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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지 않은 광기’ 사이코패스, 유·소년기 ‘품행장애’ 연장선일까
입력일 2019-11-14 11:35:09 l 수정일 2019-11-20 18:52:55
타인 감정 공감능력 ‘제로’, 분노·복수심엔 민감 … 15살 전 폭력성·도둑질 심하면 위험

사이코패스는 타인 공감능력이 낮은 대신 자신감이 넘치고 거짓말로 스스로를 잘 포장해 오히려 매력 넘치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다.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성범죄를 저지른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 이춘재, 서울 서남부 일대에서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 중상을 입힌 쾌락 살인마 정남규,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20명을 살해한 유영철은 한국사회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Psychopath) 연쇄살인범들이다.


사이코패스는 공감능력과 죄책감 결여, 낮은 행동 통제력, 극단적인 자기중심성, 기만, 공격성, 무책임함 등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의 한 종류다. 1920년대 독일의 심리학자인 쿠르트 슈나이더(Kurt Schneider)가 처음 소개한 개념으로 국내에선 2004년 유영철 사건을 계기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현병과 달리 환각이나 망상이 없어 ‘미치지 않은 광기’로도 불린다. 이들은 정상적인 현실감각과 인지기능을 가져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일상생활을 지내지만 공감능력이 전혀 없어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지 못한다. 공격성과 충동성은 아주 강해 타인에게 해를 끼쳐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후회하지 않고 스스로를 부풀려 과장하는 것을 즐긴다. 거짓말을 자주 하고 타인을 조종하려는 기질도 보인다. 여성 사이코패스는 남성 사이코패스와 달리 유약함을 어필해 상대의 경계를 느슨하게 한 뒤 범죄를 저지르거나,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케이스가 많다.


김율리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이코패스는 기본적으로 고통과 두려움에 둔감하기 때문에 위험한 익스트림 스포츠나 무서운 영화 등을 통해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좇는 경향을 나타낸다”며 “타인의 감정은 공감하지 못하는 반면 자신의 감정엔 민감해 자존심이 상하거나,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하면 강한 분노와 복수심을 갖고 공격성을 표출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모든 반사회적 인격장애 환자가 사이코패스인 것은 아니다. 학계에서는 반사회적 인격장애 환자의 10~20% 정도가 사이코패스인 것으로 보고 있다.


흔히 사이코패스 하면 ‘살인귀’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라고 해서 무조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2011년 미국에선 전체 인구의 1%, 정치인의 4%가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보고되기도 했다. 타인 공감능력이 낮은 대신 자신감이 넘치고 거짓말로 스스로를 잘 포장해 오히려 매력 넘치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사이코패스 판정은 캐나다 범죄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 박사가 만든 ‘PCL-R 테스트(Psychopathy Checklist-Revised)’로 이뤄진다. 이 테스트는 대인관계, 감정·정서, 생활양식, 반사회성 등 4가지 카테고리, 20개 항목으로 이뤄져 있다. ‘과도한 자존감’, ‘병적인 거짓말’, ‘공감 능력 결여’, ‘문란한 성생활’, ‘여러 번의 혼인 관계’ 등의 항목을 아니다(0점), 아마도(1점), 그렇다(2점)로 평가해 점수를 합산하는 방식이다. 40점 만점에 25점 이상이면 사이코패스로 본다. 유영철은 38점, 정남규와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이 29점, 연쇄살인범 강호순은 27점이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40점을 받은 완전체 사이코패스는 엄인숙(여·42·무기징역수)이다. 보험설계사였던 그는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첫째 남편과 둘째 남편을 살해하고 어머니와 오빠의 눈을 주삿바늘로 찔러 실명시키는 등 24건의 범행을 저질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반면 최근 전 남편을 살해한 뒤 유기한 고유정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것으로 판정됐다.


사이코패스가 되는 이유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선천적인 뇌 이상 등 생물학적 요인, 유년기 폭력 노출 등 사회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계에선 선천적인 뇌 이상에 따른 감정조절 능력 결여가 사이코패스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 브르크하멜국립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감정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 기능이 일반인의 1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영국 정신건강연구소 니겔 블랙우드(Nigel Blackwood) 박사팀의 연구결과 사이코패스는 죄책감, 두려움, 걱정 등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전두엽 피질 및 측두엽극(측두극: 측두엽 전방부)의 회백질 양이 일반인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감정 조절과 관련된 유전자 및 신경전달물질 이상도 원인으로 꼽힌다. 미국 하버드대, 브라운대, 스웨덴 카롤린스카의학연구소 등의 연구 결과 사이코패스는 학습능력·행동조절에 관여하는 모노아민산화효소A(MAOA, Monoamine oxidase A) 유전자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MAOA 유전자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을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세로토닌은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충동성 등을 억제해 ‘행복호르몬’ 또는 ‘조정호르몬’ 등으로 불리지만 제대로 분해되지 않고 과도하게 축적되면 오히려 불쾌함과 충동성이 강해질 수 있다. MAOA 유전자는 엎질러진 물을 닦아내는 걸레처럼 여분의 세로토닌을 청소해 평상심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준다.


