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4 10:11:06
말기 복막암으로 의사들의 싸늘한 반응을 토로한 가수 보아의 오빠 권순욱 뮤직비디오 감독. 출처 인스타그램
요즘 기자가 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다니는 소아정신과 직원들의 냉랭한 표정과 말씨가 항상 불만이다. 뭘 물어봐도 시큰둥하다. 그래서 ‘꼰대답게’ 몇 마디 했더니 이후에는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다.
그들이 오로지 신경 쓰는 것은 예약된 날짜에 시간 맞춰 오라는 것이다. 정신과는 시간이 곧 돈인 특수한 의료시장이라 의사들과 심리치료사가 빈틈이 없도록 빽빽하게 진료 스케줄을 채워 넣는 게 간호데스크의 일이다. 주사를 놓거나 검사 보조를 하는 것도 아닌데 3명이나 되는 인력이 만날 바쁜 척한다.
한번은 진료시간을 조정했는데 전혀 말귀를 못 알아들은 간호 데스크들은 기자가 진료받겠다는 시간을 블랭크로 처리했다가 아내가 애원하자 1시간 지연 끝에 심리치료를 받게 해줬다. 환자보다는 자기들의 수익 극대화에 맞춰 치료 스케줄을 짜려다보니 내 사정을 곧이듣지 않고 일방통행하다 이런 불편을 끼친 것 같다.
간호데스크들은 늘 무덤덤하고 과금(科金)에만 집중한다. 아마도 의사 선생님과 심리치료사들의 호주머니가 빵빵해져야 자기들도 월급을 타고, 또는 의사와 심리치료자기들이 욕을 먹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 가기 전까지 기자는 간호사들이 마음이 아파 또는 어수선해서 온 아이들에게 상냥하고 따스한 마음으로 대할 것이라 상상했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다정다감한데 간호사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런 불친절이 의사와 아주 무관하다고는 보지 않고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 중에서 가장 불쾌하고 형식적으로 대하는 진료과가 정신과라고 지적한다. 마음 아픈 사람을 하도 많이 대하다보니 그들조차 마음에 병이 생겼을까.
이렇게 병원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터에 지난 10일 가수 보아의 친오빠이자 뮤직 비디오 감독인 권순욱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려 전이성 복막암 4기라고 밝혔고, 이틀 후에는 ‘의사들의 싸늘한 냉대’에 서럽다는 반응을 올렸다.
기자가 경험한 것은 치명적인 질환을 갖지 않은 환자에 대한 병원의 불친절이고, 권순욱 씨가 토로한 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리는 환자가 경험한 냉대지만 의료소비자로서의 억울함과 분한 감정에서는 정도 차이지 크게 궤가 다를 것 같지는 않다. ‘’
지난해 말 응급수술을 받았다는 권 감독은 지난 10일 기대 여명이 2~3개월 정도라며 “왜 나에게 이런 꿈에서나 볼 법한 일이 나타난 건지 믿을 수가 없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늘 현실”이라고 슬픈 심경을 털어놨다.
권순욱 감독은 이틀 후인 12일 SNS에 “복막암 완전 관해 사례도 보이고, 저도 당장 이대로 죽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데 의사들은 왜 그렇게 싸늘하신지 모르겠다”며 서러운 마음을 토로했다.
그는 의사들로부터 “항암(치료) 시작하고 좋아진 적 있어요? (항암제는) 그냥 안 좋아지는 증상을 늦추는 것뿐입니다”, “최근 항암약을 바꾸셨는데 이제 이 약마저 내성이 생기면 슬슬 마음에 준비를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주변 정리부터 슬슬 하세요”, “환자가 의지가 강한 건 알겠는데 이런저런 시도로 몸에 고통 주지 말고 그냥 편하게 갈 수 있게 그저 항암약이 듣길 바라는 게…” 등의 말을 들었다며 에둘러 의사들의 냉정함을 비판했다.
기자도 췌장암으로 진단 후 1년 6개월만에 돌아가신 선친에게 아주 기계적으로 대하는 모 대학병원 여교수의 행태에 화가 난 적이 있다. 이미 11년이 넘는 일이라 그 때의 불쾌감은 어느덧 무뎌졌으나, 당시에는 우리나라 최고 지성을 가진 데다가 자애로운 모성까지 겸해 잘 진료하리라 믿었던 기대가 크게 무너지면서 분노가 치밀었다.
