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31 19:18:44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와병 이후 일류지향 구심점을 잃어가고 있는 삼성서울병원 야경
삼성그룹은 전 계열사가 1등이기를 강요받는다. 하지만 뼈아프게도 1970년대~1980년대 조미료 전쟁에서 대상(옛 미원)에 밀렸고, 세탁기·냉장고·에어컨·텔레비전 등 가전산업에서도 현재 상당수 소비자들은 ‘가전은 역시 LG’라는 의식이 박혀 있다.
삼성서울병원도 이와 마찬가지로 최근 1등 전쟁에서 크게 의욕을 상실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이 작년 말 정부의 ‘의료질 평가’에서 처음으로 ‘최상급 병원 탈락’ 판정을 받은 것으로 지난 24일 알려졌다.
2015년부터 이 평가가 시작된 이래 국내 ‘빅5′ 병원(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서울성모병원·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 중에서 최고 등급을 받지 못한 사례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서울병원은 지난해 기준 보건복지부의 의료질 평가에서 최고 등급(1등급-가)보다 한 단계 낮은 ‘1등급-나’를 받았다. 삼성서울병원을 제외한 나머지 ‘빅5′ 병원과 가천대 길병원·부산대병원·아주대병원·인하대병원 등 총 8곳이 1등급-가를 맞았다. 삼성서울병원은 1등급-나를 받은 28개 그룹으로 강등됐다.
보건복지부가 매년 국내 300여 개 종합병원을 대상으로 시행해온 의료의 질 평가 기준은 크게 네 가지다. ①환자안전(환자당 의사 수 등) ②진료의 질(뇌졸중 치료 수준 등) ③공공성(중환자실 운영 비율 등) ④지원 활동(입원 환자 비율 등)이다.
기자가 알아보니 삼성서울병원은 환자대기 시간이 너무 길고, 이를 컨트롤할 간호 및 서비스인력이 부족해 결정적으로 1등급-나를 맞았다. 인력을 고용해 환자 정체를 해소해야 하는데 투자 효율화를 위해 이에 대한 투자를 유보했다는 게 병원 안팎의 관측이다.
삼성서울병원은 2016년 4월부터 ‘꿈의 암치료’라 불리는 양성자치료를 시작했다. 양성자치료센터 건립에는 최소 1000억원이 투입됐다. 일부에서는 3000억원이 들어갔다고 보도하고 있으나 실제 금액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밤 10시까지 2교대로 양성자치료기를 가동하고 있지만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이 애초 낮게 설정한 급여 치료비용 때문에 오히려 적자를 보고 있다는 관측이다.
문제는 이런 적자를 메우기 위해 삼성서울병원이 인력이나 신규 장비 도입해 소홀해졌다는 점이다. 삼성서울병원은 2021년 1조6407억원의 의료사업수익(매출)을 올렸다. 2022년도에는 1조7000억~1조8000억원 수준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의료계 관계자는 “고 이건희 삼성회장 시절에는 1등할 생각만 하라며 삼성의료원(주로 삼성서울병원)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지만,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 와병 후부터 이런 기조가 흔들렸다”고 말했다.
삼성의료원은 2011년 10월 25일 이종철 의료원장이 퇴임했다. 사실상 전격 경질이었지만 지금도 함구하고 있다. 이유인즉슨 이건희 회장이 치아가 부실해 틀니를 하고 다녔는데 의료원 산하 치과의사들은 ‘임플란트’ 대신 ‘틀니’를 권했다고 한다. 치과 의료진이 신진, 일류가 아니고 노장파여서 임플란트를 시술한 기술도 의지도 없는 상태에서 이건희 회장은 의사들의 견해만 믿고 틀니를 줄곧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나중에 임플란트의 기능적, 심미적 기능이 틀니보다 월등함을 알게 돼 격노한 이건희 회장이 그동안 신뢰했던 이종철 의료원장의 실태를 면밀하게 재고하게 됐다고 한다. 정밀하게 쳐다보니 1위인 서울아산병원과의 양적, 질적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음을 깨닫게 됐다. 그동안 번드르르하게 시간이 지나면 아산과의 격차가 줄어들고 1위를 쟁취할 수 있다는 보고들이 허언임을 이건희 회장이 알게 된 게 이종철 전 의료원장의 경질 배경이다.
