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7 09:52:07
코로나19 확산으로 해외는 물론 국내 여행도 예사롭지 않은 요즘, 지난 7월 중순 소강 상태를 보이는 장마전선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에 다녀왔다. 함양군은 지리산과 이름 모를 높은 산을 끼고 서로는 전북 장수군 및 남원시와 맞닿고 북으로는 거창군, 동으로는 산청군, 남으로는 하동군에 이른다.
함양은 예전에는 88고속도로(광주-대구 고속도로) 예외는 길이 불편했으나 지금은 대전-통영고속도로,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구간) 등 새 길이 나면서 접근이 용이해졌다. 함양 IC를 빠져나오면 멀지 않은 함양읍 운림리에 유서 깊은 상림(上林, 천연기념물 154호)이 있다.
1100년도 넘은 통일신라 말기 진성여왕(재임 887~896년) 때 대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조성한 유서 깊은 인공림이다. 천령군(天嶺郡, 함양군의 옛 이름)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은 병곡면에서 함양읍으로 가로지르는 위천(渭川)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강물의 흐름을 돌리는 둑을 쌓고 지리산과 백운산의 활엽수를 옮겨 심어 호안림(護岸林)을 조성했는데 이게 상림의 유래다.
대관림(大館林)으로 불리며 길이만 3㎞에 달하던 웅장한 숲은 대홍수로 인해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다. 그마저 일제시대에 하림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길이 1.6㎞, 폭 80~200m의 상림만 남아 천년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어설프게 다시 조성된 하림에는 갓지은 정자, 드문드문 심겨진 나무, 연꽃과 수련이 자라는 미니 인공정원이 들어서 있다.
상림은 팽나무, 단풍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개서어나무, 가막살나무, 작살나무, 사람주나무, 은행나무, 정자나무, 때죽나무, 이팝나무 등 120여종 2만그루의 활엽수가 햇빛 한점 스며들지 못하게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봄엔 이팝나무꽃, 가을엔 꽃무릇(석산)의 만개한 풍경이 아릅답다고 한다. 금낭화도 상림이 자랑하는 꽃이다. 상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400년된 느티나무 정도이다. 거목은 없으나 조금 굵직하거나 새로 자라는 나무들이 경쟁하며 세월의 무쌍함을 증거한다.
상림은 4계절이 아름답다지만 만추일 때가 으뜸으로 꼽힌다. 위천에서 갈라져 나온 실개천이 상림의 중심을 흐르며 젖줄 역할을 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이 변하지 않는다. 상림에는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던 함화루(咸化樓), 흥선대원군에 세운 척화비, 최치원을 기리는 문창후(文昌候, 고려 현종이 추증한 시호) 신도비와 사운정(思雲亭), 역대 위정관들의 송덕비를 만날 수 있다. 최치원은 경주최씨의 시조로 1923년 문중에서 그의 신도비를 이곳에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최치원은 금으로 만든 호미로 단 하루 만에 숲을 조성한 후 금호미를 나뭇가지에 걸어뒀다고 한다. 숲속 실개천에 금호미다리로 불리는 무지개 다리가 있는 것으로 봐 근처 어딘가에 호미를 걸어놨던 모양이다.
상림에 멀지 않은 함양군 한 복판에는 학사루(學士樓)란 2층 팔작지붕 누각이 있다. 최치원이 천령 태수로 있을 때 창건해 자주 올랐다고 한다. 동쪽에는 제운루(齊雲樓), 서쪽에는 청상루(淸商樓), 남쪽에는 망악루(望嶽樓)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망악루는 지리산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함화루의 전신이며 나중에 북서쪽인 상림으로 옮긴 것이다. 1380년(고려 우왕 6년) 왜구의 노략질로 불탔다가 1692년(숙종 18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경부터 함양국민학교 교사로 쓰이다가 1978년 겨울 현재 위치로 옮겼다. 학사루 길(고운로) 건너 편에 함양초등학교와 함양군청이 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군수 재임 시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柳子光)의 시를 철거한 게 무오사화의 한 원인이 됐다는 말도 전해진다.
함양은 정자와 물레방아의 고장으로 불린다. 화림동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金川)이 팔담팔정(八潭八亭)을 이루어 예부터 정자 문화의 보고라 불렸다. 금천은 남강의 상류로 수동면에서 위천과 합류해 진주 남강으로 흐른다. 화림동 계곡을 따라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 이상 서하면), 농월정(弄月亭 안의면)이 줄지어 있다.
