 옛 자취를 더듬어보게 해준다.
흥법사지 인근에는 송강 정철이 관동팔경에서 ‘한수를 돌아드니 섬강이 어드메뇨, 치악이 여긔로다’라며 수려한 경치를 찬탄해마지 않았던 간현(艮峴)계곡이 펼쳐져 있다. 소금산에서 시작된 삼산천이 섬강과 맞닿는 곳으로 수직 절벽과 맑은 계곡물, 하얀 백사장이 길게 이어져 있어 풍광이 무척 아름답다. 간현계곡은 중앙선 철도가 통과하는 곳으로 서울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간현역에 내리면 바로 앞이 간현계곡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긴 소금산 출렁다리도 생겼다. 소금산 등산로 일부 구간 중 암벽 봉우리 두 곳을 연결했는데, 다리에 올라서면 간현계곡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몸이 좌우로 출렁거리는 아찔한 재미는 덤이다.
워터가든, 웰컴센터, 본관(페이퍼갤러리, 창조갤러리), 플라워가든, 스톤가든 등 자연의 변화를 예술에 녹여 담은 ‘뮤지엄 산’(지정면 월송리)도 인근에 있다. 한솔그룹 오크밸리가 운영한다. Space, Art, Nature의 앞 자를 따서 ‘산’이란 이름 지은 건축물은 그 자체가 커다란 예술작품이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감탄사를 터트리게 되는데 두 눈을 사로잡는 이색 풍경 때문이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웰컴센터는 파주석(경기도 파주산 겨자빛 노랑색의 석영 질감의 돌) 등으로 축조한 자연석벽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세계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손길이 닿은 건축물이다. 순수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80만주의 붉은 패랭이 꽃과 약 180 그루의 하얀 자작나무 길이 눈을 즐겁게 하는 플라워가든, 사계절의 자연광을 극적으로 담은 뮤지엄 본관, 신라고분을 모티브로 9개의 부드러운 곡선의 스톤가든, 명상관, 제임스 터렐(특별전시장) 등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김초록 여행작가 rimpyung74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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