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이 시작된 곳, 건국의 도시 ‘기마랑이스’
2016-07-08 19:06:35
최초왕 아폰수 엔리케 1세 탄생 … 모친·갈라시아 세력 축출하고 건국, 성모 숭배 성당 많아
지난해 12월초, 오전에 브라가를 둘러본 후 포르투갈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기마랑이스(Guimaraes)로 향했다. 기마랑이스는 바다를 향해 곧게 뻗은 비옥한 평야지대에 있다. 이곳은 몬사우(Moncao), 브라가(Braga), 비제우(Viseu), 카미냐(Caminha) 사이를 잇는 중세시대 가장 중요한 교역로였다.
기마랑이스는 포르투에서 국철을 타고 약 1시간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으나, 먼저 브라가를 경유했기에 브라가에선 버스를 타고 기마랑이스로 갔다. 브라가 버스정류장엔 인근 도시로 가는 여러 회사의 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기마랑이스 행은 트랜뎁(Trandev)에서 운행한다. 하루에 2대(편도 3.2유로)가 배차돼 가는 데 약 50분쯤 걸린다. 가는 도중 여러 곳에 정차해서 시골버스 느낌이 났다.
드디어 포르투갈의 발상지 기마랑이스에 도착했다. 기마랑이스 버스터미널에서 10분 정도 걸어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기마랑이스 역사지구(Centro Historico de Guimaraes)에 도착했다.
12세기 포르투갈의 국가 정체성 확립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15~19세기, 즉 중세도시에서 현대도시로 발달하는 시기의 다양한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시 당국은 20세기부터 기마랑이스의 구시가지의 현대화에 필요성을 느끼고, 1980년대부터 복원과 재건에 힘쏟았다.
가장 먼저 접한 곳이 투랄광장(Largo do Toural). 17세기 조성될 당시에는 가축행사와 투우경기가 열렸고 기마랑이스 시 경계 바깥 쪽에 위치했었다. 1878년 공원으로 지정됐고 기마랑이스를 오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가는 가장 번화한 광장이다. 주위엔 식당, 카페, 상점이 입주해 있다. 면적이 넓고 벤치도 많아서 여유롭다. 2011년 보수공사를 통해 1583년 이전되었던 르네상스 분수를 복원하고, 18세기 포르투갈 건축 양식인 폼발린(Pombaline)풍의 파사드도 더해졌다.
가장 보고 싶었던 게 ‘여기에서 포르투갈이 탄생했다(AQUI NASCEU PORTUGAL)’라고 적힌 성벽이었다. 이 건국도시 성벽은 포르투갈 건국 역사를 품고 있다. 8세기에는 국토 대부분이 이슬람 세력(무어족, Moore, Moros)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전신인 포르투갈공국이 그리스도교도 중심의 북부 여러 왕국을 모아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Reconquista)을 시작했다.
11세기 후반 프랑스 부르고뉴(Burgundy) 기사이자 프랑스 로버트2세왕의 손자인 엔리케(Henry, Count of Portugal, Henry of Portugal)는 에스파냐 모험 중 무어족과 싸우고 있는 갈리시아왕국(Kingdom of Galicia, 레온왕국 Kingdom of Leon이라고도 함)의 아폰수 6세와 함께 힘을 합쳤다. 1095년 아폰수 6세는 그에게 포르투갈 영지를 주고 포르투갈 백작으로 봉했다. 아폰수 6세는 그의 딸인 테레사(Theresa, Tarasia)를 엔리케 백작의 아내로 줬다. 하지만 포르투갈공국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스페인 북서부를 점유하고 있는 레온왕국의 영지에 불과했다.
1112년 엔리케가 죽자 아들 아폰수 엔리케(Dom Afonso Henriques, Afonso I of Portugal, 포르투갈 아폰수 1세)는 4살이었고, 이에 어머니인 테레사 포르투갈 백작 부인이 섭정했다. 그러나 테레사는 고위 성직자, 백성과 갈등을 일으켰다. 레온왕국(아폰수 6세 사후 테레사의 언니인 우라카 여왕이 지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열망도 강했다. 1116년 포르투갈공국이 갈리시아의 두 도시(Tui, Ourense)를 점령하자 화난 우라카 여왕은 포르투갈을 공격했다. 그러나 테레사여왕을 위해 봉사하는 갈리시아왕국의 귀족의 친구인 겔메레스 주교(Bishop Gelmeres)가 우라카 여왕 진영의 반란을 획책하자 두 자매 여왕은 화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26년 우라카(Uracca)여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아폰수 7세는 테레사에게 가신이 되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절하자 1127년 봄 아폰수 7세는 포르투갈을 공격하게 된다. 이로 인해 테레사 여왕은 레옹 왕국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아들인 아폰스 엔리케가 포르투갈 백작으로 봉해졌다. 이에 테레사 여왕은 아들과 적이 됐고, 그의 연인인 페르나옹 페레스 트라바 백작(Fernao Peres de Trava)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했다. 이에 아폰수 엔리케는 1128년 6월 24일 기마랑이스 근교에서 포르투갈 공국을 완전히 접수하기 위해 엄마와 그의 연인인 페르나옹 백작과 싸웠다. 이것이 사웅마메드전투(Battle of Sao Mamede)로 포르투갈왕국 건국의 씨앗이 됐다.