거연정은 정선전씨(旌善全氏)가 조선시대 인조 때(1640년경) 세운 서산서원에 부속된 정자다. 굴곡이 심한 자연 바위 위에 정자를 올려 주변의 물과 소나무를 조화시킨 건축기법이 뛰어나다. 1872년 정선전씨 후손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세웠는데 화림교를 건너 바위섬 위의 거연정과 만나게 된다. 초록빛 계곡물이 담겨 있는 못(潭)을 굽어보는 느낌이 좋다.
군자정은 거연정으로부터 하류 쪽(동쪽)으로 15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정선전씨 입향조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의 5대손인 전세걸, 세택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기리기 위해 1802년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으로 칭했다. 나무결이 살아 있는 소박한 정자에서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거연정과 군자정이 있는 서하면 봉전리는 정여창 선생의 처가이기도 하다.
동호정 앞의 차일암(遮日癌)은 500여명이 앉을 만큼 넓은 너럭바위로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의주 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돼 1895년 건립했다. 옥녀담(玉女潭)에 인접하고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단청이 화려하다.
달과 함께 논다는 의미를 담은 농월정은 2003년 10월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소실됐다가 2015년 9월에 복원됐다. 예조참판과 도승지를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가 병자호란 때 굴욕적인 강화가 맺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다. 농월정 앞 너럭바위의 이름은 월연암(月淵癌), 달이 비친 모습이 서정적이고 거대한 바위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굽이치는 경관이 웅장하다는 의미다. 인근엔 오토캠핑장이 들어서 있고 제법 큰 주차장과 식당들이 있다.
이들 4개 정자를 잇는 계곡 옆길은 나무다리로 이어져 6.5㎞의 산책로를 조성했다. 일명 ‘선비문화탐방로’로 2006년 말에 완공됐다.
이밖에 함양에는 용추계곡 입구 매표소 바로 우측을 흐르는 지우천 계곡의 제1담소인 청심담의 거북바위 위에 건립된 심원정(尋源亭)이 있다. 그보다 남쪽의 안의항교에 근처엔 금호강변의 광풍루(光風樓)도 있다. 기타 경모정, 람천정, 영귀정 등의 정자가 있다.
용추계곡 입구와 심원정 사이에는 연암물레방아공원이 있다. 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1792년(정조 16년) 12월부터 3년 남짓 안의현감(함양군 안의면 일대)으로 지내면서 실학정신을 구현하는 차원에서 물레방아를 이 곳에 실현했다. 기백산과 황석산 사이 용추폭포에서 내려오는 물을 이용해 방앗간(정미소)를 차린 것이다. 과거에도 수차가 있었지만 이는 주로 사람이 인력으로 물을 뿜어나르기 위해 이용한 것이었다. 정미 작업은 여인들이 디딜방아나, 소들이 연자방아를 활용하는 게 전부였다.
박지원은 1780년 청나라를 둘러보고 열하일기를 써 개혁이 전혀 없는 당대를 비판했다. 홍국영과의 불화로 과거 보기를 포기했고, 중앙 요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천거로 조그만 고을의 수장인 안의현감을 맡아 이 곳에서나마 자기가 꿈꾸던 실학의 이상을 펼쳐보려 했다. 이후 면천(沔川, 충남 당진)군수와 양양부사를 지냈다. 참고로 연암은 1777년(정조 1)에는 벽파(僻派)로 몰리면서 정치적 위협을 느껴 은거한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 지명에서 따온 호다. 연암의 반남박씨로 반남(潘南)은 전남 나주의 한 고을이다.
지리산 산골마을에 무슨 서원과 향교, 누각이 그리 많을까 싶을 정도로 함양은 뜻밖에도 유교 사적이 즐비하다. 대표적인 게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내 8개 서원 중 하나인 남계서원(灆溪書院)이다. 이 서원은 1552년(명종 7년)에 일두(일두)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어졌다. 영주 소수서원(백운동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1566년에 임금이 사액(賜額)했다.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12년(광해군 4년)에 재건했다. 정여창 외에도 숙종 이후엔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을 추가로 제향하고 있다.
