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촌 현대미술관, 창덕궁 … 10.26사태와 정조 사후 조선 혼란상 중첩
2019-12-12 14:20:56
낙선재엔 경빈김씨 애모한 헌종의 600일 사랑 … 수강재엔 단종과 덕혜옹주의 역경
서울 북촌 두 번째 탐구는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작했다. 국군 기무사령부와 서울지구병원 자리였던 이 곳은 2008년 10월 기무사의 과천 이전, 2010년 서울지구병원의 삼청동 이전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분원이 됐다. 현대미술관은 과천관(1986년 개관)이 본관으로 서울관(소격동), 덕수궁관(석조전 서관), 청주관 등의 분원을 두고 있다.
사실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다. 예상대로 감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추상미술보다 구상미술이, 설치·행위 예술보다 정적·구체적인 예술이 좋은 취향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그저 미술관이 주는 평안함, 군 시설이 민간의 문화시설로 변했다는 시대의 변화가 느껴졌다.
이 자리는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의 전신) 부속의원의 외래 진찰소로 쓰이다가 1933년 증축을 통해 철근콘크리트 3층 건물로 올리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이 됐다. 이후 1930년대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경성육군위수병원이 돼 해방 때까지 이르렀다. 해방 후 서울대 의대 제2부속병원이 됐고 1950년 12월 36육군병원, 1951년엔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복귀한 수도육군병원으로 운영 주체가 바뀌었다. 1971년 수도육군병원이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개편되고 서울 등촌동으로 이전하자 국군수도통합병원의 분원이 되었다가 1978년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정식 창설되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이 이 곳으로 실려왔고 당시 병원장이던 김병수 공군 준장이 사망 판정을 내리면서 한국 현대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당시 보안사령부(나중에 기무사령부,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개칭) 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이 권력을 잡게 된 것도 다 이런 맥락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분관 조성 의견이 제기돼 2008월 7월 3일자로 서울지구병원은 국방부 직할에서 국군의무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됐고, 2010년 12월 17일 삼청동(구 교원소청심사위원회)으로 이전했다. 2013년 11월 드디어 기무사 터에 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섰다. 옛 서울지구병원 건물은 현재 현대미술관의 로비 및 휴게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지구병원은 국가원수 전용 병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전·현직 국가원수와 가족, 총리 및 장·차관급 정부 주요 공직자, 군 장성 등의 진료를 맡고 있다. 엄연히 군병원이라 서울 지역에서 복무하는 군 장병도 진료받으러 갈 수 있기는 하다. 아무튼 현대미술관 관람은 뒷전이고 자꾸만 10.26 사건의 무대였다는 생각만 자꾸 맴도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소격동은 서울지구병원이 제법 큰 넓이를 차지하는데 본래 조선시대에엔 소격서(昭格署)가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소격서는 도교의 상청(上淸)·태청(太淸)·옥청(玉淸) 등 삼청성진(三淸星辰)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정통 성리학자는 소격서를 극렬하게 반대했고 일반 대중은 ‘기도의 신’으로 옹호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소멸됐다. 소격서터는 지금의 삼청파출소 뒤편(소격동 24번지)에 있다. 삼청동이란 동명은 제단인 삼청전(三淸殿)이 위치한 곳이란 의미로 붙여졌다. 삼청이 산과 물, 인심이 맑다 하여 붙여졌다고 하는데 삼청동에 가까운 역대 집권세력은 과연 인심을 맑게 하였는가, 탁하게 하였는가.
소격동 165번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뒤편(동쪽)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호인 종친부(宗親府)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 건물이 있다. 종친부는 종친의 관혼상제를 역대 왕의 계보와 초상을 봉안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옥첩당은 고위 관료의 사무실이었다. 1920년 일제에 의해 정독도서관으로 옮겼다가 2013년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이곳에는 화강암으로 틀이 만들어진 우물이 있는데 1984년 기무사에서 뜰 공사를 하다가 지하 3m에서 발견돼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인근엔 규장각(奎章閣) 자리도 있었다.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정치 혁신을 위하 중추 기구로 설립했으나 차츰 학술·문화의 부흥 동력으로 변모했다. 정조의 명으로 홍문관 대신 왕가의 세보(世譜), 어진(御眞), 어필(御筆), 칙령(勅令), 문서 등을 보관했고 구한말 규장각 및 홍문관이 폐지된 후 조선총독부에서 이들 자료를 관리하다가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 도서관으로 옮겼고 현재도 서울대 규장각에서 관리하고 있다.
