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29 14:11:34
여성의 성적 욕구가 적절히 충족되지 않으면 이를 결핍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불안·우울·불면증·전신피로·짜증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이 한마디 속에 ‘한국형 섹스리스’의 원인이 그대로 농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한 설문 결과 ‘섹스리스’를 겪는 부부는 36.1%로 나타났다. 옆동네 일본의 문제로만 여겨졌던 섹스리스는 이제 사회현상으로 굳어지고 있다.
섹스리스는 최근 1년간 성관계 횟수가 월 1회 이하인 상태를 말한다. 해외 논문에 발표된 세계 섹스리스 부부 비율은 20% 수준으로 한국은 일본(45%)에 이어 두 번째로 섹스리스 부부가 많은 나라로 등극했다.
부부관계는 친밀감과 유대감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애정표현 수단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부부가 부부관계를 갖는 게 남사스럽고 ‘그래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긴다. 결혼 전 남성이 여성에게 하룻밤을 위해 안달복달했다면 결혼 직후 상황이 역전한단다. TV에서도 아내가 장어를 구우면 불안하다, 늦은 밤 샤워하면 무섭다는 등 아내의 욕구를 희화화하는 경우가 적잖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중년 남자 연예인들이 ‘마누라가 친정 가서 좋다’, ‘마누라 보기 싫어 일부러 늦게 들어간다’는 말이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나온다. ‘자신은 행복하다’는 남성 패널에겐 어떻게 해서든 결혼생활의 ‘힘겨움’을 털어놔보라고 부추긴다.
서양 사회에서는 부부 사이에 섹스가 없으면 한쪽에 병이 있거나, 애정전선에 큰 문제가 생긴 것으로 간주한다. 건강한 삶에서 섹스를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다보니 병원에서도 커플테라피나 의학적 처방을 받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다.
반면 한국은 양쪽 모두 특별한 문제가 없지만 관계를 갖지 않는다. 성기능저하가 생긴 것도 아니고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상대방으로부터 성적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고 답하는 경우가 다수다.
이같은 현상은 남성에서 두드러지는 편이다. 대다수 남성들은 ‘바깥여자’가 와이프보다 더 매력적이라고들 입을 모은다. 심지어 와이프의 기분을 달래기 위한 성관계를 ‘의무방어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같은 현상은 성관계를 애정표현으로 생각하기보다 ‘욕구해소’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관점에서 비롯된 부분일 수 있다.
강동우성의학클리닉 조사에 따르면 성매매 같은 ‘정크섹스(junk sex)’를 외도라고 생각하지 않는 남성의 35.1%는 성관계를 쾌락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있었다. 정크섹스에 관대한 남성일수록 쾌락위주의 성관계를 중시, 배우자와의 안정된 성관계가 가져다 주는 친밀감과 유대감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심지어 중년층의 50%는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불륜을 이해한다고 답했다. 한 일간지가 설문조사를 시행한 결과 10명 중 8명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에게 호감을 느꼈고(78.2%), 호감이 외도로 이어진 경우도 28.8%나 됐다.
외도했다는 비중은 남자(50.8%)가 여자(9.3%)보다 훨씬 높았다. 30대 남성(42.3%)보다는 40대 남성(48.4%)이 외도를 훨씬 많이 경험했고, 50대·60대로 갈수록 높아졌다.
강동우 박사는 “남성은 40대 중반부터 갱년기를 느끼면 공허감, 위축현상을 지우기 위해 배우자보다 외도에 치중하는 경우가 있다”며 “‘아내에게 성적흥분을 못 느끼는데, 다른 여자에게 그것을 느껴서 외도를 한다’는 중년 남성들이 많은데 이는 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적잖은 부부심리 상담가들은 “남성은 아내를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고,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여성의 성은 터부시하는 측면이 크다”며 “그러면서도 ‘절절한 사랑’을 운운하는데, 대개 젊은 여성과의 연애를 꿈꾸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부가 치열하게 살아가다보면 전우애가 생기고 성적 매력이 반감될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은 여성의 외모와 이를 가꾸는 것에 대한 강박이 심한 편이다. 한 케이블방송에서 성매매에 빠진 남편 때문에 수년을 섹스리스로 살아온 아내의 고민 사례가 방영되자, 온라인 댓글은 대부분 여성의 외모를 지적하며 ‘나라도 저런 아내와 잠자리를 갖지 않겠다’는 악플이 달리는 것만 봐도 사회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패션매거진 ‘엘르’가 전세계 42개국 2만3400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라이프스타일을 묻는 서베이 결과 한국 여성은 유독 ‘노화에 대한 공포’를 크게 느끼고 있었다. 반면 브라질, 유럽 국가의 여성은 늙는다는 것에 별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경향을 나타내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한국인 대다수는 여성의 노화를 성적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바라보고, 여성의 노화는 성생활의 종말로 인식하는 성향을 보인다.
직장인 윤모 씨(34·여)는 평소 피부과 등을 다니며 주기적으로 ‘보수관리’에 나서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여성이 아닌 아줌마로 전락해버리는 두려움이 크다”며 “주변 친구 중에는 30대에 접어들고 아이를 둘 정도 낳자 자신을 방치하는 남편에게 진절머리를 느끼면서도 자신의 외모 등을 탓하는 경우가 적잖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저런 시도를 해도 ‘네가 20대 애들이랑 비교가 될 것 같느냐’는 말에 결혼을 후회할 정도로 스트레스 받더라”며 “이게 곧 내 미래가 될지도 몰라 나도 조금씩 몸매와 외모에 투자하는 중”이라고 털어놨다.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이모 씨(30·여)도 “결혼 후 남편과 각방을 쓴지 오래”라며 “남편이 10살 연상인데 어느새 시들해하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엔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남편이 점점 화를 내고, ‘헤픈 것 아니냐’는 표현까지 입에 담더라”며 “남편 본인은 회사 일을 핑계로 유흥업소를 드나드는 상황이라 진지하게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도 인간인 만큼 성적 욕구를 갖고 있다. 실제로 40세 이상의 여성을 대상으로 성행위와 만족도를 조사한 29개국 국제연구 결과 여성의 76%는 ‘원만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관계가 필수적’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같은 욕구는 지워져버린 채 부부갈등만 커지는 상황이다.
신용덕 호산여성병원 산부인과 원장은 “여성의 경우 성적 욕구가 적절히 충족되지 않으면 이를 성적 결핍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증세로 나타내기 시작한다”며 “이유를 모를 불안, 우울감, 불면증, 전신피로, 짜증이 나타나고 두통이나 위장병과 같은 증세가 유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당장 병이나 애정결핍을 유발하지 않더라도 미래 부부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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