남계서원에 붙어 있는 청계서원(靑溪書院)은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을 기리는 서원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조의제문 사건에 연루돼 무오사화로 희생됐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다가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친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으로 불렀다.
필자는 함양 송호서원(松湖書院) 등 이렇게 서원 세 곳을 둘러봤는데 이밖에도 함양에는 당주서원(溏洲書院 이하 유허비만 존재), 백연서원(栢淵書院), 도곡서원(道谷書院), 구천서원(龜川書院), 서산서원(西山書院), 정산서원(井山書院) 등이 있었다. 함양향교, 안의향교도 현존한다.
해질 무렵엔 일두고택과 그 일대의 지곡면 개평한옥마을에 들렀다. 안타깝게도 개별 고택에는 시간이 늦어 들어갈 수 없었다. 마을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넓은 들을 가진 지곡천(池谷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는 인가와 이웃한 평촌천(坪村川)이 흐르는데, 둘은 마을 초입에서 만나 함께 남강으로 향한다. 두 물길 사이에 낀 평탄한 땅이라 하여 개평(介坪)이다.
이 곳은 영남의 대표 사림이자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칭송되는 정여창의 고향이자 함양을 대표하는 양반가의 세거지다. 처음에는 김해김씨들이 살았다. 14세기에 정여창의 증조부가 함양으로 오면서 하동정씨가 세거하게 됐고, 이후 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세조 때의 청백리로 예조참판, 전라도도사 등를 지낸 송재(松齋) 노숙동(盧叔仝 1403~1463)이 개평마을에 입향조로 들어왔다. 노숙동은 정여창의 고모댁 사위로 이곳에 정착했으며 고증을 거쳐 1824년(조선 순조 24년) 처음 깃들인 터에 풍천노씨 대종가를 지었다.
개평마을 주민은 현재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대부분이다. 마을의 100여 가구 중 60여 채가 전통 한옥으로 보존돼 있다. 1880년에 지어진 하동정씨 고가는 안채만 남아 있다. 풍천노씨 대종가 안채는 마을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한다.
일두고택은 개평마을의 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전형적인 남도 양반가의 가옥이다.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가 하동군 평사리이다보니 TV 드라마 ‘토지’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정여창이 타개한 뒤 1570년 그의 생가 자리에 지어졌고 이후 여러 번 중건됐다. 솟을대문 위에 정려가 5개나 걸려 있다. 효자와 충신이 5명이 나와 국가 표창장을 받았다는 얘기다. 이 집에서는 현감, 군수, 관찰사도 배출됐다.
사랑채는 높은 기단 위에 ‘탁청재(濯淸齋)’란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랑채 누마루 앞에는 석가산(石假山)이란 인공 정원이 조성돼 있다. 휜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넓게 펼쳐 뒤편의 안사랑채를 가리고 있다. 안사랑채는 며느리에게 안채를 물려준 윗대 안방마님이 머물던 곳이다.
‘한 마리 좀벌레’란 뜻의 일두는 정여창이 스스로 지은 호다. 탁청재와 일두에서 청렴을 지향하고 경(敬)으로 몸과 맘을 다스리는 선비정신이 묻어난다. 정여창은 연산군에 의해 무오사화 때 함경도로 유배돼 거기서 세상을 떴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 그는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성종의 총애를 받아 동궁의 스승이 됐다. 그 동궁이 연산군이니 서로 악연이었나보다.
일두고택 앞에 ‘솔송주문화관’이 있다. 솔송주(松荀酒)는 정여창 집안의 가양주로 성종에게 진상한 전통 명주라 전해진다. 봄날의 연초록 소나무 순과 솔잎, 찹쌀, 지리산 암반수로 술을 빚는다. 대대로 이 집안 며느리들이 솔송주를 빚다 현재는 정씨가문의 16대 손부인 박흥선씨가 경남 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돼 있다.
솔송주 문화관과 일두고택 사이로 마을 한 가운데를 향하는 고샅길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일두고택의 돌담과 바닥에 깔린 울퉁불퉁한 박석을 밟으며 옛적을 회상해본다. 오담고택(梧潭古宅)은 정여창의 12세 후손인 정환필의 집으로 종가에서 분가해 1840년에 지은 것이라 한다. 개평마을에 도곡서원 옛터도 있다. 지금도 개평마을의 드넓고 아늑한 분위기가 머릿 속에 남아 있다.
