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파 서인의 본산, 논산의 명재고택과 돈암서원
2020-10-23 10:48:19
명재 윤증, 청렴과 지조의 상징, 교조적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갈라선 서론의 시발점 … 사랑채에선 위엄과 푸근함
돈암서원, 기호학파 태두 김장생부터 송시열 등 충청오현 모신 결정체 … 위용당당 응도당, 숭례사 꽃담, 장판각·양성당 옛 향기
지난 추석 연휴 전날 짬을 내어, 아내의 눈치를 봐가며 오랫동안 가보고 싶어던 충남 논산의 명재고택과 돈암서원에 들렀다. 천안-논산고속도로에서 탄천IC로 빠지면 지름길인데 내비게이션은 천안 어드메서 국도를 따라 이곳을 안내했다.
고택이나 서원하면 영남, 그것도 경북 안동·경주·영주 정도에만 익숙하지 충남에도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에 생경할 것이다. 먼저 들른 곳은 논산 노성면 교촌리의 궐리사(闕里祠)와 노성향교(魯城鄕校)였다.
궐리사는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는 사당이다. 궐리(闕里)는 공자가 노(魯)나라 곡부(曲阜)에 살던 당시 동네 이름이다. 그래서 궐리사라 이름지은 사당이 꽤 많아 강릉, 제천, 오산, 진주 등에도 동명의 사당이 있었다. 지금은 충남 논산과 경기도 오산(화성)의 궐리사만 현존하고 있다. 동네 이름이 노성, 그 뒷산이 노성산이라 이름 지어진 것도 공자의 노나라와 관련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유림에서 공자를 모시는 제사를 석전(釋典)이라 하는데 궐리사에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거행된다고 한다. 논산에는 향교가 많았는데 지금도 노성향교, 연산향교, 은진향교 3곳만 남아 있다.
궐리사에서 조금 걸어가면 명재(明齋)고택과 노성향교가 붙어 있다. 고택은 소론(少論)의 영수인 윤증(尹拯 1629~1714)의 살림집(사랑채와 안채)과 그를 모신 뒷편의 사당이 하나로 돼 있다.
명재의 선친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 1689),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년~ 1672).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1607~1684), 시남 유계(市南 兪棨 1607~1664) 등과 함께 ‘忠淸五賢’으로 손꼽히는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1610∼1669)다. 명재의 어머니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갔다가 청군이 점령하자 자결했다. 이를 기리는 공주이씨 정려문이 근처에 있다.
궁금해서 충남오현을 살펴보니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 ~ 1631)과 그 아들인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1574~1656) 부자를 골간으로 그 문하의 송시열·송준길·윤선거·유계·이유태 등을 호서산림 오현으로 꼽은 것이었다. 여기서 호서란 금강 줄기의 충남 서쪽을 말하고, 산림이란 인조반정 당시 적극 가담하지 않았거나 공신 책록을 받지 못한 부류들이다.
김집은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자 이황의 서녀 사위였다. 김집이 송시열·송준길을 천거하면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관계였다. 이유태는 송시열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한 공주 사람이다. 윤선거와 유계도 굳이 분류하자면 논산(충남 금산에서 같이 기거하기도 함) 사람이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같은 은진 송씨로 송준길이 한 살 많고 항렬도 하나 높다. 13촌 숙질 사이다. 옥천 출신 송시열은 8세 무렵 논산 은징의 송준길 집에서 함께 수학했고 26세 이후 회덕(대전)으로 옮겨 송준길과 평생 정치와 학문을 함께 했다.
송준길의 외할아버지 김은휘와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는 친형제다.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과 김장생은 이이, 송익필, 김계휘 문하에서 같이 수학했으며 가깝게 지냈다. 송이창은 경제적으로 넉넉해 송시열 집안에 도움을 줬다. 역시 지역과 집안으로 엮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윤증은 어려서 김집과 송시열에게서 학문을 익혔으나 선친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자 송시열에게 묘갈명(비석의 내용)을 부탁했는데 이 글에서까지 아버지에 대한 서술이 소홀하게 다뤄지자 결국 사제지간을 끊고 결별하고 말았다.
익히 송시열은 예송논쟁을 일으켜 남인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예송논쟁은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가 사망하자 서인은 상복 입는 기간을 기년설(만1년)을 주장한 반면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다 결국 기년설이 채택되며 남인이 몰락한 사건이다.
