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의 쌍별 ‘석파정’과 ‘환기미술관’ … 한국적 정원과 추상미의 어우러짐
2020-08-21 19:26:55
계곡·정자·고택·정원·미술관 서울 도심에 이런 ‘황홀경’ … ‘어디서 무엇이 돼 다시 만나랴’ 樹話詩學의 푸른 점 파동
서울 종로구 부암동엔 2개의 보물이 있다. 석파정(石坡亭)과 환기미술관이다. 기나긴 장마, 코로나블루로 우울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2주에 걸쳐 수요일 점심에 짬을 내어 가깝고도 먼 서울의 유니크한 숨은 명소 두 곳을 다녀왔다.
석파정에 들어서니 자하문 터널로 오가는 차량이 다니는 큰 길가 담벼락 너머 이런 곳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익히 별천지 같다는 명성은 20여년 전부터 들어왔으나 공사 때문에 두 번 허탕을 쳤던 이곳을 끝내 볼 수 있었다. 대로변 1층 입구동에서 표를 끊고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나와 실외로 첫 발을 디딘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탁 트인 공간이 열리더니 부암동 계곡물과 너럭바위, 고택(사랑채)과 노송(천세송)이 한눈에 들어왔다. 1990년 군인 시절 휴가 나와서 창덕궁을 관람한 것에 버금가는 경이로움이었다.
‘살아 있는’ 대원군 흥선이 장동김씨 영의정에게 빼앗은 욕심나는 비밀의 정원 石坡亭
석파정은 조선시대 영조 때 수원부사·한성판윤·형조판서를 지낸 오재(寤齋)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이 처음 만든 별서(別墅·교외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였다. 바위산인 인왕산 북동쪽 끝 기슭에 있다. 현재의 별서는 주로 19세기 중후반 영의정 김흥근(金興根 1796 ~ 1870)과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조성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철종 재위 시 당대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안동) 김씨 김흥근의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 三溪洞山亭)를, 아들을 왕위에 올린 ‘살아 있는’ 대원군 이하응이 1864년 빼앗아 석파산장(石坡山莊)으로 바꿨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에게 삼계동산정을 팔라고 종용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왕이 한번 자고 간 곳은 신성시돼 아무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에 착안, 아들 고종을 하룻밤 머물게 함으로써 석파정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이는 권력이동의 상징이 됐다.
사랑채 위쪽 거북바위엔 ‘삼계동’이란 각자가 있다. ‘세 시냇물골’이란 뜻으로 부암동의 옛 지명이다. 석파는 ‘돌언덕’이란 뜻으로 석파정이 들어선 위쪽의 거대한 바위언덕을 말한다. 이하응은 바위언덕과 고택과 정자에 매료돼 호를 석파로 바꾸었고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이라 칭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이 한창일 때에는 흉배에 기린을 수놓았는데 실각 후에는 거북으로 바꿨다고 한다. 권력을 놓쳤으니 장수하겠다는 심리의 변화가 흥미롭다.
석파정의 건물들은 대원군 당시 8채였으나 지금은 안채·사랑채·별채·석파정 등 4개만 남아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별채와 여기로 들어가는 협문, 꽃담은 왕족의 권위를 말해준다. 사랑채는 주인이 외부 손님을 맞는 곳으로 이 곳의 중심부다. 사랑채 앞에는 650년의 세월을 이겨냈다는 천세송이 있다. 이 노송은 서울시 지정보호수 60호로 지정돼 있다.
별채는 고종이 방문해 잠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고종은 대원군 사후 종종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고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교차했을 것이다. 석파정을 관리하는 석파문화원은 이 곳을 ‘왕이 사랑한 정원’이라고 내걸었는데 사랑보다는 속세의 때를 씻어내고 회한을 달래는 공간이 맞을 것 같다.
흐르는 계곡물 위에 앉은 석파정은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청나라 양식이 조화돼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됐다. 정자에 남아 있는 청나라풍의 문살 모양과 지붕, 정자로 건너가는 평석교(平石橋), 마루가 아니라 화강암으로 조성된 바닥 등은 이국적 취향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품어낸다.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로 불리기도 하는데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란 뜻이다.
석파정 들머리의 바위에는 ‘소수운렴암’(巢水雲簾庵)이라고 쓴 초서가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가 조정만에게 써준 글씨다. ‘물이 깃들고 구름으로 발을 드리운 집’이란 뜻이다. 장마 끝이라 제법 유량이 많았고 마침 백일홍과 수국, 맥문동 꽃도 피어 서울 도심의 뜬금없는 계곡 풍경이 이채로웠다. 들머리 너럭바위에는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이 앉아 있다. 본래 경주의 개인 소유 경작지에 있던 것을 수습해 2012년 이것으로 옮겨놓았다. 완만한 경사와 부드러운 곡선의 정감 있는 탑이다.
