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2 14:52:30
낙화암 인근 순국한 백제 여성을 기리는 백화정
백제는 위례성(서울 송파구, 강동구 일대 추정)과 웅진성(충남 공주)에 이어 세 번째로 사비성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지금의 부여땅이다.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는 천도한 538년부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배할 때까지 약 123년간에 걸쳐 찬란한 백제 문화를 꽃피웠다. 찬란한 제2의 전성기를 보내다 의자왕의 과도한 전쟁 수행과 개인적 일탈로 망국의 길에 빠져들었다
최근 부여가 과거의 낙후되고 쇠락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백제의 왕도로서의 영광을 되찾아가고 있다. 2015년 유네스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는 백제의 옛 수도인 공주, 부여와 백제의 별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익산 지역의 주요 유적지 8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부여에서는 관북리 유적지와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나성 등 모두 4개의 유적지가 등재됐다.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백제 문화가 기지개를 켜면서 땅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전율이 느껴지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다시 찾은 부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전과 후로 나뉘어도 무방할 정도로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이다. 도시는 아름답게 단장됐고 오랜 고증과 긴 공사 기간을 통해 백제 왕국의 왕궁이 복원돼 옛 왕국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이제 패망한 왕조라는 수식어는 잊어버리고 찬란한 고대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시간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사비시대의 전성기를 미니어처로 재현한 백제문화단지
부여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무조건 백제문화단지부터 둘러 볼 것을 권한다. 일반적인 백제 역사여행 코스는 백제문화단지-낙화암-관북리 유적지-정림사지-궁남지로 이어진다.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조성된 백제문화단지는 백제의 궁궐 사비궁과 백제의 사찰, 고분, 위례성, 마을 등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대규모 미니어처다. 예컨대 왕실 사찰인 능사가 능산리사지를 원형으로 삼아 그대로 재현됐다.
비록 재현이긴 하나 말과 글로만 접했던 백제인들의 섬세한 건축 양식과 예술성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문화충격의 시간이 될 것이다. ‘왕들이 술먹고 흥청거리다 망한’ 유약하고 타락한 백제라는 인식 또한 일시에 불식될 것이다.
백제 옛 왕궁지인 관북리 유적지와 부소산성
부여의 진산(鎭山) 부소산(扶蘇山)은 해발 106m 높이의 나지막한 산으로 한쪽은 완만해 앞쪽으로는 넓은 시가지가 펼쳐지는 반면 다른 쪽은 가파른 절벽을 이뤄 아래로 백마강이 흐른다. 금강의 부여 구간을 부여 사람들은 백마강(白馬江)이라고 한다. 여기서 백마는 흰말이 아니라 백제에서 가장 크다는 의미다. 마가 크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백마강은 부소산을 동쪽에 놓고 남쪽을 향해 달리다가 다시 동쪽으로 흘러 논산 강경을 거쳐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백마강 서편과 남쪽에 평야지대가 있다. 한 마디로 부여는 천혜의 요새를 갖춘 기름진 땅이다. 다만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땅이 기름져서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작고 좁아서 평양이나 경주보다는 훨씬 못하다’라고 논하고 있다(신정일의 신택리지 인용).
부소산 정상부에는 백제가 적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부소산성이 남아 있다. 산 정상부에는 둥그렇게 띠를 두른 듯한 테뫼식 성을 쌓는 한편, 능선을 따라서는 2.5km에 달하는 긴 포곡식 성(包谷式 城, 골짜기를 끼고 정상부와 능선을 이루며 축조한 성)을 쌓았다. 사비성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나성과 동서 방향으로 연결돼 있다.
이렇게 2중 3중으로 방어벽을 쌓아 적의 침략에 대비했음에도 660년 밀려드는 나당연합군에 패배하고 말았으니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도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는 듯 싶다.
부여(扶餘)라는 지명은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의미를 담았다. ‘새벽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 패망한 왕국의 수도로 각인돼 있을 뿐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부소산성에는 삼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을 비롯해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천년고찰 고란사, 백제 군대의 곡식창고였던 군창대(군창지), 수복사지, 삼충사, 사자루, 영일루 등 백제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모두 부여읍 쌍북리에 있다.
삼충사(三忠祠)는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 등 백제의 세 충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성충은 의자왕에게 국운이 위태로움을 간언하다가 투옥됐다. 흥수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신라 육군이 탄현(炭峴 충북 옥천군 식장산 주변)을 넘지 못하게 하고 백마강 기벌포(伎伐浦 충남 서천군 장항읍 금강하구)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면 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진언했으나 의자왕과 간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백은 논산시 황산벌(연산면 일대)에서 김유신 장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일제 강점기 말엽에 조선총독부는 삼충사 터에 도쿄 신궁에 버금가는 부여 신궁을 지으려 했다. 백제에 뿌리를 둔 일본 왕가가 참배하기 위한 장소로 무려 6만5000평 규모였다. 조선인의 황민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신궁 공사는 초기에 중단됐다. 1957년 이 터에 새로 지은 게 지금의 삼충사다.