당시 남인의 영수는 윤휴(尹鑴 1617~1680)였다. 서인이지만 남인과도 교유했던 윤선거는 송시열에 대해 너무 교조적이고 너그럽지 않다고 비판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몰래 빠져나온 송시열의 시비를 따지기도 했다. 이에 송시열은 자신과 결별하지 않으려면 윤휴와 절교하라고 윤선거를 압박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결국 윤증은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老論)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었다. 윤씨들이 많이 등장해 전부 파평윤씨가 아닐까 싶어 찾아보니 윤증은 파평윤씨, 윤휴는 남원윤씨, 예송논쟁에서 패배해 윤휴와 함께 축출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는 해남윤씨였다.
그동안 해남윤씨는 윤선도가 시조이며 파평윤씨에서 갈라져 나온 줄 알았는데 이미 고려 문종(재위 1046~1083년) 때부터 해남과 강진에 터를 잡았던 문중이다. 남원윤씨는 파평윤씨에서 분파한 게 맞다. 현재 윤씨는 본관이 약 15곳인데 해남·해평(구미)·무송(고창)·칠원(함안) 윤씨는 파평윤씨의 분파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서인은 젊고 의리를 중시하는 소론의 윤증과 노회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노론의 송시열로 양분됐는데 그들의 정신적 고향이 충남 논산이었다는 게 의외였다.
윤증은 관계 진출의 등용문인 과거를 거치지 않고 여러 요직에 천거됐다. 그만큼 학문과 언행이 뛰어났으나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이조판서, 우의정, 대사헌에 제수되고도 논산 노성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데 열심이었다. 임금을 알현하지도 않고 우의정에 제수된 이는 오직 윤증 한 사람뿐이다. 이 때문에 ‘백의(白衣)정승’ 이란 별칭이 붙었다.
재미있는 것은 대사헌(大司憲)은 지금의 검찰총장과 같은 직위인데 요즘 ‘식물총장’으로 핍박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윤석열 검찰총장도 윤증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집세고 꼿꼿한 피가 흐르는 것일까. 다만 고집불통 송시열과 맞서 분파한 것을 보면 윤증은 선친인 윤선거와 달리 유연성과 포용성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윤증고택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북한군이 점령해 사령부로 썼다. 이에 미국 공군이 폭격하려 하자 당시 박희동 부대장(예비역 준장)이 미 공군 작전대장에게 쫒아가 폭격하지 말라고 간청해 화마를 면했다고 한다. 박희동 부대장의 고향이 바로 노성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를 겪고 잘 보존돼 온 윤증고택은 쇠 못 하나 없이 순 목재로만 지어졌고 가옥의 배치가 뛰어나 국가민속문화재 제190호로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다만 19세기에 현대적으로 개축된 것을 내년에 원래 양식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이뤄진다고 한다.
허름한 초가에서 거처하던 윤증을 위해 제자들이 이 집을 지어 바쳤지만, 평생을 청빈하게 살아왔던 윤증은 “큰 집이 내게 과분하다”며 들어가 살지 않았다. 간결한 지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명재고택은 이후 후손들이 직접 살며 관리해왔다. 대표적인 건물인 사랑채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친숙한 느낌을 준다. 뒤의 산과 구릉, 앞의 연못과 너른 들판이 공간의 미학을 연출해내며 한국의 정취를 자아낸다. 해마다 8월이면 백일홍이 아름답다는데 9월말이라 시들어가는 꽃잎이 코로나19로 속절없이 흘러간 올 한해처럼 아쉽기만 하다.
연못에는 부평초가 가득차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쉴 새 없다. 고택 오른쪽 편(동쪽)에 수백 개의 장독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하다. 이 곳 윤증의 초상화는 국가보물 1495호로 지정될 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명재고택에서 한 시간 남짓 소요하고 논산시 연산면 임리의 돈암서원(遯巖書院)으로 향했다. 광산 김씨의 대표적 유학자인 사계 김장생을 모신 서원이다. 2019년 7월 유네스코가 지정한 한국의 9개 유네스코 세계유산 전통서원 중 한 곳이다. 1634년(인조 12년) 김장생 사후에 그의 제자와 유림들이 힘을 모아 창건했다.
1660년(현종 원년)에 사액했고 흥선대원군이 전국 650여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철폐했을 때에도 살아남았다. 앞으로는 연산천(사계천), 뒤로는 고정산 산줄기가 흐른다. 좌로는 계룡산, 우로는 대둔산이 호위하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례사(崇禮祠)·양성당(養聖堂)·응도당(凝道堂)·장판각(藏板閣)·정회당(靜會堂)·산앙루(山仰樓)·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과 하마비(下馬碑)·송덕비(頌德碑)가 있다.
