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 끼고 안강평야 보이는 명당에 회재 이언적 탄생 … 종가는 언덕위, 상민은 그아래 위계 엄격
2010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은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후 더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한옥 자체의 멋과 양반가의 기품 등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양동마을은 월성(경주)손씨와 여강(여주)이씨가 함께 살며 550년 동안 전통을 이어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하회리, 풍산 류씨, 서애 유성룡), 경북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천전리,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경북 봉화군 봉화읍 닭실마을(유곡리, 안동 권씨, 충재 권벌)과 함께 영남의 4대 길지 중 하나로 꼽힌다.
여강 이씨로 처음 양동에 거주했던 인물은 고려 말의 이광호. 그의 손자사위인 류복하가 이 마을에 장가들어 정착했다. 그 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월성 손씨 손소가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해 양동마을에 눌러 살면서 일가를 이뤘다. 이어 이광호의 5대 종손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양동마을로 옮겨와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으로 불리는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이 태어나면서 오늘날 손씨와 이씨가 더불어 살게 됐다. 손 씨는 류 씨의 외손이고, 이 씨는 손 씨의 외손이다보니 양동마을을 ‘외손마을’로 부르고 있다. 조선 초기만해도 남자가 처가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음을 입증해준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포항 방면으로 16㎞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동마을은 하회마을과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하회마을이 물굽이가 돌아가는 S라인에 면한 강마을인데 비해 양동마을은 주산인 설창산(雪蒼山)의 문장봉에서 뻗어 내린 네 줄기의 산등성이와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룬 산마을이다.
하회마을은 비교적 평지로 양반과 상민이 처마를 맞대고 한데 어울려 살았다면, 양동마을은 종가는 높은 곳에 살고 상민은 낮은 곳에 집을 짓는 등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두 마을 중에는 10년 전에 가본 하회마을이 더 고적하고 옛스러우며 마음이 편하게 느껴졌다.

양동마을이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수차례의 전란을 피해 옛 모습을 보존해왔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특이한 지형 덕분이다.
양동마을회관과 매표소를 지나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좌측(서편)엔 한옥 2개동으로 지어놓은 양동초등학교가 우람하다. 여기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저절로 유생이 될 듯하다. 하지만 몰려오는 관광객 때문에 면학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아닐지….
양동마을은 △서백당, 수졸당, 낙선당, 사호당·상춘헌·근암 고택 등이 있는 내곡(內谷) △무첨당을 중심으로 한 물봉골(勿峰谷) △마을 북동쪽의 거림(居林) △마을 입구 동편의 하촌(下村) △물봉동산을 중심으로 한 향단과 관가정 △물봉골 끝 북서쪽 자락의 갈구덕(渴求德) 등 크게 6개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지난 7일 오후 2시 넘어 늦게 양동마을에 도착한 터라 우측(동편)의 안락정과 이향정, 강학당을 건너 뛰고 심수정을 첫 방문했다.
이어 거림 초입을 스쳐 내곡(안골)으로 향했다. 상춘헌·사호당·근암 고택을 둘러보고 서백당과 창은정사를 들렀다. ‘사호당(沙湖堂)’ 편액의 의미는 호숫가의 넓다란 백사장. 왜 산속마을에서 이런 당호를 정했는지 곰곰 생각해보게 한다. 산중에 칩거하면서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는 ‘유취헌(幽趣軒)’의 편액 역시 사호당 주인의 삶과 철학을 담은 듯하다. 사호당과 유취헌은 건립자인 이능승(李能升)의 호다.
회화나무 등 고목에 둘러싸인 심수정(心水亭)은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이언적의 아우 농재 이언괄(聾齋 李彦适 1494~1553)을 추모해 건립한 정자로 양동마을에는 모두 10개의 정자가 전해온다.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을 연기한 최민식 씨가 술병을 들고 심수정의 지붕 위에 걸터 앉은 명장면을 연출했다.


서백당(書百堂)은 종부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 번 쓴다는 뜻으로 근래에 굳어진 당호. 경주 손씨의 종가로 입향조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가 세조 5년(1459)에 지은 집이다. 아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서백당은 사실상 월성 손씨의 종택이나 다름없다. 500년쯤 돼 보이는 향나무가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서백당 옆이 낙선당(樂善堂)이다. 손소의 셋째 아들인 망재(忘齋) 손숙돈(孫叔暾)이 분가할 때 지은 것이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낙선당 손종로(孫宗老 1598~1636)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손종로는 광해군 10년(1618) 무과해 급제해 남포현감(현 보령시 남포면)을 지냈으며 이천의 쌍령전투에서 그의 충성스런 노비 억부(億夫)와 함께 전사했다. 시체를 찾지 못해 옷과 관으로 제사를 지냈다. 손종로와 억부의 충절을 기리는 정충비각(旌忠碑閣)이 정조 7년(1783) 관가정 밑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낙선당은 양반가로는 기단이 낮다. 이 집의 주인은 대대로 집안에 디딜방아를 놓을 정도로 천석꾼이었다. 부자로서 순국한 ‘노블리스 오블리지’라고 칭송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많은 곡식을 양반으로서 거두었으니…. 낙선당엔 사유청문(四維淸門) 세독충효(世篤忠孝)란 현액이 걸려 있다. 사유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예·의·염·치(禮義廉恥) 등 4가지 수칙이요, 세독충효란 대를 이어 충효를 두텁게 하자는 의미다. 낙선당 뒤편엔 손씨 사당이 있다.