영일루와 가까운 군창대는 군량미를 비축해 둔 창고터이다. 부소산성의 중심에 가깝다. 그러나 지금은 소나무가 우거지고 잡목에 묻혀 찾기 힘들다. 이들 유적은 모두 구비구비 이어지는 숲길에 자리 잡고 있으니 부소산성 여행은 숲길 따라 걷는 역사 여행이라고 해도 좋다.
영일루의 정반대편(서쪽)에 반월루(半月樓)가 있다. 백마강과 구드래나루터, 구드래들판, 부여읍내를 두루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다. 생명의 근원인 일출을 보는 영일루에 비해 낙조가 더 어울리는 자리다. 백제에 대한 애수 탓에 왠지 달빛이 더 슬퍼 보일 수 있다.
사자루(泗泚樓)는 1823년 임천군수(부여군수) 심노승이 부여 임천면 관아의 정문에 세운 누각을 1919년 부소산성의 정상부인 송월대(送月臺, 달을 보던 포인트) 자리로 이축한 것이다. 원래 이름인 개산루(皆山樓)였는데 의친왕 이강이 쓴 친필 현액에 따라 사자루로 개명했다.
아름다운 부소산성 소나무숲 … 고란사에서 구드래까지 나룻배 유람
부소산성 숲은 2002년 산림청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한 명품 숲이다. 부소산성 길은 전혀 고생스럽지 않다.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산책하듯 쉬엄쉬엄 걸을 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실제로 편안한 차림의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눈에 많이 띈다.
부소산성의 숲길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어느 길로 갈지는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늘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서는 어느 길을 택하든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길에서는 깊고도 그윽한 숲의 기운이 느껴진다. 반면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은 활기가 있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태자골 숲길’은 부소산성의 여러 숲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이 길은 이름 그대로 백제의 태자들이 거닐던 길이었다. 숲길을 따라 주변에는 태자들이 마셨다는 태자천과 궁녀사, 창포 군락지, 삼나무 시험 재배지 등이 있다.
부소산성 숲의 특별한 가치는 우리 토종 소나무숲에서 찾을 수 있다. 부소산의 백제 당시 이름이 ‘솔뫼’였던 것으로 볼 때 소나무의 역사가 깊다. 이리저리 휘면서도 끝내 살아남아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들은 언제나 감동스럽다. 살아남기 위한 소나무의 치열한 생존법을 아는 순간 그 감동은 이내 안쓰러움으로 바뀐다. 소나무는 햇빛을 받아야만 자라는 나무다. 때문에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다른 나무들보다 더 높이 자라거나 다른 나무들이 웃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 소나무는 특유의 성분을 품어내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소나무의 천적이 있으니 바로 참나무이다. 참나무는 웬만한 환경에서는 다 잘 자라기 때문에 숲을 평정해 버린다. 이른바 천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 숲에서 60%가 넘었던 소나무 숲의 비율은 2010년대에는 23% 정도까지 떨어졌다. 자연적인 천이 외에도 재선충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소나무 숲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잘 보존되고 있는 부소산성의 우리 토종 소나무 숲이 더 귀한 이유이다.
다만 지금의 소나무는 백제 당시의 소나무가 아니다. 신라가 부여에 불을 질러 7일 동안 화염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건국 이후 조림사업으로 새로 심은 것들이다. 그 중 일본 리기다소나무도 일부 포함돼 있다.
한참 우리 토종 소나무숲에 머물렀던 발걸음이 이내 낙화암(落花巖)에 이른다. 낙화암은 백마강가에 서 있는 높이 40m의 절벽이다. 패망한 백제 왕조의 삼천궁녀가 이곳에서 몸을 던져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의 장소이다. 지금은 백제의 아낙들이 적군에 쫓기다 사로 잡혀 욕을 당하는 게 실어 투신했을 것이라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의자왕은 방탕한 생활로 백제의 멸망을 자초했다는 비난을 받지만 집권 초기에는 능숙한 외교와 부국강병으로 민심을 얻었고 효심과 형제애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패망한 역사에 대한 변명은 비겁할 뿐이다.
낙화암 정상에는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를 1929년에 세웠다. 그 옆에는 ‘천년송’ 한 그루가 호위무사처럼 서 있다.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꽃처럼 몸을 날려 자신을 지키야 했던 그 절박한 목숨들을 기억하는지 백마강은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삼천궁녀의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고란사 뒤편의 약수는 백제 왕들의 어용수로 유명하다. 백제왕들에게 고란사 약수를 증명하기 위해 고란사 주변의 기암괴석 사이에서 자라는 고란초를 물에 띄워 바쳤다고 한다. 고란사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고란사에는 고란정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약수를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얘기에 관광객들이 줄지어 두세 번 약수를 음미한다.
고란사 바로 아래에는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황포 돛배에 몸을 싣고 백마강을 유유자적한다. 부소산성의 빽빽한 숲 사이로 고란사와 낙화암이 보인다. 내려다봐도 아득하고, 올려다봐도 아득하다. 유람선은 서쪽의 구드래나루터까지 운행한다.
백제시대부터 외국 사신들이 드나들던 구드래나루터에는 햇살받은 나룻배와 유람선들이 정박해 있다. 나루터 제방길을 따라 구드래조각공원, 관광단지 등이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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