권순욱 감독처럼 많은 암 치료 의사들이 말을 따스하게 못한다. 환자에게 듣기 좋은 말로 ‘희망고문’을 하는 게 의미가 없고, 경우에 따라 환자가 ‘왜 그때엔 금세 낫는다더니 점점 증세가 나빠지가만 하느냐’고 의사를 공격해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환자와 가족의 경제사정도 헤아려야 하고, 불필요한 치료로 건강보험 재정의 낭비 또는 과잉치료에 따른 건강보험 측으로부터의 ‘급여 불인정’ 또는 ‘급여 삭감’을 우려하는 면도 있다. 또는 병원의 수익 증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치료가 될 만한 환자를 엄선해서 고부가가치 치료를 진행해야 하기에 어차피 임종이 얼마 남지 않는 환자는 걸러내서 최소한의 형식적인 치료만 하겠다는 계산도 밑에 깔려 있다.
암환자의 연명치료에 대해 많은 기사도 써봤고 다양한 사례도 접해봤다.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자발적으로 거부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며 이를 법제화하자고 주장해 어느 정도 국내에 정착시켜온 의사들은 항암제 투여와 방사선 노출로 인해 몸이 망가지느니 아주 짧게 남은 여생을 최소한의 통증 제어 치료만으로 버티면서 정리하는 게 어떠냐고 설득해왔다.
이제 연명치료 거부는 점차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다만 권순욱 감독이 말하는 것은 왜 그리 어투가 싸늘하고, 환자를 서럽게 만드냐는 것일 것이다. 환자에게 의사는 신이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생사가 걸린 질병으로 의사 앞에 서면 왜소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환자를 향한 의사들의 냉정한 태도는 절망의 흙을 관에 흩뿌리는 것과 같다.
권순욱 감독의 심경과 관련,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은 “의사들이 환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환자를 가족처럼 생각해서 안타까워하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환자들의 바람일 것”이라며 “그 이유는 의사들의 ‘싸늘한 자기방어’가 의무가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국가와 사회(공공 의료보험)가 싸늘하고 냉정한 환자들에 대한 경고를 주문해왔다”며 “(적극적인) 치료는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수많은 부작용에 대한 의사들의 빠짐없는 설명의무를 부과하고 있는데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환자들은 이 때문에 겁을 먹고 자신에게 꼭 필요한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의사는 ‘존중과 보호’를 받을 때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의사들이 받는 것은 ‘의심과 책임 요구’다. 이런 상황에 놓인 의사들의 따뜻한 심장들이 매일 조금씩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이라며 의사들의 입장을 두둔했다.
이런 노 전 회장의 멘트에 네티즌들은 “의사들이 친절하지는 않더라도 조심스럽게 말해줄 수 없나요”, “그런 이유로 싸늘한 진료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네요”, “위중한 병일수록 팩트를 정확하게 말해 줄 필요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자가 보기에는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그 많은 정황과 배경지식을 환자에게 일일이 설명해줄 수 없는 한국의 의료환경이 권순욱 감독이 말한 ‘환자 냉대’를 불러온 것 같다. 우리나라의 공공의료보험은 비용 대비 효율적이되 환자의 세세한 심경까지 헤아려줄 여백은 없다. 진료시간이 5분이라면 의사는 진료 모니터에 올라온 컴퓨터단층촬영(CT) 결과나 검사지를 판독하는 데 1분, 의례적으로 병세를 묻고 기록하는 데 1분, 환자가 질문하는 것에 답해주는 데 1분, 종합적인 치료방향과 실천사항을 알려주는 데 1분, 처방하고 다음 치료 조치를 알려주는 데 1분 등을 소요할 것이다.
게다가 환자가 자꾸 꼬치꼬치 묻고 궁금증과 내재한 갈등이 풀리지 않아 말꼬리가 잡히고 더러 언쟁이라도 붙으면 5분이 10분이 되는 것은 쏜살이다. 그러면 뒤에 대기하는 환자들이 원성을 부릴 것이고 의사도 정해진 시간을 초과해 ‘사적 시간’을 내어 무료(?) 진료해야 한다.
기자는 의사들이 더 명확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줄 의무가 있고, 환자도 그나마 괜찮은 공공의료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국 의료환경의 특수성을 충분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환자들, 잠재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음’에 관한 의연한 철학을 가질 수 있도록 정신세계를 가다듬어야 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사망과 그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수감, 감옥에서 헤어나오려 소중히 아껴온 미술품을 국가에 초개를 버리듯 헌납한 모습을 보면 아등바등 사는 게 의미가 없고 죽으면 다 끝이란 생각이 든다.
가장 소중한 ‘지금’을 누리며 행복을 추구하되 죽음에 대한 ‘건실한 사상’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미리 유서를 써보면 어떨까? 또 관에 들어가는 퍼포먼스를 체험해보면 어떨까? 십중팔구는 뜨거운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동안의 삶을 반성하고 정화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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