사이코패스 같은 반사회적 인격장애 환자는 선천적으로 MAOA 유전자의 길이가 짧거나 활성도가 떨어져 과잉의 세로토닌이 제어되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쉽게 감정이 폭발하고 극단적인 폭력성과 공격성을 갖게 된다. 이같은 이유로 학계에선 MAOA 유전자를 ‘폭력유전자’, ‘전사유전자’로 칭하기도 한다.


MAOA 유전자는 X염색체에만 자리잡고 있다. 딸은 아버지에서 하나의 X염색체, 어머니에서 또하나의 X염색체를 물려받아 비정상 MAOA 유전자의 영향이 희석되지만 아들은 어머니에게서만 X염색체를 물려받는다. 사이코패스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많이 나타나는 이유다. 이밖에 사회적 요인으로 비일관적 훈육, 체벌, 빈약한 학업성과, 가정붕괴, 아동기 분리경험 등이 꼽힌다.


사이코패스는 보통 어린 시절부터 ‘품행장애’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사이코패스를 유년기 품행장애의 연장선으로 본다. 품행장애는 지나친 공격성, 타인을 해치는 행위, 자기 또는 남의 물건을 파괴하는 행동, 사기, 도둑질 등을 일삼는 상태다. 미국정신의학회는 15세 미만이면서 반사회적 인격장애와 같은 증상을 보이면 품행장애로 진단한다.


품행장애를 가진 아동은 친구를 자주 때리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고도 태연하다. 방화 수준의 불장난을 하거나, 이유 없이 학교에 결석하기도 한다. 이같은 선천적 특성을 가진 사람이 성장 과정에서 폭력적인 성향이 굳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사이코패스는 환자가 먼저 의료진을 찾는 일이 극히 드물어 치료 자체가 어렵다. 감정과 충동을 제어하기 위해 항우울제를 이용한 약물치료, 인지행동치료, 심리치료를 병행하지만 타인을 비정상으로 지목하는 등 치료 동기가 결여돼 치료 예후가 나쁜 편이다.


김율리 교수는 “사이코패스의 경우 후천적인 사회적 요인보다 선천적인 생물학적 요인이 훨씬 강하게 작용한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다만 선천적으로 사이코패스 요인을 갖춘 아이가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하면 그 유전자가 발현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므로 아이가 어릴 때부터 부족함 없이 화목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는 사회환경을 구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00년대에 사이코패스에 관심이 모아졌다면 2010년대엔 ‘소시오패스(sociopath)’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고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이코패스와 마찬가지로 정식 진단명은 아니며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하나로 분류된다. 사이코패스보다 수가 훨씬 많아 전체 인구의 약 4%가 소시오패스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공통점은 법과 사회적 관행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묵살하며, 후회나 죄의식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서 감정 폭발이나 폭력적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반면 사회적 교류 수준에서 큰 차이를 나타낸다. 다른 사람과 아예 감정을 교류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와 달리 소시오패스는 일정 수준의 공감과 사회적 애착 형성이 가능하다.


또 사이코패스는 자기 감정에 미숙하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극도의 감정반응을 보일 때가 많다. 반면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감정조절에 뛰어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이용한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필요하다면 순한 양처럼 행동하며 선한 미소를 짓고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데 능하다. 또 사이코패스는 윤리적·법적 관념이 희박하고 옳고 그름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반면 소시오패스는 잘못된 행동인 것을 알면서도 반사회적행동을 저지른다.


가장 큰 차이는 사이코패스는 선천적인 생물학적·유전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반면 소시오패스는 후천적 ‘환경’의 영향이 크다. 유년기에 학대나 방임 등을 겪으면 우울, 분노,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고 이를 감추기 위해 더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여기에 ‘성공 지향’을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와 무조건 최고가 돼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해지면 소시오패스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박정환 기자 superstar@heal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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