숭례사는 김장생을 먼저 주향하고 1658년(효종 9년)에 김집, 1688년(숙종 14년)에 송준길, 1695년에 송시열을 추가 배향했다. 이들 4인은 나중에 서울 성균관 문묘에 모두 모셔져 돈암서원을 선정(先正)서원이라고도 한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숭례사를 출입하는 내삼문의 담장에는 지부해함(地負海涵 땅과 바다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을 넓히고 예의를 지켜라), 서일화풍(瑞日和風 좋은 날과 부드러운 바람처럼 사람을 편하게 대하라) 등 12개의 글자가 전서(篆書) 문양으로 새겨겨 담벼락을 장식하고 있다. 서원에 화사한 꽃담이 둘러쳐진 것은 이례적이라고 한다.
양성당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년)의 수제자이자 광해군 옹립에 앞장섰던 북인의 영수 정인홍(鄭仁弘, 1535~1623)과 대립했던 김장생이 벼슬을 두고 연산으로 내려와 아한정(雅閑亭)의 유지(遺址)에 지은 서재로 돈암서원의 출발점이다. 원래 임리의 숲말 산기슭에 있었는데 사계천이 홍수로 범람하자 1880년(고종 17년)에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숭례사 바로 앞에 자리 잡았다.
모든 서원은 동서 좌우에 각각 하나씩 기거하며 학습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도 각각 좌우에 거경재(居敬齎), 정의재(精義齋)가 있다.
정회당은 김장생의 부친인 김계휘의 서재였다.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산35-3의 구 고운사에 경내에 있던 건물과 현판을 이곳에 옮겨왔다.
응도당은 보물 1569호로 책을 보관하고 강학하던 대강당이었다. 1880년 이전 당시 옮기지 못하고 남아 있던 것을 1971년 이축해왔다. 앞서 양성당이 강학 기능을 담당하고 정중앙에 배치돼 있어 응도당은 서원의 좌측 앞편에, 양성당 및 사당과는 직각으로 배치돼 있다.
응도당은 예학을 중시하는 김장생이 ‘의례’와 ‘주자대전’에서 고증한 대로 논산 강경의 황산서원(현 죽림서원)을 창건했을 당시와 동일한 건축양식과 배치를 시행했다고 전해진다.
현존 서원 강당 건물로는 거의 유일하게 고대 예서에서 규정한 하옥제도(厦屋制度)를 본받아 지어졌다. 중당(中堂)과 그 좌우의 동서상(東西廂), 중당 뒤에 중실(中室)과 좌우방(左右房)과 동서 협실(東西 夾室, 쪽방)을 두고, 지붕은 맛배지붕 형태에 양 측면에 덧지붕의 일종인 영(榮)을 드리우는 게 하옥의 기본 양식이다.
응도당은 처마의 암막새 기와에 새겨진 명문으로 볼 때 1633년(인조 11년)에 처음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여느 서원 건물과 달리 웅장하고 위용당당하며 튼튼하게 보였다.
숭례사와 정회당 사이의 장판각은 김계휘, 김장생, 김집의 책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김장생의 전서와 유고의 판각은 본래 4168개였는데 지금은 멸실해 1841개만 전해진다. 사계전서 51권 26책, 가례집람 10권 6책, 경서변의 7권 3책으로 모두 전해지지 못한 게 아쉽지만 우리나라 인쇄문화 발전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원 앞의 산앙루는 최근에 지은 전망대 역할을 하는 누각이다. 이밖에 돈암서원과 가까운 연산면 고정리 일대에 김장생의 7대 조모로 광산 김씨의 중흥을 일군 양천 허씨의 묘소와 정려각, 그 아들인 김철산, 그의 후손인 김경광, 김공휘, 김선생 등의 묘소와 김계휘, 김장생 묘소와 신도비 등이 밀집해 있다. 김장생의 사당과 재실인 염수재(念修齋)도 여기에 있다.
충남이 기호학파(호서학파), 서인의 본산인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퇴계 이황이 동인, 율곡 이이가 서인의 출발점이라고 하지만 이황이 서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기호학파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확인했다. 충청도에서 대권을 잡지 못했다고 억울해하지만 조선시대 후기에 이미 누릴 만큼 누렸던 게 아닐까.
기자의 유네스코 9대 서원 순례 중 이제 남은 곳은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 대구 도동서원 두 곳이다. 경주 옥산서원도 2015년 1월에 인근 양동마을에 들렀을 때 가봤지만 너무 어둑해서 별 기억이 없다. 뭘 채우려는 욕심으로 둘러보지만 욕심을 비우라는 가르침은 얼핏 유교에서 부족한 것 같다.
유학의 가르침을 잘 살렸다면, 예컨대 예(禮)나 의(義)보다는 인(仁)과 경(敬)을 상대적으로 중시했다면 날카로운 한국인의 삶도 한층 부드러워지고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정종호 기자·약학박사 help@heal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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