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 우암, 소론 명재의 무대 論山, 강경의 영화는 스러지고…
2019-10-15 17:14:43
스케일 큰 개태사와 관촉사 미륵불, 탑정호 … 돈암서원은 서인의 본산, 명재고택은 소론 영수 윤증의 옛집
삽상한 바람과 코끝에 와 닿는 낙엽 내음이 좋은 가을이다. 시나브로 가을 기운이 더해가는 산천이 마음을 더없이 설레게 해준다. 충남 논산(論山)은 타들어가는 산하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한국적인 멋을 고스란히 보고 느낄 수 있는 고장이다. 육·해·공 삼군 사령부가 있는 계룡대와 대한민국 남자라면 잊을 수 없는 논산훈련소가 있는 곳이어서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논산을 대표하는 두 사찰, 개태사와 관촉사
첫 답사지는 서대전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변,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개태사개태사(開泰寺)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한 기념으로 936년에 세운 절이다. 태조는 절을 세우면서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부처의 위력과 하늘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달라는 기원문을 손수 지어 바쳤다고 한다. 창건 당시 하나의 촌락을 이룰 정도로 큰절이었지만 고려 말기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점차 사세가 기울고 말았다. 그 후 조선시대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태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가마솥이 있어 그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이 가마솥은 옛날에 절집 승려들이 국을 끓이고 밥을 지을 때 썼던 것이다. 경내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오층석탑이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단정하고 소박한 멋을 느낄 수 있다.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상(보물 제219호)도 볼 만한데 투박하지만 친근한 표정으로 방문객들을 반긴다.
은진면 반야산 기슭에는 관촉사(灌燭寺)가 있다.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4km 정도 떨어져 있는 이 절 또한 사연이 깊다. 우람하게 솟은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계단길이 이어진다. 새롭게 단장된 보재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2층 규모의 대웅보전과 그 앞에 미륵전이 반긴다. 관촉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온화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이다. 흔히 은진미륵이라 부르는 이 석불은 높이가 18m에 달한다. 몸체와 머리 부분을 따로 조각해 연결한 석불은 단아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마, 턱, 눈, 코, 입, 귀는 하나같이 모두 크다. 어깨까지 내려온 귀, 가슴까지 들어 올린 양손, 좁은 어깨에는 법의가 걸쳐져 있다.
맑고 푸른 탑정호, 곁에선 ‘계백의 최후’
부적면 신풍리와 가야곡면 종연리에 걸쳐 있는 탑정호((塔亭湖, 논산저수지)는 대둔산의 맑은 물이 운주와 양촌을 거쳐 거대한 호수를 이룬 곳이다. 논산 들녘에 물을 공급하는 생명의 젖줄이자 내륙의 작은 바다다. 상류 쪽에 오염원이 거의 없는 탓에 물이 맑아 잉어, 쏘가리, 메기 같은 담수 어종이 풍부하다. 호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새벽녘 물안개 필 때나 일몰 무렵이 좋다. 저녁 해가 만든 노을은 드넓은 호수를 붉은 물결로 가득 채운다. 그 환상적인 모습을 담기 위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모여든다.
1백90만평에 달하는 호수 면적은 충남 예산의 예당호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탑정호는 철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11월이면 호수 위로 한가로이 노니는 오리, 고니 같은 철새들을 볼 수 있으며 전망대와 자연학습원이 있는 수변공원은 가족끼리 연인끼리 깊어가는 가을날 한 때를 보내기 좋다. 호수를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나무랄 데 없다.
탑정호 끝머리의 신풍리 마을은 우리 역사를 증언하는 곳이다. 계백장군이 신라 군대와 맞서 싸웠던 황산벌이 바로 이곳이다. 속칭 ‘놀뫼’라고도 하는 황산벌은 지금 밭으로 변하고 일부는 호수에 잠겨 그 흔적이 묘연하다. 놀뫼는 논산의 옛 이름이다. 땅 빛깔이 누런색이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의 논산은 놀뫼와 발음상 가까운 한자를 골라 붙인 게 굳어진 것이다.
신풍리 수락산 기슭에 계백장군의 묘가 있다. 당시 백제군은 황령산성, 신작리산성, 모촌리산성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신라군에 밀려 수락산, 충곡리, 황산성으로 물러나 최후를 마쳤다. 이 수락산 기슭은 계백의 결사대가 마지막으로 쓰러진 곳이다. 계백 장군 묘소 아래에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충장사와 백제시대의 유물을 비롯해 그 시대의 군사 모습을 재현한 백제군사박물관이 있다. 국궁, 승마 같은 체험을 즐길 수 있는 시설도 들어섰다.