아폰수 엔리케는 1129년 레콩키스타를 지속하기 위한 필요성 때문에 수도를 코임브라로 옮겼다. 1139년엔 테주강 북쪽을 평정하고 스페인 카스티야왕국로부터 독립하고 1143년 포르투갈 최초의 왕인 아폰수 엔리케 1세로 즉위했다. 이를 기념해 성벽에 새긴 문구가 포르투갈의 탯줄처럼 숭고하게 여겨진다.
기마랑이스는 아폰수 엔리케 1세가 태어난 도시로 정신적인 수도나 다름 없다. 포르투갈 사람은 그래서 기마랑이스를 ‘요람의 도시’(시다드 베르수 Cidade-berco)로 애칭하고 있다.
이어 언덕 위에서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기마랑이스성(Castelo de Guimaraes)으로 향했다. 아폰수 엔리케 1세가 탄생한 곳으로 10세기 후반 세워진 산타마리아수도원(Mosteiro de Santa Maria)을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하는 수많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포르투갈 공국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요새이다.
고성 입구에 현대식 출입구 시스템을 개보수하는 것을 보니 입장을 유료화할 셈인가 보다. 거칠고 투박한 성벽 돌 위로 뾰족하게 솟은 돌탑은 보는 것만으로도 음산하다. 성벽의 탑에 설치된 총안(銃眼)은 적을 방어하려는 긴장감마저 느끼게 한다. 리스본 근교 신트라의 무어성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데 위엄이 있다.
10세기말 무마도나(Mumadona Dias) 공작부인이 성 건축을 명해 완공된 후 13세기 말에 리모델링됐다. 이후 기마랑이스에 거주한 귀족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여러 차례 수리했다. 20세기에 마지막으로 복원된 후 1910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2015년에 재승인을 받았다. 성을 내려오는데 작은 창고처럼 생긴 입구가 좁은 곳이 있다. 안내판을 보니 아폰수 엔리케 1세가 세례를 받은 성 미구엘 성당이다.
성 앞에는 아폰수 엔리케 1세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옆으로 늘씬한 나무들이 심어진 장방형의 카르무정원(Jardim do Carmo)이 있다.
그 옆으로 보이는 곳이 포르투갈의 흥망성쇠를 잘 간직한 브라간사 공작 저택(Paco Dos Duques De Braganca)이다. 대통령의 여름궁전으로 쓰이기도 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15세기 초반 아폰수 엔리케 1세가 자신의 가문인 브라간사의 자부심을 나타내기 위해 건축한 대형 석조건물이다. 생각보다 비싼 입장료(성인 1인 5유로)와 내부수리 중인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현재 17~18세기의 미술품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표소 입구 사이로 직사각형의 회랑, 벽에 걸린 직물을 살짝 볼 수 있었다.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내부관람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성과 브라간사 저택에서 내려가는 길은 약간 내리막길인데 양쪽으로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 늦은 오후라 나무 사이로 붉은 석양이 비치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연출돼 사진 찍기에 그만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있던 사웅프란시스쿠성당(lgreja de Sao Francisco)은 본래 사웅프란시스쿠수도원의 일부였는데, 디니왕(King Dinis of Portugal)의 명령으로 1325년 파손됐다가 주앙 1세(Joao I)가 1400년 재건하였다. 오픈 시간이 지나서 성당 내부에 들어가진 못했다. 1740년대에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거쳐 오늘날 모습을 갖추었다.
이 성당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성단소(Chancel)을 장식하는 아줄레주로 성인 안토니우의 생애를 묘사하고 있으며, 주 예배당의 고딕 양식의 돔과 잘 어울린다고 한다. 성당 내 신랑(성당 중앙 회중석)을 장식하는 인상적인 판화 ‘트롱프 뢰유(trompe l’oeil, 사람들이 실물인 줄 착각하도록 만든 그림), 회화의 훌륭한 예로 꼽히는 목조 천장, 성단소와 고딕 양식의 가로 회랑을 구분하는 아치형 금장 목조 장식, 2층으로 된 예배당이다. 성당 내에는 이 지역의 최초 프란시스코파 전도자인 성 구알테르(Sao Gualter)의 유해가 보관돼 있다.