석파정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언덕바위는 ‘코끼리바위’, ‘소원바위’로 부른다. 코끼리 모양을 닮았고 사람들이 소망을 기원하는 곳이었다. 인왕산의 웅장함의 끝을 보이는 기가 센 바위다.
대원군 사후 고아원·병원에서 석파문화원(유니온약품) 소유 문화재 및 미술관 돼 … 국보 승격 준비고아원
석파정은 대원군 사후 50여 년간 후손들이 사용했다. 6.25전쟁 직후에는 고아원인 콜롬바어린이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잠시 병원으로 쓰이다가 개인 소유가 됐다. 2004년 12월 개인 소유자가 부채 10억원을 감당하지 못해 감정가 75억4600만원으로 경매에 내놨으나 두차례 유찰돼 감정가의 64%인 48억2900만원까지 떨어졌다.
1종 일반주거지역으로 지정된 1000여평을 제외한 나머지 약 88.9%의 부지가 개발제한구역과 문화재보호구역, 군사시설보호구역 등으로 묶여 있어 낙찰이 쉽지 않았다. 이에 2006년 1월 13일 의약품 유통업체인 유니온약품그룹의 안병광 회장이 익명으로 응찰해 감정가의 83%인 63억1000만원에 낙찰받았다.
안병광은 석파문화원을 설립하고 이 곳에 석파정 서울미술관을 개관했다. 여기에 자신이 평소 수집해온 이중섭의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안 회장은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출발, 자수성가했고 35억6000만원을 들여 이중섭의 ‘황소’를 사들인 것을 비롯해 명작 400여점을 수집한 컬렉터다. 이 미술관은 500평으로 삼성그룹의 리움미술관에 이어 두번째 규모다. 서울시립미술관(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분관(소격동) 등은 국공립이지만 이곳은 사립이다. 지난 5월 6일 석파문화원은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석파정’을 국가문화재로 승격시키는 절차를 시작했다.
석파랑, 소전 손재형이 일군 구한말 한옥 건축양식의 컬렉션 … 석파정 별당 이축, 지금은 한식당
석파정과 헷갈리기 쉬운 게 석파랑(石坡廊)이다. 석파랑은 본래 석파정의 별당이었다. 김흥근의 삼계동산정 별당 월천정(三溪洞山亭 別堂 月泉亭)이었다가 대원군 이하응의 석파정 석파랑(石坡亭 石坡廊)이 됐다가 허물어진 것을 서예가이자 동양화가인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수습해 지금의 홍지동 세검정(洗劍亭) 삼거리에 옮겨 놓은 것이다. 개인 소유이며 현재 한식당으로 운영 중이다.
소전은 전남 진도 출신으로 홍익대 미대 교수, 국전 심사위원, 제4대·8대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이다. 소전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연구에 일가를 이뤘던 경성제대 교수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1879~1948)가 ‘세한도’(歲寒圖)를 갖고 1943년 일본으로 귀국하자, 이듬해 거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스카의 집으로 100일간 문안하며 그림을 넘겨달라고 간청했다. 감복한 후지스카는 “결국 내가 졌다”며 돈도 받지 않고 세한도를 건넸다. 석 달 뒤 후지스카 집은 폭격을 맞아 그가 소장한 상당수 책과 자료가 불타버렸다. 극적으로 세한도가 살아남은 것이다.
세한도는 1958년 소전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자금이 필요하자 경매에 내놨고, 이를 개성 출신의 갑부인 손세기 씨가 사들였다. 지난 20일 손세기의 장남인 사업가 손창근 씨가 10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귀향 온 자신의 불우한 처지와 절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한도의 배경이 석파랑이란 설이 있다. 추사가 과거에 김흥근의 별서에 놀러갔다가 본 한옥과 정원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림에 담았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석파랑은 1958년 소전이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 본래 부암동에 있던 석파정 별당을 뒤뜰에 이축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앞쪽으로 돌출된 큰 방을 썼다. 난초를 그릴 때에는 대청을,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건넌방을 사용했다. 붉은 벽돌, 원형과 반원형의 창은 청나라풍의 건축 특징을 보여준다. 정면 툇마루의 난간과 고급스런 자재는 조선 후기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별장 건축물임을 말해준다.
소전은 자신의 전문적 식견과 지위를 활용해 일제 강점기 김옥균 가옥·박영효 가옥·이완용 별장 등 유명한 한옥이 헐릴 때, 특히 덕수궁 돌담이 철거될 때 자재를 옮겨와 석파랑의 한옥이나 돌담 정원에 사용했다. 석파랑의 만세문(萬歲門)은 고종황제 즉위를 기념해 경복궁에 세웠던 기념물이다. 중국의 천자나 황제만이 만세를 쓰고 그 제후국에 해당하는 조선 등은 천세만을 불러야 했으니 만세정은 정정당당한 독립국임을 알리는 상징물이었다. 벽돌 구조에 구름 사이로 불로초를 물고 나는 한 쌍의 학과 박쥐(박쥐 蝠, 복 福자와 동일한 의미를 담음) 문양으로 장식하고 기와지붕을 얹었다. 일제 강점기에 매각한 것을 소전이 사들여 옮겼다.