단아하고 유려한 명재고택, 파평윤씨 집성촌
노성면 교촌리에는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면모를 잘 간직한 명재고택이 있다. 가장 한국적인 한옥으로 평가받는 이 단층집은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으며 지금도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 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아담하게 꾸며진 연못과 정원은 유려한 기와지붕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처마선이 보여주는 멋과 누마루의 투박함이 옛 정취를 물씬 자아낸다. 화려하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고고한 선비의 기상과 품격이 집 곳곳에 올올이 스며들어 있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은 소론의 영수로서 권세를 장악하고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일화로 유명하다. 고택 안에는 명재 선생의 후손이 운영하는 ‘노서서재’라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고택 앞마당에 가지런히 놓인 수백 개의 장독대들이 300년 명문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듯하다. 명재고택이 있는 교촌리 마을은 파평 윤씨의 집성촌으로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충남의 명당으로 꼽힌다. 고택 좌우로 노성향교와 노성산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1km 거리에 파평 윤씨 종학당과 재실이 있다.
옛 강경의 영화와 근대문화유산
전라북도 장수군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무주(설천), 금산(적벽강), 영동(양강), 청주(대청호), 대전, 세종, 공주(웅진강, 곰강), 부여(백마강)을 거쳐 강경읍내에 이른다. 금강 본류는 이곳 강경에서 지류인 논산천, 노성천, 강경천과 합류해 대해로 유유히 흘러간다.
강경은 무엇보다 젓갈 산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강경이 수산물 집산지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후기 객주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그 당시 강경에는 배를 10여척씩 부리는 객주들이 20여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서해 어장에서 잡은 조기, 갈치, 민어, 홍어, 게, 전갱이, 새우젓 등을 싣고 와 이곳에서 전국으로 유통시켰다. 강경읍 태평리 일대에는 100여개가 넘는 젓갈 상점들이 모여 있다.
금강변에 서 있는 황산포구(강경포구의 옛 이름) 등대(높이 11.4m)도 볼만하다. 이 등대는 그 옛날 금강 하류에서 서해의 어물을 싣고 들어오던 어선들의 길잡이 구실을 했다. 그러다가 1987년 황산대교가 생겨나고 도선 사업이 중단되면서 등대는 철거되었고 지금의 등대는 그 후에 복원한 것이다.
강경포구 옆 바위산 중턱에는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이 세운 팔괘정(八卦亭)이 있다. 금강을 앞에 두고 서향으로 배치된 이 정자는 넓은 대청과 온돌방이 꾸며져 있는 겹처마 팔작지붕의 한식 기와집이다. 팔괘정에서 금강을 끼고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옥황상제의 전설이 서린 옥녀봉이 우뚝하다. 옥녀봉에 오르면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 줄기와 전통미 물씬 풍기는 강경읍내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논산에서도 강경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신동국여지승람’에 처음 이름을 올릴 만큼 역사가 깊다. 읍내 곳곳에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이 이를 잘 증언해준다. 강경여중고 맞은편에 있는 강경중앙초등학교의 강당, 강경상업고등학교 안에 있는 구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 옛 남일당한약방,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강경역사문화박물관),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 등이 대표적인 근대문화유산이다.
기호학파의 한 축, 돈암서원과 죽림서원
논산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린 서원도 있다. 연산면 임리에 있는 돈암서원(遯巖書院, 사적 383호)이 그곳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활상과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타계한 지 3년 후인 1634년(인조 12년)에 후학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학풍을 이어받은 기호학파(畿湖學派)로서 예를 중시한 인물로 유명하다. 서원에는 교육시설을 중심으로 강당인 응도당(凝道堂, 보물 제1569호)과 양성당(養性堂)을 비롯해 돈암서원의 역사가 쓰인 원정비, 많은 책판과 왕실의 하사품이 보존돼 있는 장판각, 성현의 위패를 모셔놓은 숭례사(崇禮祠),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 사계 선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 선생께서 머물던 정회당(靜會堂)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인조 4년(1626)에 창건했던 강경 황산리 죽림서원(竹林書院, 창건 당시엔 황산서원)의 규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김초록 여행작가 rimpyung74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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