낙선당을 내려와 무첨당으로 향하려 하니 푯말이 보이지 않는다. 집주인들이 여기저기 비닐줄로 묶어 통행을 자제해달라는 사인을 보낸다. 통상 오후 4시가 넘으면 이런 일이 빚어진
다고 한다. 사유지이니깐 침범하지 말라는 주문이렸다. 하지만 낸 입장료도 적잖은데 까칠한 양반가의 행태 같기도 하다. 헤매다 우연히 들린 곳이 경산서당이다.
경산서당과 이선당 현액 경산서당(景山書堂)은 무첨당(無忝堂) 이의윤(李宜潤 1564~1597)을 모시면서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본관에 해당하는 이선당(二善唐)과 ‘ㄱ’자로 꺾인 동편에 학진재(學眞齋) 서지재(西止齋)로 나뉘는 양재(兩齋, 별채)가 있다. 이의윤은 이언적의 손자로 명종 19년(1564)에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무첨당과 창산세거 편액. 현액은 설창산에 대대로 살아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가까스로 찾아낸 물봉골의 무첨당은 알고 보니 지도상 양동마을의 중심이었다. 양동마을의 형국인 ‘물(勿)’자의 가운데 줄기 정남향에 자리잡고 있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처음 터를 정하고 살던 집이다. 양동마을 가운데서도 서백당과 함께 풍수지리학적으로 가장 길지로 여겨지는 터에 지어져 있으며, 여강 이씨 종가댁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 역할을 하는 무첨당은 세련된 별채의 기능을 하고 있다. 무첨가물 식품처럼 맑고 곧게 살자는 다짐이겠다. 마루에는 ‘창산세거(蒼山世居)’라고 써붙여놨다. 설창산에 대대로 살아오는 집이라는 뜻이다. 또 무첨당을 찾았던 대원군이 써 준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현액도 걸려 있다. 좌해는 영남지방을, 금서는 풍류와 학문을 일컫는 말로 이곳의 품격을 높게 쳐준 것이다.

무첨당에서 마을 서편 조금 내리막길에 영귀정과 설천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영귀정(詠歸亭)은 이언적이 젊은 시절에 학문을 수학했던 곳으로 대문채인 이호문(二呼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영귀정이라는 편액이 걸린 본채가 있다.영귀정 앞쪽 동편길로 내려오다보면 고색창연한 관가정(觀稼亭)이 눈에 띈다. 조선 중종 때 명신인 우재 손중돈이 손소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 안채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둘러 막아 집의 앞쪽만 트이게 해 형산강과 안강평야가 나지막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풍수사상에 입각한 배치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
관가정에서 향단으로 향하니 해는 이미 서산에 지고 있다. 무첨당이 여강이씨의 종택이라면, 향단은 이씨가 제사를 지내는 보다 공적인 공간으로 보면 된다. 보물 제412호인 향단은 이언적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던 1543년에 지은 집으로 본래 99칸이었으나 6.25 전쟁 중에 일부가 불타 없어져 지금은 56칸으로 줄어들었다. 기와집의 일반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편리성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게 특색이다. 영화 ‘음란서생’의 촬영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양동마을은 4~6월이 관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이 때엔 반가와 초가, 골목할 것 없이 어디를 가나 수백년된 향나무와 산수유, 매화, 목련, 개나리 등으로 꽃동산을 이룬다.
마을 문화재로는 국보 1개(283호 통감속편(通鑑續編) 월성손씨)에 보물만도 4개(411호 무첨당 여강이씨, 412호 향단 여강이씨, 442호 관가정 월성손씨, 1216호 손소 초상 월성손씨)나 된다. 아무리 일정이 촉박해도 무첨당 향단 관가정과 서백당(중요민속문화재 23호)은 꼭 둘러봐야 한다.
이밖에 낙선당(樂善堂 중요민속문화재 73호), 사호당고택(沙湖堂古宅 74호), 상춘헌고택(賞春軒古宅 75호), 근암고택(謹庵古宅 76호), 두곡고택(杜谷古宅 77호), 수졸당(守拙堂 78호), 이향정(二香亭 79호), 수운정(水雲亭 80호), 심수정(心水亭, 81호), 안락정(安樂亭, 82호), 강학당(講學堂, 83호) 등이 빼놓지 않고 볼 필요가 있는 문화재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양동마을은 주변의 문화재인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독락당(보물 제413호), 동강서원(경상북도기념물 제114호)도 포함하고 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의 안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서원으로 1572년(선조 5년)에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과 도내 유림들이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1574년(선조 7년)에 ‘옥산(玉山)’이라 사액(賜額)돼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경내의 건물로는 체인묘(體仁廟)로 현액된 묘우가 있다.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했다. 구인당(求仁堂)은 강당으로 서원내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토론 장소로 사용됐다.
독락당(獨樂堂)은 옥산서원에서 1㎞가량 떨어진 이언적의 고택 사랑채이다. 맑은 계곡물에 비친 고택이 깊은 운치를 나타낸다. 옥산서원에 도착하니 도처가 깜깜하고 독락당은 후일은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