이 곳 본채(현재 한식당)는 순종황제의 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 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겨 중국풍 호벽을 치고 신라와 백제의 와당을 얹었다고 한다.
바로 옆 세검정은 1623년 김류·이귀·심기원·김경징 등이 모여 반정을 모의한 후 칼을 씻으면서 결의를 다진 곳이다. 반정군은 창의문(彰義門)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인조를 옹립했다.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으로 옮겨 도성 방위와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케 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검정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다산 정약용은 청년 시절 세검정에서 비오는 날 폭포 떨어지는 풍경을 즐겼다고 한다.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리는데 4대문과 4소문 중 북소문(北小門)에 해당한다. 북대문(北大門)이 청와대 뒷산(白岳山)의 숙정문(肅靖門)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아방가르드 김환기 … 면 캔버스 위 유채물감으로 한국의 푸른 靑, 우주의 생동감, 따스한 그리움 표현
석파정 앞에서 남으로 올라가면 북악산과 인왕산의 성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왼쪽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른쪽 골목길 아래로 돌아들면 한국적 아방가르드 추상화가 김환기를 기념하는 환기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김환기(金煥基)는 1913년 2월 27일 전남 신안군 안좌도(옛 기좌도)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했다가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서 수학했다.
1948년부터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술학부를 만든 동양미술사학자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과 교유하면서 우리 고미술과 한국미를 새롭게 발견했다. 그가 표현한 산 중턱에 걸린 달, 길게 날아가는 학, 매화 긴 가지 등은 마치 예서체로 이미지를 간소화한 느낌이 난다. 둥글둥글한 백자항아리, 한국의 강·산·바다·구름, 고가구 등 전통기물 등은 푸근한 한국적 정서를 추상으로 시각화했다.
김환기는 1956년 파리로 떠나 4년간 머물렀다. 여기서 예술의 본질과 한국미의 재발견에 눈을 떴다. 한국의 푸른 빛깔(靑)과 서양의 블루(blue)가 다름을 깨달았고 모든 그림이 점의 파동이라고 규정했다. 1965년 이후엔 미국 뉴욕에서 부인 김향안 여사와 체류하며 그만의 색깔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경성시대, 파리시대, 뉴욕시대 중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진정한 독창성은 뉴욕시대에 재정립됐다고 말하고 있다.
1970년 김환기는 김광섭의 시구를 제목으로 단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감동을 담화 전면점화(全面點畵)를 그린다. 필자는 추상화에 문외한이었지만 면 위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수화시학(樹話詩學)의 철학이 담긴 그림을 보면서 우주와 자연에 대한 동경, 고국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등이 빛과 색으로 울려옴을 느꼈다. 유화인데 동양화다운 고즈넉함이 묻어나왔다. 선명한 민족 정취를 세계인이 공감하는 추상화적 기풍에 담아낸 아방가르드가 숱한 그림에서 품어져 나왔다.
김환기의 부인인 김향안(金鄕岸)은 이상의 부인이었다. 오빠의 소개로 1936년 시인 이상(李箱)과 결혼했지만 3개월 만에 남편이 폐결핵으로 도쿄에서 사망하자 과부가 됐다. 7년 후 지인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났다.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이 텄고 재회했을 때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미술관에 전시된 연애편지, 그 중 환기가 그린 삽화가 그려진 편지에 적힌 몇마디 문구가 담백하다.
김향안은 본명이 변동림(卞東琳)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김환기와 결혼하면서 옛 이름을 버리고 환기의 어릴 적 이름인 향안으로 개명했다. 김환기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겠다는 다짐이자 결혼 예물이었다. 내조의 끝판왕이었다는 향안은 문필가이자 미술평론가, 화가로 살았다.
1974년 남편이 작고하자 1978년 환기재단을 설립했고 1992년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열었다.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다. 김환기의 전기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를 썼고 2004년 사랑하는 남편 곁으로 갔다.
부암동의 쌍별인 석파정과 환기미술관, 전통미가 물씬 풍기지만 한국 전통과 이국풍(중국과 서구)이 조화된 두 곳을 보고 코로나블루로 어둑해진 마음이 한층 밝아졌다. 석파정의 산책로에 적힌 짤막한 사랑의 문구와 김환기·김향안의 연예편지도 따스하게 남는 ‘8월의 크리스마스’ 서울기행이었다.
정종호 기자·약학박사 help@heal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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