함양은 지리산 등반에서 아주 유용한 포인트를 갖고 있다. 함양의 옛 지명은 천령으로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높은 고산지대에 위치한다는 의미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오르려면 백무동 계곡을 타는 게 최단 코스이다. 함양 사람들이 지리산 장터목을 넘기 위해 봇짐을 메고 오르던 고개가 지안재와 오도재다. 구절양장처럼 구불구불 올라가는 지안재는 모 타이어업체의 TV 광고에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안재에서 이어지는 오도재는 변강쇠와 옹녀가 지리산으로 올라가던 전설의 길로 맑은 날이면 하봉·중봉·천왕봉·백소령·반야봉 등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 포인트가 좋다.
계곡으로는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한신계곡(이상 지리산 자락 마천면), 화림계곡(서하면), 용추계곡(안의면)이 꼽힌다. 사찰로는 벽송사, 서암정사, 용추사(장수사지), 보림사 등이 유명하다. 마천면의 벽송사와 서암정사에 가보려면 휴천면의 지안재와 오도재를 거쳐야 한다.
벽송사(碧松寺)는 신라말에 창건됐다가 화재를 입어 1520년(중종 15년)에 중건됐다. 절 규모는 작지만 휴정 서산대사 이전에 조선 선맥을 이어온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환성 지안, 서룡 상민 등 조사 8인이 수도정진한 도량이다. 현재 해인사의 말사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본거지로 사용돼 국군에 의해 전소됐다가 다시 지어졌다. 이 곳 템플 스테이는 주위 칠선계곡과 더불어 인기가 높다.
벽송사에서 600m 떨어진 부속 암자인 서암정사(瑞庵精寺)는 벽송(壁松) 지엄(智嚴) 대사(1464∼1534)가 중창했다가 비교적 근대에 다시 지어진 사찰이다. 바위굴에 모셔 놓은 석불은 ‘제2의 석굴암’이란 애칭을 얻었으며 오밀조밀한 기암괴석, 아름다운 정원 덕분에 벽송사보다 더 유명해졌다.
이은리 석불은 원래 함양읍 이은리 망가사(望迦寺) 절터 냇가에 있던 불상을 현재의 함양읍 상리에 옮겨 놓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세련되지는 않다. 입상에서 하부와 대좌는 사라지고 상체만 남아 있다.
함양은 산양산삼의 재배지로 유명하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끼고 있는 청정 산간지역이라 국내 산삼 생산량의 약 80%를 담당하고 있다. 덕유산 깃대봉이 바라다보이는 서상면 금당리 함양군 산삼영농법인에 들르면 재배 현장도 구경하고 조금 저렴한 비용에 산삼을 구입할 수 있다.
또 함양은 경북 상주시, 전북 완주군(동상면), 경남 산청군 등과 함께 손꼽히는 곶감 주산지다. 함양 서하면 봉전리 오현(梧峴)마을은 유명 산지로 접(100개) 당 가격이 10만원을 웃돈다.
고유 음식으로는 민물고기를 갈아 육수로 삼은 어탕국수, 연잎밥, 쇠고기국밥, 갈비찜 등이 호평을 받는다. 어탕국수는 쉬리, 꺾지 등 민물고기를 푹 고아서 뼈를 추려낸 다음 얼큰한 국물에 면을 말아준다.
함양군이 뽑은 함양 8경
1. 상림사계 : 상림의 4계절 중 만추가 가장 아름답다.
2. 용추비경 : 용추폭포, 용추사, 연암물레방아공원
3. 칠선시류 : 국내 3대 계곡으로 꼽히는 칠선계곡과 폭포
4. 덕유운해 : 서상면에서 남덕유산을 바라볼 때 피어오르는 구름
5. 금대지리 : 금대산·백운산·금대암 등에서 지리산 풍광을 조망
6. 화림풍류 : 화림동계곡 8담8정에서 느끼는 안분지족의 선비 풍류
7. 서암석불 : 벽송사 옆 서암정사에 조성한 석불과 정원의 조형미
8. 대봉철쭉 : 해발 1252m 대봉산 계관봉 일대의 광대한 철쭉 군락지
당사의 허락 없이 본 글과 사진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