하단에 아치형의 통로가 있는 건물을 지나면 나오는 올리베이라광장(Largo da Oliveira)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지고 있다. 과거 기마랑이스의 중심부 역할을 했던 곳임을 증명이나 하듯 주요 명소, 유명 식당들이 즐비하다. 광장 한쪽에는 올리베이라성모성당(lgreja de Nossa Senhora da Oliviera)이 있다. 성모를 최고로 모시며 포르투갈 고딕 건축 양식의 압축판이자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바탈라 수도원 건축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342년 리스보아(리스본)의 한 상인이 성당 앞에 올리브나무를 가져와 이곳에 심어놓았는데 말라 죽었다가 3일 뒤 기적적으로 푸른 잎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일이 빚어지자 올리브나무의 생명력을 기념하기 위해 광장과 성당의 이름을 ‘올리베이라’라고 새로 지었다. 이 나무는 1870년까지 자리를 지키다 옮겨졌으며, 현재 그 자리에 있는 올리브나무는 1985년 새로 심어놓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나무 밑 석판에는 1342, 1870, 1985라는 숫자를 새겼다. 이 성당은 종교적 전시품으로 가득한 알베르토삼파이오박물관(Museu de Alberto Sampaio)과 이어지고, 맞은 편에는 현재 현대미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시청 관저(Antiqos Pacos do Concelho)가 있다.
역사지구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나면 은은한 조명, 분수대, 기하학적인 모양의 대형 꽃밭으로 조성된 브라질헤푸블리카광장정원(Jardim do Largo da Republica do Brasil, Jardim do Campo da Feira)이 길게 뻗어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세계 몇 대 아름다운 공공 정원으로 손꼽히기도 하는데 브라질 독립 기념과 관련된 듯하다. 포르투갈로서는 브라질 독립을 축하할 일이 아닐 듯한데 포르투갈어를 모르는 데다가 구글, 위키피디아에도 내용이 나오지 않으니 그 연유를 알 길 없다. 겨울이라 드라이한 풍경이었지만 봄, 여름에는 형형색색의 화초로 볼 만하다. 광장 양 옆 도로를 두고 카페, 상점들이 즐비한다.
광장 끝에 우뚝 선 사웅구알테르성당(Igreja de Sao Gualter)은 16세기 성모에게 헌정된 작은 예배당을 1785년에 새로 건축한 것이다. 뾰족하게 솟은 두 개의 첨탑을 가진 외관 덕에 멀리서도 잘 보인다. 저녁 6시경에 도착했더니 문을 닫으려고 해서 겨우 수분간 성당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이 지역 최초의 프란시스코파 전도자인 19세기 성인 구알테르를 기리는 축제인 ‘페스타스 구알테리아나스(Festas Gualterianas)’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사웅구알테르성당이라고 부른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성모의 비탄을 위로한다’는 뜻을 담아 ‘노사 세뇨라 다 콘솔라상 에 산투스 파소스 성당’(Igreja de Nossa Senhora da Consolacao e Santos Passos)이라고도 부른다. 기마랑이스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의 과정을 나타내는 예배당이 7개 세워졌는데, 이 성당은 현재 남아 있는 5개 중에서 가장 첫 번째 것이다. 포르투갈 건축가 안드레 소아레스(Andre Soares)가 설계한 바로크풍 건축물로, 완성된 후 1세기가 지나 2개의 탑과 계단, 난간이 추가로 건축됐다.
이 성당을 보고 기마랑이스를 떠나는 게 아쉬워 다시 투랄광장으로 갔다. 고색창연한 사웅페드로성당(Igreja de Sao Pedro)과 대조적으로 성탄절이 임박한 지라 현대식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인다.
기마랑이스에서 포르투로 가는 기차(약 1시간에 1대 운행)를 타기 위해 서둘러야 한다. 늦은 저녁이라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놓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오후 7시 16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3분 앞두고 도착할 수 있었다. 소도시의 역이라 역무원은 벌써 퇴근하고 없고 자동발매기에서 표(1인당 3.1유로)를 겨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승무원은 “2인 탑승 티켓이 아니라 1인 왕복티켓”이라며 “검표 완료 후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혹여 발권이 잘못돼 과중한 벌금을 낼까봐 전전긍긍하는데 다시 온 승무원은 친절하게도 “다음부턴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한숨을 돌리게 됐다.
1시간 20여분만에 포르투에 도착하니 오후 8시 35분이 되었다. 아침 일찍 서둘렀는 데도 하루에 브라가, 기마랑이스를 섭렵하려니 어느 새 저녁 9시다. 촉박한 일정 때문에 긴장한 채 바쁘게 쏘다녔더니 시장기가 몰려든다. 포르투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 다시 히베리아지구로 갔다. 도우루강을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레스토랑 중에서 도우루강과 동 루이스 1세 다리가 잘 보이는 분위기 좋은 파롤 레스토랑(FAROL DA BOA NOVA)에 들어갔다. 지배인의 추천을 받아 그린화이트와인(MURALHAS DE MONACAO) 한병과 한 솥 가득 나오는 해물밥인 ‘아로즈 드 마리스쿠’, 그동안 못먹어서 아쉬웠던 포르투갈 전통 샌드위치인 ‘프란세지냐’를 주문했다. 음식 맛은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포르투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그린화이트와인은 있지 못할 정도로 풍미가 훌륭했다. 이렇게 포르투의 마지막 밤은 지나고 있었다.
황영기 여행칼럼니스트 zerotwo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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