시간이 어정쩡해서 11년만에 들러본 창덕궁, 역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궁전이다. 돈화문, 금천교, 궐내각사,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낙선재만을 둘러볼 수 있는 일반 전각관람과 부용지와 주합루까지 볼 수 있는 후원관람으로 나뉜다. 각각 성인 1인당 입장료가 5000원씩이다. 따라서 1만원을 내야 전부 볼 수 있다. 다른 궁궐에 비해 비싸다.
또 봄 가을 1년에 한 차례씩 여는 달빛기행(야간관람)이 무려 3만원이다. 1회에 100명 밖에 모집하지 않는 데다가 30분의 음악공연이 곁들여져서 그렇단다. 요금이 비싸다는 생각도 들지만 외국 여행가서 보니 유서 깊은 멋있는 포인트는 다 그 정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주합루의 화려한 불빛이 부용지에 비친 그 모습은 상상만 해도 대단할 것이다. 물론 사진으로야 봤지만 직접 보는 것은 다르다. 야간 개장의 문호를 더 넓혀 경쟁스트레스에 지친 한국인들이 문화적 에너지를 얻어가길 바랄 뿐이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태조 때 시작해 세종에 이르러 거의 완성됐고 1553년 명종 때 실화로 일부가,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피란가는 선조에 분노한 백성들이 방화해 전부가 소실됐다. 백성이 고의로 방화했는지 여부는 지금도 논란 중이다. 임진왜란 이후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1865년 4월 중건에 들어가 1868년 6월 말에 공사를 마쳤다. 경복궁의 유명무실함이 지속된 273년간 창덕궁이 사실상 정궁 역할을 했다. 확 트인 경복궁 부지와 아늑하게 담긴 창덕궁 경내를 비교하면서 산수와 잘 어우러진 궁궐의 미에 감탄하면서도 여기에 겹쳐진 역사의 한도 보게 된다.
창덕궁의 낙선재(樂善齋)는 이미 조선왕조의 권위가 실추된 헌종(1827~1849, 재위 1834~1849) 13년(1847년)에 왕이 후궁인 경빈김씨를 위해 어렵사리 지은 집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지은 것처럼 헌종은 표면적으로는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낙선재를 건립했다. 아마도 꽤 신하들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헌종은 효현왕후(안동김씨)를 정비로 삼았으나 일찍 죽자 효정왕후(남양홍씨)를 계비를 들였다. 그럼에도 과거 3번째 왕비로 간택됐던 경빈김씨(광산김씨)를 끔찍하게 좋아한 나머지 후궁으로 들였고 자신과 경빈의 사랑채로 사용한 곳이 낙선재다. 바로 옆에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경빈의 처소로 쓰게 하였다. 석복은 복을 내린다는 뜻이다. 이를 지켜보는 효정왕후의 심정을 부글부글 끓었을 듯하다. 하지만 경빈과의 사랑도 헌종이 승하하자 600일만에 끝났다. 헌종은 요즘말로 매끄럽게 생긴 훈남이어서 궁궐의 모든 궁녀들이 성은을 입으려 안달했다고 전해진다.
낙선재는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이 집무소로 사용하고,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영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1966년부터 1989년까지 기거했다. 사대부의 집처럼 단청을 하지 않고 단조롭게 지었다. 정감이 있는 집이나 거기에 서린 사연은 쓸쓸하다. 낙선재는 본래 창경궁에 딸린 부속건물인데 관람의 편의상 창덕궁이 관리하고 있다.
석북헌에 이어진 수강재(壽康齋)는 정조 9년(1785년)에 지어졌다.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壽康宮) 자리다. 순조 27년(1827년)부터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익종 추존)의 별당이었으며, 헌종 14년(1848)에 헌종의 할머니이자 효명세자의 어머니였던 순원왕후의 거처로 중수했다. 고종의 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옹주가 역경의 삶을 삶을 보내다 1962년 귀국해 1989년 7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했고, 장례식도 여기서 치러졌다.
순원왕후는 자신이 안동김씨이면서도 헌종과 철종의 비를 안동김씨로 들였으니 왜 안동김씨가 세도가였는지, 그래서 조선이 왜 그리 무력하게 망했는지를 설명해준다.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풍양조씨)는 안동김씨와 대척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고종을 앉힌 인물이다. 형식적으로 고종은 신정왕후의 양자이다.
정종호 기자 help@heal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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