삼성은 2011년 11월 26일 삼성석유화학 사장을 지낸 삼성 비서실 재무팀 출신의 윤순봉 씨를 삼성서울병원 지원총괄사장에 앉혔다. 이 때부터 삼성서울병원은 ‘의술’보다는 ‘돈’을 따지는 분위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건희 회장 와병 이후 삼성그룹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재용 회장은 선친에 비해 훨씬 의료사업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의료계 관계자는 “이재용 회장은 삼성의료원이 1등하는 데에 대한 관심은 없고, 환자커뮤니티나 시민사회단체로부터 욕을 듣지 않는 수준으로 관리하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삼성서울병원의 의료의 질 최고등급에서의 하락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전자 외에는 화학, 건설, 조선 분야에 대한 관심도 선친보다 크게 모자란다는 평을 듣고 있다.
지난해 삼성서울병원의 의료수익이 1조7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환자 정체를 해소하는 인프라에 수백억원을 투자했다면 불명예스러운 강등 사태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의료계 관계자는 “의료의 질 평가등급이 낮아지면 삼성서울병원이 정부로부터 받는 지원금이 80억~100억원 가까이 삭감되지만 투자를 줄여 절약되는 수백억원보다는 적은 비용이기 때문에 인프라 추가 투자를 아낀 것으로 본다”고 풀이했다.
의료계를 오래 취재한 기자의 관점에서 삼성서울병원은 ‘홍보력’으로 브랜드를 키워왔다. 의료기관 본연의 ‘의술’보다는 ‘직원들의 친절함’ ‘깨끗한 장례식장’ ‘효율적인 병원정보화’ 같은 진료 외적인 소프트웨어의 힘으로 오늘날의 브랜드파워를 키워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마저도 구심점을 잃고 있다. 의료의 질 평가등급이 왜 낮아졌는지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은 없고, 일부 언론에서만 보도됐으니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하고 관망하는 자세다.
홍보실 관계자는 코로나19 초창기 유행으로 한창 의료계가 힘들 무렵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요즘 병원 예산이 줄면서 홍보 같은 비의료자원에 투입되는 지출이 대폭 삭감 또는 동결됐다”며 “성과급 잔치를 받는 삼성전자에 비한다면 삼성병원은 ‘삼성병자’”라고 자조했다. 홍보 담당자가 기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윤순봉 전 사장 취임 이후 지속돼온 ‘탈(脫) 일류지향’의 그림자가 지금 삼성서울병원에 드리워져 있다.
보건복지부는 왜 삼성서울병원의 평가등급이 강등됐는지 언론에 함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삼성의 입장도 감안해야 하고, 의료의 질 평가가 너무나 양적 지표 위주여서 한계가 있음을 자인하는 측면도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삼성그룹의 일원이니만큼 잘 키우면 해외환자 유치 등에서 기여할 측면이 있다. 그보다도 더 많은 의료소비자가 양질의 진료를 받고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다.
삼성은 현재 모든 진료영역에서 상위권이 아니다. 양성자치료, 일부 장기이식, 심혈관질환 시술 등 일부 잘하는 것만 잘한다. 나머지 영역은 2위권인 1등급-나 병원들과 대등소이하거나 오히려 한참 뒤떨어진 분야도 있다. 의학기자들은 이를 감안해 친지나 지인들로부터 무슨 병에 어디 병원을 가야 하느냐고 질문을 받을 때 컨설팅해준다. 당연히 삼성이 우선순위에 드는 게 생각보다 적다.
보건복지부의 의료의 질 평가등급이 현재 삼성서울병원의 수준을 100% 반영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평가자인 복지부가 삼성을 ‘시범 케이스’로 삼아 긴장감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을까 의심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에서 일류정신이 사라진 점은 국내 의료발전을 위해 안타까운 일이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출자한 삼성서울병원이 공익보다는 수지타산에 치중한다는 것도 비판할 만한 대목이다. 이런 점을 명심하고 삼성은 심기일전해 이번 평가등급 하향을 다시 ‘일류지향’으로 전환하는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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